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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통영(옛 충무)에는 임진왜란 당시 왜적을 막아낸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충렬사(忠烈祠), 이순신공원, 한산도 충무공유적 등 해군과 관련 있는 유명한 사적지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뿐만이 아니다. 통영에는 6·25 전쟁 당시 해군이 거둔 승리도 적지 않게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해병(해병대) 하면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말이 먼저 떠오를 정도로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말이 너무 잘 알려졌다. 이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말은 1950년 8월 17일부터 8월 19 사이 통영지역에서 이루어진 통영상륙작전을 성공하게 한 대한민국 해병대의 활약에 대해 미국 여(女)종군기자가 “그들은 귀신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용감했다”고 소개하면서 널리 알려진 말이다.
통영상륙작전은 미군이나 한국 육군의 도움 없이 한국 해병과 해병대가 단독으로 펼친 최초의 상륙작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상륙작전이 성공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것은 통영읍(현 통영시)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원문고개를 일찍 확보하여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기에 가능하기도 하였다.
원문고개 전투는 1950년 8월 19일부터 9월까지 한국 해병대 2개 대대가 원문고개에서 거제도로 향하는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내어 부산에 진출하려던 북한군을 물리친 전투이다. 당시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아 온 힘을 쏟아 싸우는 국군과 유엔군의 거센 저항에 더는 낙동강 방어선에서 나아가지 못하자 남해안을 따라 마산(현 창원)과 김해 방향을 통해 부산으로 공격을 꾀하였다. 이에 북한군은 통영과 거제도를 확보하여 마산과 부산 간의 해상보급로를 끊고 진해를 위협하면서 부산에 압력을 주기 위해 통영을 침입하여 통영을 점령하였다. 거제도마저 북한군에게 점령당하면 부산이 위험하였다.
통영이 적에게 점령당하자 거제도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은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8월 17일 PC-703함 외 6척의 해군함정의 지원 아래 기습적인 통영상륙작전을 펼쳤으며, 8월 18일 통영읍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원문고개를 일찍 확보하여 적의 공격을 막았다. 그리고 8월 19일에는 통영 시가지를 총공격하여 남아있는 적을 무찌르고 통영을 완전히 되찾았다.
이후 원문고개를 되찾기 위한 북한군의 공격과 원문고개를 지키기 위한 전투가 계속 이어졌는데, 8월 20일 새벽 2시경 북한군은 밤을 이용하여 공격해왔다. 수류탄전과 우리 공군의 지원 공격으로 북한군은 물러났지만, 8월 21일 다시 포사격을 하며 공격해왔다. 이 또한 해병대가 물리쳤으나, 이후에도 원문고개를 차지하려는 북한군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8월 30일 북한군은 원문고개를 차지하고 있는 해병대를 무너뜨리기 위해 제석봉과 죽림리 지역에 모이고 있었는데, 미 공군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보았다. 8월 31일 김성은 부대장은 부대를 이끌고 수월리에 상륙하여 적과 싸웠으며, 원문고개로 공격해오는 북한군을 물리쳤다. 9월까지 계속된 북한군의 공격에 우리 해병대는 원문고개를 끝까지 지켰다.
원문고개 전투(방어전투)는 해병대와 해군 및 진해기지의 공군까지 참가하여 이루어진 연합작전 전투이자 북한군이 남해안을 통해 부산으로 침투하려는 길을 막아낸 전투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한 총 반격전을 하는데 그 힘을 준, 의미가 큰 전투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경남 통영시 무전동 원문공원(해병대공원)에는 통영지구전적비(1980년 2월 22일 건립)와 해병대 통영상륙작전기념관(2011년 8월 17일 개관), 충혼탑 등이 세워져 있다. 또 경남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 신거제대교 입구 오른쪽 공터가 있는 통영타워 옆에는 ‘해병대 처음 상륙한 곳’이라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해마다 8월 16일부터 18일까지 통영 원문공원과 통영시에서는 해병대사령부와 통영시 주관으로 통영상륙작전 전승 기념식과 추모식은 물론 사진전시회, 군복착용, 전투식량 시식, 시가행진 등 다양한 행사가 이뤄지고 있다.
역사적 배경
| 현재 주소 | 경상남도 통영시 광도면 죽림리 일대 |
|---|---|
| 현재 상태 | 변형 / 도로를 고치고, 교차로를 확장하는 등의 공사로 원형이 상당히 변형되었다 |
1950년 6월 25일 대대적인 남침을 시작한 북한군은 1950년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고, 7월 3일에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밀고 내려왔다. 한강 방어선을 적에게 내주고 후퇴하는 과정에 유엔군이 참전하기도 하였으나 북한군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지는 못하였다. 7월 16일 금강 방어선마저 무너졌으며, 7월 말에는 북한군이 낙동강지역에까지 내려오며 후퇴하는 국군과 유엔군에 대한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북한군의 우세한 병력과 장비에 밀려 낙동강까지 후퇴한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아 죽기를 각오하고 북한군에 맞서 싸웠다. 낙동강 방어선을 둘러싼 북한군과 더는 물러날 수 없는 국군·유엔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는데, 당시 북한군은 다음과 같이 4개의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함으로써 낙동강 방어선을 뚫고 부산을 점령하려고 하였다.
① 경부도로를 따라 대구를 공격
② 동해안 도로를 따라 포항-경주 방향으로 공격
③ 창녕 서쪽의 낙동강 돌출부를 공격해 유엔군의 보급로 차단
④ 남해안을 따라 마산-부산 방향으로 공격
하지만 북한군의 전투력은 전쟁을 일으킨 초기에 비해 떨어져 있었다. 병력과 장비 보충이 충분하게 되지 않을뿐더러 유엔군이 하늘을 장악하고 있어 큰 제한을 받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계속해온 공격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여전히 전쟁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한편, 국군과 유엔군은 군대와 장비를 더 늘리고, 병력과 장비를 보급할 보급로를 확보하고, 우세한 포병과 항공기로 적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가운데 반격(反擊: 되받아 공격함)을 위한 준비를 해나가는 가운데 북한군의 공격에 맞서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나갔다.
8월 들어서 북한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낙동강 방어선을 뚫기 위한 총력적인 공격이었다. 이에 국군과 유엔군은 ① 대구 북방에서는 왜관지구 전투와 다부동 전투, ② 포항-경주 방향에서는 기계(경북 포항시 기계면)와 포항 등지의 전투 ③ 낙동강 돌출부에서는 창녕 전투, 영산 전투, ④ 마산-부산 방향에서는 마산 서부의 반격전 등을 통해 적의 공격을 막아내며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나갔다.
그런 가운데 국군은 8월 중순 경남 진동리(현 경남 마산시 합포구 진북면 지산리)로부터 낙동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형성하고 북한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는데,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뚫는 게 불가능함을 알고 공격 방향을 바꿔 방어가 소홀한 경남 고성 이남의 통영지역으로 내려가 8월 17일 통영을 침입하였고, 뒤따른 부대를 계속 투입하여 통영반도를 점령하였다.
북한군은 견내량(見乃梁: 통영과 거제도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을 건너 거제도를 확보함으로써 마산과 부산 간 중요한 해상보급로를 끊고, 여기에서 포탄이나 미사일을 쏘아 맞힐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진해를 위협하면서 부산에 압력을 주려고 하였다. 이렇게 거제도마저 북한군에게 점령당하면 부산이 위험해지므로 국군과 유엔군은 통영을 반드시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읽기
읽기자료 1
통영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해군사령부는 해병대 김성은 부대로 하여금 거제도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김성은 중령은 즉각 비상소집 명령을 내려 출동준비를 하였다. 거제도를 방어하고 통영을 되찾으려면 거제도에 상륙해 통영을 공격하는 게 좋다는 것이 해군본부 판단이었는데, 김성은 부대장은 그 반대로 생각하였다. 통영으로 바로 상륙해 적을 무찌르는 것이 거제도를 지키는 지름길이라고 보았다.
상륙작전에는 함정 총 7척과 20여 척의 어선이 참여하였는데, 김성은 부대는 8월 17일 새벽, 해군 함정 512정과 FS평택호에 나누어 타고 통영반도 동북쪽 1㎞ 지점에 있는 지도(거제도 북쪽에 있는 작은 섬)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통영을 직접 공격하는 것보다 먼저 통영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원문고개를 장악하여 뒤따라오는 적의 진입을 막아놓고, 공격작전을 펴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8월 17일 오후 6시, 통영반도 동북방향에 있는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 해안에 상륙하기 시작하였다. 때맞춰 해군은 바다에서 통영 남쪽 해안에 함포사격을 퍼붓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통영에 상륙하는 것처럼 속여 적을 해안으로 끌어들이는 사이, 해병대가 통영 뒷산 망일봉을 빼앗으려는 계획이었다.
북한군은 우리 해병대가 통영항 정면으로 상륙할 것으로 판단하고, 고지에 배치하였던 병력을 통영 남해안 일대로 이동시켜 해안선에 배치했으므로 우리 해병대는 별다른 전투 없이 장평리 해안에 상륙할 수 있었다. 육지에 상륙한 해병대는 밤을 새워 가며 맹렬한 공격을 하였다. 제2중대는 8월 18일 새벽 고성에서 통영으로 진입하는 길목인 원문고개를 확보한 뒤 적의 계속되는 공격을 막아냈다. 또 3중대와 7중대는 통영 시가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망일봉 고지를 적보다 5분 먼저 점령하여 인해전술로 공격하는 적군 100여 명을 사살하였다.
정오 무렵부터는 통영 시가전이 시작되어 오후 4시 무렵 통영 시내의 적을 완전히 무찔렀으며, 통영을 완전히 되찾았다. 쫓기던 적군들은 작은 어선 3척을 빼앗아 탈출을 시도했으나, 해군 504정과 312정의 포격을 받고 바다에 묻혔다. 여기저기 숨어 있던 적까지 소탕한 8월 19일, 부대장과 해군 함장들, 그리고 경찰서장이 한자리에 모여 감격스러운 악수를 하며 승리를 축하하였다.
1950년 8월 23일 통영상륙 작전에 대한 취재를 위해 원문고개로 김성은 부대를 방문한 미국 『뉴욕 헤럴드 트리뷴(New York Herald Tribune)』지(紙)의 여종군기자 마가렛트 히킨즈(Marguerite Higgins, 마가렛 히킨스)는 수적으로도 우세한 북괴군 7사단 600여 명을 공격해서 적의 점령지를 탈환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귀신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용감했다(They might capture even devil)”라는 내용의 기사를 써 보도하였다. 이에 ‘귀신 잡는 해병대’란 말이 대한민국 해병(해병대)의 전통으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 질문1 통영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부대는 무슨 부대인지 써봅시다.
- 질문2 통영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우리 해군이 적보다 어느 곳을 먼저 점령하였기 가능했다고 할 수 있는가?
- 질문3 통영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우리 해병대의 활동상을 미국 여종군기자 마가렛트 히킨즈가 언론에 소개하게 되면서 우리 해병대는 무슨 해병대라는 별명으로 부르게 되었는지 써봅시다.
읽기자료 2
통영상륙작전을 앞에서 이끈 김성은 부대 제2중대는 1950년 8월 18일 새벽 고성에서 통영으로 진입하는 길목인 원문고개를 확보하였다. 이후 원문고개를 되찾기 위한 북한군의 공격과 원문고개를 지키기 위한 전투가 계속 이어졌다.
아군(我軍: 우리 편 군대)의 기습 상륙작전으로 통영에서 고성으로 후퇴한 북한군은 8월 19일 고성방면에서 원문고개 방향으로 3시간 동안에 포탄을 발사하며 아군을 공격하였다. 이에 대하여 아군은 즉각 반격하고, 진해기지에서 출격한 T-6기 4대의 편대로 원문고개 서북쪽 적의 포진지를 공격하였으며, 해상의 해군함정들도 동시에 포격하였으므로 적과 아군 사이에는 치열한 포격전이 계속되었다.
8월 20일 새벽 2시경 북한군은 밤을 틈타 다시 공격해왔다, 수류탄전 끝에 진지 일부가 무너질 즈음 공군의 지원 공격으로 북한군은 물러났지만, 21일 다시 포사격을 하며 공격해왔다. 이 또한 해병대가 물리쳤으나, 이후에도 원문고개를 차지하려는 북한군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8월 30일 북한군은 원문고개를 차지하고 있는 해병대를 무너뜨리기 위해 제석봉과 죽림리 지역에 모이고 있었는데, 이를 파악한 미 공군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보았다. 8월 31일 김성은 부대장은 부대를 이끌고 수월리에 상륙하여 적과 싸웠으며, 또한 원문고개로 공격해오는 북한군을 물리쳤다. 9월까지 계속된 북한군의 공격에 우리 해병대는 원문고개를 끝까지 지켰다. 9월 23일 11시 30분, 해병 1중대는 김성은 부대장의 지휘 아래 LST 단양호에 실려 통영 읍민들의 뜨거운 환송을 받으며 이미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다음 서울을 탈환하기 위하여 수색에서 서울로 공격하고 있던 해병대와 합세하여 서울탈환작전을 펼치기 위하여 인천으로 향하였다.
한국 해병대는 적의 유일한 공격로이자 통영 방어에 있어서 중요한 곳인 원문고개를 일찍 빼앗아 여러 차례의 전투 끝에 적을 물리침으로써 낙동강 방어선의 서쪽을 위협하는 요소를 제거하였으며, 나아가 인천상륙작전으로 한국군이 북진하게 되는 9월 말까지 원문고개를 필사적으로 방어하였다.
이처럼 1950년 8월 19일부터 9월까지 한국 해병대 2개 대대가 원문고개에서 거제도로 향하는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낸 전투인 원문고개 방어전투는 북한군이 부산으로 들어올 수 있는 빈틈을 제거했다는 점과 작전상 후퇴만 거듭하던 국군이 모처럼 크게 승리하여 사기를 크게 올려 준 전투인 동시에 이후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한 총 반격전을 전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전투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자못 큰 전투였다.
- 질문1 김성은 부대가 원문고개를 확보한 것은 1950년 몇 월 며칠인지 써봅시다.
- 질문2 원문고개를 빼앗기 위해 8월 30일 북한군들이 모이고 있었을 때 어떤 공격으로 그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는지 써봅시다.
- 질문3 원문고개 방어전투는 어떤 전투를 말하는지 간단히 써봅시다.
- 질문4 원문고개 방어전투의 의의를 두세 가지 정도로 써봅시다.
시각자료
시각자료 1
통영상륙작전 당시의 상황을 표시한 작전상황도이다.
- 질문1 푸른색과 빨간색으로 표시된 화살표는 무엇을 나타내는지 써봅시다.
- 질문2 이 전투를 승리를 이끄는데 크게 활약한 부대장은 훗날 국방부장관까지 하였다. 누구인지 써봅시다.
- 질문3 당시 아군은 통영을 직접 공격하는 것보다 먼저 통영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장악하여 뒤따라오는 적의 진입을 막아놓고, 공격작전을 펴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였다. 통영으로 들어오는 길목은 어디인지 찾아 표시해 봅시다.
- 질문4 북한군이 질문3)에 해당하는 곳을 다시 빼앗기 위해 8월 19일부터 9월까지 공격해옴으로써 전투가 계속 벌어졌는데, 이 전투를 무슨 전투라고 부르는지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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