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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삼 생가(대통합을 꿈꾼 독립운동가 김동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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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정한 자리에서 죽게 되는 것도 과분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독립군이라면 대개 풀밭이나 산 가운데서 남들이 어데서 죽었는지도 알 수 없이 죽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네가 원래 그런 죽음을 소망하였던 바인데 오늘날 이런 곳에서 죽게 되는 것은 유한으로도 생각된다. 죽기 전에 여러 친구들을 만나서 부탁할 말이 몇 가지 있지마는 어찌 마음대로 되겠느냐."

 

김동삼은 하얼빈의 일본총영사관에 체포되었다가 신의주지방법원의 검사국으로 옮겨져 취조심문과 예심을 받았고 공소를 제기하여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졌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는 동안 그의 몸은 쇠약해지고 병이 들었으나 그의 의지와 기개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 1934년 1월 초부터 김동삼은 늑막염으로 병감에 수용되어 신음하고 있었다. 그가 위중하다는 연락을 받고 하얼빈에서 맏아들 김정묵이 달려왔다. 김동삼은 걱정하며 먼 거리를 달려온 아들이게 위와 같이 말하였던 것이다. 독립운동가로서 감옥에서 최후를 맞는 것은 ‘과분한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만주 벌판 이름 모를 곳에서 얼마나 많은 독립군들이 희생되었던가. 김동삼은 새삼 그들의 최후를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말을 듣는 아들은 안타까울 뿐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1리 278
현재 상태 변형 / 김동삼의 집은 외형이 많이 바뀌었으나 일부 구조는 그대로이다.

김동삼(金東三, 1878~1937)은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 협동학교와 신민회, 대동청년단에서 애국계몽운동을 펼쳤으며,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1년 삼원보(三源浦)에 정착한 김동삼은 경학사 사장 이상룡(李相龍)을 도와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힘을 쏟았다. 1914년에는 백서농장(白西農庄)의 장주가 되었으며, 1919년 서로군정서 참모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6월, 간도참변으로 무너진 동포사회와 독립군을 추슬러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를 주도하고, 통군부(統軍府)를 탄생시켰다. 8월 30일 통군부가 통의부(統義府)로 확대 개편되자, 총장이 되어 이를 이끌었다.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리자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여하였다. 이 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그는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힘썼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주로 돌아왔다. 그 뒤 정의부와 민족 유일당운동촉성회를 이끌며,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에 힘을 기울였다.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북만주에서 활동을 모색하던 김동삼은 1931년 10월 하얼빈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10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37년 4월 13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만해 한용운이 그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지냈다. 그의 유언대로 화장하여 한강에 그 유해를 뿌렸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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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김동삼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발을 내디딘 것은 만 29세가 되던 1907년이었다. 서울에 올라가 새로운 문물을 접한 유인식(柳寅植)이 1904년에 계몽운동을 시작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07년 3월에 다시 시도하여 성공한 것이 협동학교의 설립이었다. 여기에는 유인식을 비롯하여 김후병(金厚秉), 하중환(河中煥)이 앞장섰다. 김동삼이 고향 마을 천전리에 중등과정인 3년제 협동학교의 설립에 참가한 것이 바로 독립운동의 출발점이었다. 처음에 천전리 의성김씨 종손 김병식(金秉植)이 교장을, 그리고 김동삼이 교사를 거쳐 교감을 맡았다.

협동학교는 안동지방 보수 유림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보수 유림을 개화하여 안동지방 계몽운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다음 협동학교 설립 취지문을 통해 이 학교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일본과 청, 일본과 러시아의 두 차례의 전쟁은 동양전역을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일본과 영국, 일본과 프랑스 등 열방(列邦) 사이의 각종 협약으로 인하여 세계의 미래는 큰 풍운을 일게 하는 원인을 만들고 있다. ……(중략)……

아! 우리 안동의 인사이시여! 우리 안동은 옛날부터 학문을 쌓은 훌륭한 선비가 많이 배출된 곳이고, 학문의 운기가 일찍이 열리어 나라의 예우가 있었고, 온 국민이 많이 배출된 곳이고, 학문의 운기가 일찍이 열리어 나라의 예우가 있었고, 온 국민이 기대하던 희망이 가장 두터운 고을이었다. 그러한 즉 우리 안동인사는 국가에 대한 책임이 가장 무겁지 아니 한가, 우리 안동인사가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고 있음을 스스로 알지 못하여, 다른 여러 고을의 사람들이 다투어가며 개화를 소리치고 있는데, 우리는 홀로 이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겠는가! 여러 고을의 사람들이 앞서 나와 이끌고 있다. 우리 안동인사가 홀로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지 말라 . 지금 한 개의 학교 창립도 오히려 못 이루고 우리 안동 인사가 무슨 얼굴로 다른 곳의 사람을 대하려 하는가! 오늘 비록 늦기는 하였으나 뜻을 모아 여러 동지들이 발기하여 이 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하략)……"

 

당시 국제 정세의 인식과 아울러 서양의 근대적 학문과 기술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여 안동 유림의 분위기가 새로워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아울러 전통적 유림의 본고장인 안동 지방이 그 폐쇄성으로 인하여 타 지역에 비해 낙후한 점을 지적하고, 1905년 을사 5조약 강제 체결 이후 일제에 의해 한국이 보호국화 되어 가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구국을 위한 방략으로 협동학교를 중심으로 계몽운동으로의 전환을 강조하고 있다.

협동학교는 3년제 중등학교로 예과와 본과를 두었다. 교과목은 수신, 국어, 역사,지지, 외지, 한문, 작문, 미술, 대수, 물, 화학, 생리, 동물, 식물, 박물, 창가, 체조 등 17과목이었다. 이 학교는 영남사회가 변하는 교두보이자, 새로운 깃발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당시 『대한매일신보』나 『황성신문』은 협동학교 설립과 발전상을 보도하면서 그 역할에 대하여 격려하고 기대감을 표시하였다. 유림들의 압력과 예천의병의 공격으로 교사들이 폭살당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협동학교는 신지식인, 젊은 지성을 육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양성된 인물들이 경북지역 곳곳으로 계몽운동을 확산시켜 나갔다. 그런 학교였으므로 어려움을 겪을 때 『서울신문』에서 격려하는 글을 게재하였고, 신민회(新民會)에서는 교사들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 질문1 김동삼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발을 내딛게 된 나이는 몇 살 때였나요?
  • 질문2 협동학교 설립에 협조했던 주요 인물들을 말해보시오.
  • 질문3 김동삼 등이 협동학교를 세운 중요한 목적은 무엇인가요?
  • 질문4 협동학교의 학생들이 배웠던 교과목을 말해보시오.

읽기자료 2

김동삼은 협동학교를 경영하는 일선에 나서는 한편, 1909년 3월 경 대한 협회 안동 지회의 설립에 중심 역할을 하였다. 또한 1909년 10월에는 남형우(南亨祐), 안희제(安熙濟), 서상일(徐相日) 등과 더불어 비밀 결사인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을 결성하였다. 대동청년단은 17세부터 30세 미만의 청년으로 조직되었다. 1907년 결성된 비밀 결사 단체인 신민회가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중부지방 이북에 치우쳐 있는 반면에 대동 청년단은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김동삼은 신민회에도 영남인사로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신민회와 동지적 결속관계를 가지며 협동학교를 운영하는 한편, 서상일과 안희제 등을 중심으로 영남지역에서 조직된 대동 청년단에 가입하여 경북과 경남 전체 계몽운동가를 묶어 나갔다. 이 사실은 당시 그가 서울과 대구, 그리고 안동을 잇는 큰 틀에서 활약하였고, 계몽운동 노선 가운데서도 진취적이고 강성을 지닌 비밀결사체에 가담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겉으로는 협동학교라는 공개된 공간에서 민족문제를 해결해 나갈 새로운 지성을 키워내고, 속으로는 독립군 양성으로 방향을 가늠하고 있었던 것이다.

  • 질문1 김동삼이 안희제, 서상일 등과 더불어 결성했던 비밀결사는 무엇인가요?
  • 질문2 김동삼이 가입하여 활동했던 단체들을 말해보시오.
  • 질문3 김동삼이 협동학교 운영에 적극 참여하면서도 다른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활동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읽기자료 3

1910년 8월에 나라가 망하자, 더 이상 국내에서 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만주로 망명하는 길을 택하였다.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키운 뒤에 국내진공을 감행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그래서 만주 망명 계획이 수립되고, 결국 1910년 12월 말에서 이듬해 1월 사이에 가문을 이끌고 안동을 출발하였다.

이들의 망명은 대단위로 이루어졌다. 천전리 의성김씨 문중과 역시 안동에 자리 잡은 이상룡의 고성 이씨 문중에서 각각 150명 정도가 만주로 향했다. 또 이들과 혼맥(婚脈)을 가진 영덕의 무안 박씨, 울진의 평해 황씨, 안동의 흥해 배씨, 그리고 영양 주실 마을의 한양 조씨 문중 등이 대규모로 참가하였다.

김동삼은 1911년 1월에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유하현 삼원보에 도착했다. 그는 우선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하고 경학사(耕學社) 결성에 참가하였다. 초대 사장 이상룡(李相龍)을 도와 독립 운동 기지 건설에 힘을 쏟았다. 이러한 과정은 안동출신 인사들과 이회영 일가를 비롯한 신민회가 힘을 합쳐 벌인 사업이었다.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동포들을 이주시켜야 하는데, 그러자면 우선 경작지가 필요했고, 농사가 펼쳐져야 했다. 그 사업을 주도해 나갈 조직이 바로 경학사였고, 거기에서 인력을 양성한 기관이 신흥강습소와 그를 이은 신흥학교·신흥 무관 학교였다.

김동삼은 1914년에 백서농장(白西農庄)을 건립하고, 그 농장주(農庄主)가 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중일 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여 김동삼을 비롯한 신흥 무관 학교 졸업생들과 부민단 간부들을 중심으로 백서농장을 창설하고 대일무장투쟁에 대비하였다. 즉 신흥학교 1~4회 졸업생들과 그 분교의 노동야학 졸업생 등 385명을 인솔하고, 통화현(通化縣) 팔리초(八里哨) 깊은 산 속에 들어가 군대를 창설한 것이다. 백두산 서쪽 깊은 산 속에 자리 잡았다고 ‘백서’라는 이름을 붙이고, 군대조직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농장’이라고 위장했지만, 사실상 이것은 군사병영이었다. 그러니 백서농장은 망명 이후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군대를 조직하는 데 힘을 쏟은 첫 결실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3·1운동이 일어난 후 백서농장은 교통이 불편하고 물과 토지가 부적절하다는 결론으로 폐지되었다.

1919년 초에 백서농장이 폐지된 후 김동삼은 1919년 2월 중국 길림성 길림시에서 김좌진(金佐鎭), 서일(徐一), 유동열(柳東說) 등 39명의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같이 대한 독립 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하였다.

  • 질문1 김동삼이 만주로 망명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 질문2 김동삼이 안동 지역의 여러 문중 사람들과 처음 정착한 곳은 어디인가요?
  • 질문3 유하현 삼원보에 설립된 학교 이름은 무엇인가요?
  • 질문4 김동삼이 1914년에 건립한 농장은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4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와의 강력한 항전을 목적으로 하는 군사적 성격의 항일 독립운동 단체와 독립군단의 정비 또는 새로운 결성이 활발해졌다. 당시 서간도에는 세 가지 조직이 결성되어 독립운동 전선이 새롭게 정비되었다. 하나는 종래의 부민단을 한족회(韓族會)로, 다른 하나는 백서농장 군영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또 다른 하나는 고산자에 있는 신흥중학교(新興中學校)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각각 개편한 것이다. 먼저 한족회는 부민단의 유하·통화·흥경현 대표들이 1919년 4월 삼원보에 모여 결성되었다. 한족회는 곧 백서농장을 철수시키고 서로군정서로 발전시켰다. 이에 따라 한족회는 민정(民政)과 군정(軍政) 이원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때 백서농장을 해체하고 삼원보로 귀환한 김동삼은 한족회에서 서무사장(庶務司長)을 맡았다. 바로 이어서 그가 서로 군정서 참모장에 취임하였고, 한족회 서무사장 자리를 같은 마을 출신이자 집안 조카인 김성로(金聲魯)에게 인계했다. 또 학무사장은 집안 동생인 김형식(金衡植)이 맡았다. 백서농장 장주를 거치면서 김동삼은 독립운동계의 거성으로 자리 잡아 갔던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서로 군정서는 당초 정부조직으로 추진되었다. 이미 「대한독립 선언서」를 통해 ‘대한독립’을 선언했으니, 그렇다면 당연히 독립된 국가 수립이 뒤따라야했다. 그래서 정부조직에 나섰지만, 4월 11일에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보고서, 정부 외곽 조직으로 위상을 정리하고, 이상룡이 최고책임자인 독판을 맡았다. 한족회가 민정기관이라면, 서로군정서는 군정기관인 셈이다.

김동삼은 서로군정서 참모장을 맡아 독립군 조직을 움직여 나갔다. 1920년 여름부터 일본군 침략이 간헐적으로 자행될 때, 그는 사령관 이청천(李靑天)과 함께 300여 명의 서로군정서 독립군을 지휘하여 북간도로 이동시켰다. 7월 29일에는 부대를 안도현(安圖縣) 삼인방(三仁坊)에 주둔시키는 한편, 8월에 왕청현 서대파(西大坡)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방문하여 작전을 논의하기도 했다. 그 후 서로군정서군이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를 치른 후 북상하여, 밀산(密山)에서 북로군정서군을 비롯한 10여 개 독립군과 연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고 러시아로 넘어갈 때, 김동삼은 서간도에 남아 독립 전선을 재정비하였다. 북상한 부대와 달리 서간도에서도 다시 군사력을 기르고, 조직을 정비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지만, 일본군의 보복공세로 말미암아 서간도나 북간도지역 한인 사회는 모두 참변을 겪었다. 1920년에 벌어진 경신참변(庚申慘變)은 김동삼 가족에게도 그대로 밀어 닥쳤다. 일본군이 삼원보 삼광학교(三光學校) 교장으로 활약하던 동생 김동만을 살해한 것이다. 김동삼은 김형식과 논의하여 집안 인사들을 급히 북만주로 옮겼다. 이리하여 천전리 마을 사람들이 서간도 시절을 마무리하고 북만주 시대를 열게 되었다.

김동삼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무는 경신참변으로 붕괴된 한인동포사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과 작게 분산된 독립군 조직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922년 6월에 한인 사회와 독립군 통합을 도모하기 위해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를 주도하여 합의를 도출했으니, 그 결실이 바로 통군부(統軍府)였다. 이후 8월 30일 전만한족통일회(全滿韓族統一會)가 결성되고, 이 무렵 통군부는 통의부(統義府)로 확대 개편되었다. 여기에서 통군부 교육부장이던 김동삼이 통의부 총장을 맡게 되었다. 청산리 대첩 이후에 경신참변과 자유시 참변을 거친 뒤, 만주지역 군사세력을 통합하려던 그의 노력이 진척을 보였고, 그 선두에 김동삼이 있던 사실을 말해준다.

  • 질문1 서간도에서 한족회, 서로 군정서, 신흥 무관 학교가 정비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 질문2 김동삼이 참모장을 맡아 활동했던 독립군 조직은 무엇인가요?
  • 질문3 삼광학교 교장으로 활약했던 김동삼의 동생 김동만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된 것은 언제인가요?
  • 질문4 천전리 마을 사람들은 무슨 이유로 서간도에서 북만주로 이주하게 되었나요?

읽기자료 5

1921년 이후로 여러 차례 준비되던 국민대표회의가 1923년 1월부터 5월 사이에 상하이에서 열렸다. 국내와 국외지역 전체에서 지역대표와 단체대표 400명 정도가 상하이에 집결했고, 그 가운데 의결권을 가진 대표가 130명을 넘을 만큼 규모가 컸다. 1921년 이후 침체 현상을 보이던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임시정부 쇄신 방안을 찾던 이 회의에 김동삼은 서로군정서와 남만주 대표로서 참석하였다. 나아가 그 의장에 선출되었다. 김동삼이 의장에 선출되었다는 사실은 독립운동계에서 갖는 그의 위상을 확인시켜 주고도 남는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는 개조파와 창조파로 나뉘어 대립하던 도중인 5월 15일 만주에서 대표를 소환함에 따라 의장을 맡던 김동삼도 만주로 가야 했다.

만주로 돌아온 1923년 가을, 그에게 주어진 일은 만주지역 독립운동계를 통합하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북경군사통일회의나 국민대표회의가 뚜렷한 결실을 이루지 못하자, 이상룡과 양기탁(梁起鐸)이 다시 군사력 통합을 추진하고 있었다. 상하이에서 돌아온 김동삼은 이들의 역할을 인수하여 1924년 7월 10일과 10월 18일에 10개 단체 대표를 모아 전만통일회의주비회(全滿統一會議籌備會)를 열었다. 거기에서 김동삼은 의장에 선임되어, 동년 11월 24일 정의부(正義府)를 탄생시키는 데 주역을 맡았다. 참의부·신민부와 함께 만주지역 3대 조직의 하나가 된 정의부를 산출한 것이고, 유하현 삼원보에 본부를 두었다. 그리하여 1925년에는 만주지역 한인사회는 민정과 군정기능을 갖춘 3부가 정립하고, 독립군 양성과 무장력 향상, 투쟁 강도 강화 등을 도모해 나갔다. 김동삼은 정의부에서 중앙행정위원 겸 외무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안동에서 함께 망명해 온 이상룡이 1926년에 임시정부 국무령에 선임되었다. 이상룡은 국무령에 취임하자마자 김동삼을 국무위원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김동삼은 이상룡의 권유를 듣지 않고 만주에 남았다.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해야 했고, 그 터전을 버려두고 상하이로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27년 이후 김동삼은 국내외에 걸쳐 전개된 유일당운동(唯一黨運動)에 힘을 기울였다. 이것은 독립군 단체 위에 하나의 지도 정당을 만들자는 것이고, 정부를 정당중심으로 운영하자는 것이기도 했다. 그럴 경우 이념상 분화된 좌우세력을 통합하는 운동이란 의미를 가졌다. 1926년 10월에 안창호와 원세훈이 베이징에서 대독립당촉성회를 조직한 뒤에 상하이와 난징, 그리고 광저우로 확산되어 갔고, 국내에서는 신간회가 조직되는 분위기에서 만주지역도 유일당운동이 진행되었다. 그 동안 끊임없이 독립운동계의 통합과 통일을 추진하던 김동삼이 이에 앞장 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김동삼이 1927년 4월 1일 정의부 간부 30여 명과 함께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하여 농민들의 상호 부조 속에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굳게 만드는 등 농민조합운동의 단서를 열었던 것도 그러한 차원에서 펼쳐진 것이다. 이어서 4월 15일 길림 남쪽 영길현(永吉縣) 신안둔(新安屯)에서 유일당촉성회의가 열리자, 김동삼은 정의부 중앙위원 자격으로 여기에 참석하였다.

이어서 김동삼은 1928년 5월 정의부를 대표하여 삼부 통합회의를 개최하였다. 하지만 분열된 독립운동 세력의 대통합을 모색했으나 실패하였다. 조직 결성 방법을 둘러싸고 이견이 표출되자, 그는 새로운 통합방법을 찾아 나섰다. 그는 1928년 7월 삼부 통일 회의가 결렬되기 바로 앞서 일단 정의부를 이탈하였다. 그리고 그를 비롯한 이탈 세력을 규합하여 혁신 의회를 조직하고 의장이 되었다. 1929년 좌우 합작을 도모하기 위해 민족유일당 재만 책진회가 조직되었고, 김동삼은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어 민족 유일당 결성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1929년 4월 같은 지역에 국민부(國民府)가 출범됨으로써 민족 유일당 계획은 무산되고, 1929년 5월 민족 유일당 재만 책진회도 해체되었다. 이어서 1930년 7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조직되자 김동삼은 고문을 맡았다. 이러한 복잡한 흐름에서 김동삼을 주목해 보면, 통합운동의 핵심에 그가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질문1 1923년 개최되었던 국민대표회의의 의장을 맡았던 인물은 누구인가요?
  • 질문2 1926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선임된 이상룡이 김동삼을 국무위원으로 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김동삼이 상하이로 이동하지 않고 만주에 남아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요?
  • 질문3 김동삼이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한 내용을 설명해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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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은 1922년 12월 29일 김동삼이 쓴 편지이다. 편지는 당시 만주·연해주의 독립군의 활동과 변동 상황을 적고 있다. 이 편지에서는 김하석(金河錫)·김하주(金河珠)가 흑해 회의에서 협의한 대로 8인을 보충하여 남북의 선정위원을 파견한다는 사실, 러시아에 있는 옥파가 온다고 한 통신이 도착한 사실, 김규식(金奎植) 일파 8인이 남(南)으로 옮겼다는 사실, 백제백추(白齊白秋)가 영안(寧安)에서 머물렀다는 사실, 최근 이영식(李榮植)·김원희(金原熙)·조희성(趙熙星) 등은 남(南)으로 옮겼다는 사실, 상하이 형편은 전과 같고 상하이 제군들이 올 것이라는 사실 등을 상세히 적어 소식을 전하고 있으나, 수신인은 밝혀져 있지 않다.

  • 질문1 김동삼이 만주·연해주의 독립군의 활동과 변동 상황을 파악하려는 주요 목적을 추정하여 말해봅시다.

시각자료 2

김동삼의 가족 사진이다. 김동삼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당시 그의 가족은 하얼빈에 거주하여, 거리도 멀고 여비도 없어 면회를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진을 찍어 편지에 동봉하여 김동삼에게 보냈다. 사진에는 그의 부인과 큰아들과 둘째아들 내외 및 딸, 손자 손녀 등 10명이 있다

  • 질문1 면회를 가지 못하고 사진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가족의 심경을 이야기해봅시다.
  • 질문2 가족의 사진을 받아 보는 날 김동삼이 가졌던 느낌을 일기 형식으로 적어봅시다.

시각자료 3

다음은 김동삼이 마지막 남긴 말을 새긴 어록비이다.

  • 질문1 김동삼이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우라고 했던 이유를 구체적으로 써봅시다.
  • 질문2 국가는 개인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야기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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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을 조사하고, 각 단체들의 활동 내용을 모둠별로 정리해서 발표하여봅시다.

모둠활동 2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이 통합되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연설문을 모둠별로 작성하여 발표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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