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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문화재청→문화재검색 ‘임시수도’→사진 ‘건물 원경’
부산 동아대학교는 승학캠퍼스(부산광역시 사하구 하단2동), 구덕캠퍼스(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 3가), 부민캠퍼스(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 2가) 이렇게 3개의 캠퍼스로 나뉘어 있는데, 대학본부는 승학캠퍼스에 있다. 그리고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 정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푸른색 유리로 둘러싼 2개의 현대식 높은 건물이 서로 이어져 있는 모습 앞에 붉은색 벽돌들이 새롭게 단장하여 옆으로 길게 자리를 차지하고 누워있는 것처럼 보이는 예스러운 건물을 마주치게 되는데, 이 건물이 동아대학교박물관이다.
동아대학교박물관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 경상남도 도청(都廳: 도의 행정을 맡아 처리하는 지방 관청)을 진주(晉州)에서 부산(釜山)으로 옮기면서 세워진 건물이다. 해방 이후 미군정기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경남도청으로 사용하다가 6·25 전쟁 기간 부산을 임시수도로 삼으면서 정부청사(廳舍: 관청의 사무실로 쓰는 건물)로 사용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수도가 다시 서울로 돌아간 이후부터 1983년 경남도청이 다시 부산에서 창원(昌原)으로 옮겨가지 전까지 원래 목적대로 경남도청 건물로 사용, 근 60년을 경남도청 건물로 사용하였다.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옮겨간 이후에는 부산지방법원과 부산지방검찰청 건물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2002년 동아대학교에서 사들여 현재 박물관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동아대학교박물관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경남도청으로 세워져 6·25 전쟁 기간에는 임시수도 정부청사, 정전협정 후에는 경남도청,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옮긴 에는 부산지방법원과 부산지방검찰청 건물 등으로 사용한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정치·사회적 변화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건물이다. 이런 역사적 가치와 함께 건축이나 예술적으로도 그 가치가 있어 2002년 9월 13일 등록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동아대학교박물관 뒤편 오른쪽(정문에서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를 바라보는 방향에서는 왼쪽 조금 뒤편)에는 임시수도기념관과 전시관(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3가)이 자리 잡고 있다. 임시수도기념관은 경상남도 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겨오면서 도지사가 사용할 관사(官舍: 공무원에게 빌려 주어 살도록 마련한 집)로 지어진 2층 기와집 건물이다. 6·25 전쟁 기간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었을 때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며 일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수도가 다시 서울로 돌아간 이후에는 원래 목적대로 경남도지사 관사로 사용되었는데, 1983년 경남도청이 다시 부산에서 창원시로 옮겨가면서 1984년 이곳을 임시수도기념관으로 꾸며 임시수도 당시의 역사적인 사실과 관련 있는 유물 등을 전시하여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또 이 건물은 2002년 5월 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되었으며, 2012년에는 기념관 바로 옆에 전시관을 세워 교육과 행사를 할 수 있는 자리로 활용하고 있다. 부산 임시수도 정부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아대학교박물관과 함께 임시수도기념관 및 전시관을 꼭 찾아보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몇 년 전부터는 부산 임시수도기념관 주차장 등에서 ‘임시수도, 그때를 아십니까?’라는 주제로 피난시절의 생활상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행사를 비롯하여 6·25 전쟁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역사적 배경
현재 주소 |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2가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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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태 | 원형보존 / 현재 동아대학교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동아대학교에 의해 관리가 잘 되어 보존되고 있다. |
1950년 6월 25일 대대적인 남침을 시작한 북한군은 전쟁 시작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였다. 6월 27일 북한군이 서울에 다다르자 정부는 급히 대전으로 옮겨 대전을 임시수도로 삼았다. 또한, 한강 방어선을 중심으로 북한군의 공격을 막고자 하였으나 7월 3일 북한군이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물밀 듯이 내려왔다. 한강 방어선을 적에게 내주고 후퇴하는 과정에 유엔군이 참전하기도 하였으나 북한군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지는 못하였다. 7월 16일 금강 방어선마저 적에게 무너지자 정부는 수도를 다시 대전에서 대구로 옮기게 되었다. 거듭 후퇴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던 국군과 유엔군은 7월 20일에는 대전마저 적에게 내주었다.
북한군의 우세한 병력과 장비에 밀려 8월 초에는 낙동강까지 후퇴하였다. 또다시 정부는 8월 18일 수도를 대구에서 부산으로 옮겼으며, 국군과 미군은 이제는 더 물러날 수 없다는 각오 아래 낙동강 방어선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아 9월 중순까지 약 1개월 반 동안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그러면서 유엔군을 늘리고 장비를 보충하면서 반격(反擊: 되받아 공격함)을 준비하였다.
한강 방어선, 금강 방어선, 대전 방어선, 대구는 물론 경상북도 대부분까지 적들에게 빼앗기며 밀리기만 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실시와 함께 9월 16일부터 반격을 함으로써 전쟁 상황이 역전되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허리가 잘린 북한군은 북쪽으로 후퇴하였고, 국군과 유엔군은 9월 27일 서울을 되찾아 중앙청에 태극기를 걸었으며, 9월 28일에는 서울을 완전히 되찾았다(9·28 서울 수복). 나아가 국군과 유엔군은 도망가는 북한군을 쫓으면서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차지하였으며, 10월 27일에는 수도를 부산에서 서울로 옮겼다.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이 계속되면서 10월 말에는 압록강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북한군을 돕기 위해 10월 25일 참전한 중국군의 대대적인 공격에 밀려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하게 되었고. 1950년 12월 4일에 평양에서 철수하였으며,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을 버리고 다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1·4 후퇴). 북한군이 서울 가까이 내려오자 정부는 1월 3일 다시 부산을 임시수도로 정해 1월 4일 부산으로 이사하였으며, 1월 5일 서울은 북한군과 중국군에 완전히 점령당하였다.
그러나 평택까지 밀렸던 국군과 유엔군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3월 14일 다시 서울을 되찾고, 5월 중순경에는 38선 부근까지 올라갔다. 이후 전쟁은 큰 변화 없이 38선 부근을 중심으로 남북이 서로 밀고 밀리는 상태만 계속되었다.
이런 상황에 소련의 휴전 제안에 따라 미국과 소련 두 나라는 휴전할 것에 동의하였다. 하지만 휴전은 서로 간의 견해 차이로 금방 이루어지지 않고, 1951년 6월부터 정전회담을 시작한 지 근 2년이 지나서야 정전협정이 맺어졌다. 우리 정부는 휴전을 반대하고 정전회담에 참여하지 않기도 하였지만,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중국군 및 북한군은 비무장지대 설치,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 감독위원회 설치 등을 중요 내용으로 한 정전협정(정식 이름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사령관 및 중공 인민 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읽기
읽기자료 1
일제 침략으로 1910년 나라를 빼앗기자 다양한 독립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세워지더니 마침내 상하이[上海(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상해 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임시정부(臨時政府)는 말 그대로 임시로 세운 정부로, 국제법 차원에서 적법한 정부로 인정받지 못한 사실상의 정부를 가리킨다. 이 임시정부라는 말은 많이 들어왔는데, 임시수도라는 것도 있다. 임시수도(臨時首都)는 내전이나 외국의 침략 등으로 본래의 수도가 점령되거나 점령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 정부가 잠시 동안 수도 기능을 하도록 선택한 도시를 말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하여 1948년 8월 15일 태어난 대한민국은 수도를 서울로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다만, 6·25 전쟁 기간 수도 서울을 대신할 임시수도를 네 번 두었는데, 1950년 6월 27일에서 7월 16일까지는 대전(大田)에, 7월 16일에서 8월 17일까지는 대구(大邱)에, 1950년 8월 18일에서 10월 27일까지는 부산(釜山)에, 또 1951년 1월 4일에서 1953년 8월 14일까지는 부산에 두었다. 지역적으로는 대전, 대구, 부산 세 곳으로 그 기간은 2개월 정도 빠진 3년 정도이다.
첫 번째 임시수도는 대전으로,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대규모로 남침하여 물밀 듯이 내려와 서울까지 위협하자 정부는 여러 차례 국무회의를 거친 끝에 6월 27일 새벽 정부를 수원으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이 새벽 4시 서울을 떠나 대구를 잠시 들른 뒤 대전으로 향하자 국무위원들은 이날 오후 대전으로 이동하였고, 이때부터 충청남도 도청은 정부의 임시청사로 사용되었다. 이후 입법부인 국회와 대법원 등 사법부 사무실도 설치되었다. 이들이 이동한 후 충청남도 도청은 대전 방어선 지휘를 위한 미군 제24사단 지휘소로도 활용되었는데, 대전은 약 20일간 대한민국 임시수도로 있었다.
두 번째는 대구로, 북한군이 대전 근방까지 내려오자 정부와 입법·사법부는 7월 14일에서 7월 16일에 걸쳐 대구로 다시 이동, 대구를 임시수도로 삼았다. 7월 16일 금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7월 20일에는 대전이 점령당하였는데, 대구로 내려간 정부는 현재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2가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안에 있는 경상감영(監營: 조선 시대에, 관찰사가 일을 보던 관청)을 임시수도 정부청사로 사용하였다. 신성모 국무총리서리 겸 국방장관은 현 한은대구지점 자리인 국방부 임시청사에서, 조병옥 내무부장관은 도지사실을, 지사와 내무차관은 도내무국장실을 각각 집무실로 썼다. 대구는 정부가 다시 옮겨갈 때까지 약 30일간 대한민국 수도 역할을 하였다.
세 번째는 부산으로, 북한군의 우세한 병력과 장비에 밀려 8월 초에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까지 밀리게 되자 정부는 8월 18일 수도를 대구에서 부산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부산 제1차 임시수도). 이때부터 국군과 유엔군이 9월 28일 서울을 되찾아 10월 27일 서울로 돌아갈 때까지 약 70일간 대한민국 수도 역할을 하였다.
네 번째는 또 부산으로,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압록강까지 올라갔으나 1950년 10월 25일 중국군이 북한군을 도와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다시 밀리기 시작, 12월 4일에는 평양에서 철수하였다. 계속 후퇴하는 가운데 북한군이 서울 가까이 내려오자 정부는 1951년 1월 3일 다시 부산을 임시수도로 정해 1월 4일 부산으로 이사하였다(부산 제2차 임시수도).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계속 머무르다 1953년 8월 15일 정부는 서울로 돌아갔으며, 국회는 9월 16일 서울로 돌아갔다. 부산 제2차 임시수도 기간은 2년 7개월 10일 정도였는데, 제1차 임시수도 기간까지 합치면 근 2년 10개월, 이렇게 부산은 6·25 전쟁 내내 대한민국 수도 역할을 하였다.
- 질문1 임시수도가 무엇인지 간단히 써봅시다.
- 질문2 대한민국 임시수도는 어느 지역에 있었는지 모두 써봅시다.
- 질문3 대한민국 임시수도가 있었을 당시 정부청사는 각각 어느 건물을 사용했는지 써봅시다.
- 질문4 부산이 제2차 임시수도로 정해진 이유를 써봅시다.
읽기자료 2
대한민국 임시수도가 부산에 있을 때 정부청사는 경상남도 도청 건물을 사용하였다. 경상남도 도청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 4월 1일 경남도청을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기면서(실제 업무 시작은 4월 25일) 세워진 건물이다.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정 시기는 물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경남도청으로 사용되었는데, 6·25 전쟁 기간 부산을 임시수도 삼으면서 정부청사로 사용(당시 주소: 경상남도 부산시 대안동)되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씩이나 정부청사로 사용되었는데, 첫 번째는 북한군에 밀려 수도가 서울에서 대전으로, 대전에서 대구로, 다시 부산으로 옮겨진 1950년 8월 18일부터 서울을 되찾은 10월 27일까지, 두 번째는 중공군에 밀려 다시 서울에서 후퇴한 1951년 1월 4일부터 휴전 후 다시 서울로 돌아간 1953년 8월 15일까지 대한민국 정부청사로 사용되었다.
두 차례 부산에 임시수도가 있는 동안 모두 경남도청 건물의 본관은 정부청사로, 상무관(商務官: 국외에 있는 공공기관에서 무역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공무원 또는 그들이 근무하는 곳) 건물은 국회의사당으로, 경남도지사 관사는 대통령이 머무는 곳으로 사용하였는데, 기간으로는 2개월 정도 모자란 근 3년간 사용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수도가 서울로 되돌아가자 이 건물은 원래대로 경남도청으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1983년 7월 1일 경남도청이 부산에서 창원으로 옮겨가지 전까지 경남도청 건물로 사용되었다. 1925년 세워진 이래 58년 3개월 동안 경남도청 건물로 사용되었다.
1983년 도청이 창원으로 옮겨간 이후인 1984년 10월 26일부터 부산지방법원과 부산지방검찰청 본관으로 사용하였으며, 2001년 9월 27일 부산지방법원과 부산지방검찰청이 거제도로 옮겨가자 2002년 동아대학교에서 사들여 현재 박물관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경남도청 건물, 임시수도 정부청사, 부산지방법원과 부산지방검찰청 본관, 박물관 등으로 사용된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와 미군정시기, 6·25 전쟁, 휴전 등을 거치면서 굵직한 우리나라 근대사의 정치·사회적 변화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또한 이 건물은 붉은 벽돌 건물로 쌓아진 2층 건물로, 서양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여기에 눈에 띄는 중앙 건물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중앙 정면의 구조나 양쪽 면의 마무리 구성이 비교적 아름다운 건물로 평가되고 있다. 역사적 가치는 물론 예술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가치가 있는 이 건물은 2002년 9월 13일 등록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편, 동아대학교박물관 뒤편 오른쪽(정문에서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를 바라보는 방향에서는 왼쪽 조금 뒤편)에 임시수도기념관 및 전시관(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3가)이 있다. 임시수도기념관은 경상남도 도청이 1925년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겨오면서 도지사가 사용할 관사로 1926년 8월 나무로 지어진 2층 기와집 건물이다. 6·25 전쟁 기간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었을 때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官邸: 정부에서 지위가 높은 공무원들이 살도록 마련한 집)로 사용되었다.
수도가 다시 서울로 돌아간 이후에는 원래 목적대로 경남도지사 관사로 사용되었는데, 1983년 7월 경남도청이 창원시로 옮겨가면서 부산시에서 건물을 사들여 1984년 6월 25일 임시수도 당시의 역사적인 사실과 관련 유물 등을 전시한 임시수도기념관으로 문을 열어 활용하고 있다. 기념관에는 임시수도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의 유품을 중심으로 하는 소장품 152점이 여섯 개의 방에 전시되어 있다.
일본식과 서양식 건축양식이 함께 반영된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의 건축 경향을 알 수 있는 것은 물론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는 등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어 2002년 5월 6일 부산시광역시 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되었다. 2012년에는 교육과 행사를 할 수 있는 전시관이 임시수도기념관 바로 옆에 세워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 질문1 부산 임시수도 시절 대한민국 정부청사는 경남도청 건물을 사용했다면, 국회의사당은 어떤 건물을 사용하였는지 써봅시다.
- 질문2 부산에 있던 옛 경상남도 도청은 그동안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그리고 현재는 어떤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지 써봅시다.
- 질문3 부산 임시수도 시절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며 일하던 곳은 어느 건물이었으며, 현재 이 건물은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써봅시다.

시각자료
시각자료 1

부산광역시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 중심 건물을 정면에서 본 모습이다.
사진출처 : 문화재청→문화재검색 ‘임시수도’→ 사진 ‘건물 정면’
- 질문1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는 크게 경영대학, 사회과학대학, 박물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진에서 박물관에 해당하는 건물은 어느 것일지 가리켜봅시다.
- 질문2 앞쪽 옆으로 길게 자리 잡은 건물의 특징은 무엇인지 보고 느끼는 대로 써봅시다.
시각자료 2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3가에 있는 임시수도기념관의 모습이다.
- 질문1 본래 이곳은 경남 도지사의 관사였다. 6·25 전쟁 기간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면서 경남도청은 정부청사로 사용되었는데, 그러면 이 건물은 어떤 사람이 사용했을지 써봅시다.
- 질문2 이 건물은 어떤 특징이 있는지, 눈에 띄는 것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사진을 보고 느끼는 대로 써봅시다.
- 질문3 이 건물은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3호이기도 하다. 이처럼 기념물로 지정하고, 임시수도기념관으로 탈바꿈하여 활용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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