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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항 방어벙커(부항지서에서 적을 막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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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김천에서 구성면, 지례면을 지나 전북 무주 방향(또는 전북 무주군 설천면에서 나제통문을 지나 김천 방향)으로 가다 보면 김천시 부항면 사등리에서 부항면보건지소가 눈에 들어온다. 보건지소 뒤쪽 위에 부항파출소(부항지서)가 있으며, 부항파출소 옆에 다소 이상한 콘크리트 건물이 높게 세워져 있다. 부항지서 망루(望樓: 적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하여 위에는 벽을 설치하지 않으면서 높은 장소에 세우거나 높게 세운 건물)라는 것인데, 이 망루는 6·25 전쟁이 일어나자 북한군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부항면 주민과 경찰이 힘을 합쳐 세운 방어용 벙커(Bunker: 방어하기 위하여 굳고 아주 단단하게 쌓은 건물)이다.

망루가 있는 이곳에서는 1951년 10월경 부황지역 주민과 경찰이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 산하 빨치산과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 하며, 이외에도 6·25 전쟁 기간 잦은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이곳 부항지역은 경상도로 이어지는 김천과 전라도로 이어지는 무주의 중간지점으로 대전과 논산, 전주, 구미, 대구와도 그리 멀지 않아 교통이나 군사 면에서 중요한 곳이었다. 또한, 주변에 가깝게는 민주지산과 황악산이 있고, 멀게는 덕유산과 가야산이 있어 빨치산들이 활동하기 좋은 곳이었다.

따라서 부항지서에서는 6·25 전쟁 동안 크고 작은 전투가 많이 벌어졌다. 이때 적의 움직임을 살피며 적을 공격하거나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 벙커가 안성맞춤이었다. 이에 망루를 세웠으며, 또 사방으로 2.5m가량의 외벽을 이중으로 쌓아 그 위에 나무를 얹고 흙을 덮은 후 다시 잔디로 덧씌워 방어시설로 사용하였다. 망루는 지서 건물과 지하로 연결하였는데, 따라서 이곳에서 밖을 살피기 쉬웠으나 밖에서 이곳으로 침입하기는 어려웠다. 부항지서는 이런 시설과 함께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이나 의용대대(義勇隊員) 등을 비롯한 민간인들의 협조도 적극적이어서 적의 침입을 기꺼이 막아낼 수 있었다.

이처럼 방어벙커는 6·25 전쟁 당시 벌어진 전투에서 큰 역할을 하였음에도 부항파출소 옆 그 자리에 그냥 방치되어 있었다. 2008년 10월 1일 문화재청으로부터 ‘김천 부항지서 망루’라는 이름으로 등록문화재 제405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이 벙커에는 ‘등록문화재 제405호 김천 부황지서 망루 /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이라고 새긴 철판이 벙커 외벽에 붙어있으며, 그 앞에 세워진 작은 안내판에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김천 부항지서(釜項支署) 망루(望樓)

이 시설물은 한국전쟁 직후 주민들이 콘크리트로 건축한 화기진지(火器陣地) 용도의 자주적 방어시설로, 주민들이 경찰을 지원하여 북한군 게릴라들의 침투를 막는 데 크게 기여한 곳이다. 콘크리트 4면체형으로 높이는 7m이며 4면에 근대적인 사격용 총안 시설을 2개씩 설치해 놓았다. 지붕과 내부에 망루 위로 접근할 수 있도록 설치한 사다리 시설 등은 소실되었지만 망루에서 부항파출소로 통하는 지하통로 입구는 그대로 잘 남아 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상북도 김천군 부항면 사등리 684 부항지서
현재 상태 복원 / 현재 부항지서 망루 지하통로와 주변의 복원공사가 마무리되었다. 다만, 망루 지붕 등 일부는 복원하지 않았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대규모 침략에 밀리어 계속 후퇴만 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 낙동강 방어선을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방어선으로 삼아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한편, 유엔군과 장비를 보충하고 싸울 인원을 추가로 모집하는 등 전력을 회복해 나가면서 반격할 준비하였다. 그런 가운데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펼쳤다.

유엔군사령부가 인천상륙작전을 편친 목적은 북한군의 허리를 끊어 아래와 위 양쪽에서 공격하여 적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유엔군사령부의 상륙작전계획과 맞추어 미 제8군사령부가 반격작전계획을 세워 유엔군사령부의 승인을 받은 시기는 9월 6일이었다. 당시 북한군은 낙동강을 건너고자 대대적인 총공격(9월 공세)을 하였는데, 미 제8군은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힘을 쏟으면서도 도 반격작전을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추진해나갔다.

반격작전의 구체적인 계획은 인천상륙작전 하루 뒤인 9월 16일에 현재의 방어선에서 공격을 시작하여 대구-대전-수원을 잇는 선을 양옆에서 공격하면서 북한군을 쳐부수는 동시에 인천으로 상륙한 미 제10군단과 재빠르게 연결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미 제8군은 서부 및 서남부지역에서 미 제1군단 소속 4개 사단이, 동부지역에서는 한국군 2개 군단이 일제히 반격을 시작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대구-대전-수원을 잇는 중앙지역은 미 제1기병사단이 맡도록 하였는데, 이는 미 제1기병사단이 미 제10군단과 연결하는데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고, 경부국도의 도로 사정이 괜찮은 편이어서 움직임과 화력이 좋은 전차·장갑차·자주포 등으로 이루어진 기계화부대가 움직이기 좋고, 지원 등이 쉬웠기 때문이다.

낙동강 방어선에서의 반격작전은 계획대로 1950년 9월 16일에 시작되었다. 반격작전의 중앙지역을 담당한 미 제1기병사단이 맨 앞에서 북한군 방어선 뚫기 시작하였으며, 중부지역에서는 국군 제6사단이 신령(영천시 신령면)에서, 제8사단이 영천에서, 동부지역에서는 국군 수도사단이 안강(경주시 안강읍) 남쪽에서, 제3사단이 포항 남쪽에서 각각 반격작전을 펼쳤다.

유엔사령부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게 되면 북한군이 금방 무너지게 될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의 저항이 생각보다 강해 작전 초기에는 적을 물리치기가 쉽지 않았으며, 오히려 곳곳에서 적의 공격을 받아 아군(我軍: 우리 편의 군대)이 적들에 갇히기도 하였다. 하지만 국군과 유엔군의 계속된 반격에 북한군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그들의 저항은 급격히 떨어졌으며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9월 16일부터 2주간 벌어진 반격작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하나씩 빼앗긴 도시들을 되찾아나가 1950년 9월에는 경상도의 대부분 지역을 되찾았다.

북한군 전선사령관과 참모들은 김천에서 철의 삼각지대(Iron Triangle: 강원 철원과 김화, 그리고 현재 북한 지역인 평강을 연결하는 삼각형의 지대)로 도망가듯이 후퇴하였다. 또한, 그들의 제1군단사령부는 충남 조치원에서 해체되었고, 제2군단사령부는 김화(강원도 철원군)로 급하게 철수하였다. 그 과정에서 북으로 넘어가지 못한 북한군이나 패잔병들은 지리산과 태백산 등으로 숨어들어 게릴라(유격대)로 활동하거나 조선 인민 유격대(빨치산)와 함께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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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부항 방어벙커는 보통 부항지서 망루라고 부르는 건물로, 이 건물은 6·25 전쟁이 일어나자 북한군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부항면 주민과 경찰이 힘을 합쳐 세운 방어용 벙커(Bunker: 방어하기 위하여 굳고 아주 단단하게 쌓은 건물)이다.

크기가 높이 7m, 밑부분 너비 3.7m, 윗부분 너비 3.1m로, 밑에 돌로 쌓고 다시 그 위에 콘크리트로 건설한 사각형으로 만들어진 부항지서 벙커는 6·25 전쟁 때 세워진 망루로는 유일하게 4각형으로 축조된 콘크리트 건축물이라고 한다. 이 벙커는 지서 건물과 15m 정도 떨어져 지하통로(교통호, 지하동굴)로 연결되었는데, 지하동굴은 노인과 여자, 아이들이 피신하는 곳으로도 사용되었다. 이 벙커가 처음 만들어질 때는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비롯하여 양철로 덮은 지붕과 종, 사이렌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돌과 콘크리트 구조물만 남아 있다. 또한, 총알 자국과 포탄흔적이 생생히 남아 있다.

당시 부항지서는 망루와 함께 외벽으로 쌓은 참호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외벽은 동서남북 사방에 이중으로 2.5m가량 쌓아올린 뒤 그 위에 나무를 얹고 흙을 덮은 후 다시 띠(잔디) 등을 덧씌워 세웠다. 이런 시설을 파고라(Pergola, 퍼걸러: 그늘막, 볕 가리개)라고 하는데, 파고라는 마당이나 평평한 지붕 위에 나무를 가로와 세로로 얽어 세워서 등나무, 포도나무 같은 덩굴성 식물을 올리게 한 시설을 가리킨다. 높은 망루와 외벽이 설치된 부항지서는 망루가 지하로 연결되어 있고 또 바리케이드(Barricade)도 쳐놓아 이곳에서 밖의 움직임을 살피며 공격하기 쉬웠으나 밖에서 이곳으로 침입하기에는 어려운 구조를 갖춘 곳이었다. 그래서 유리한 입장에서 적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여기에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이나 의용대대(義勇隊員) 등을 비롯한 민간인들의 협조도 적극적이어서 경찰과 주민 합동으로 적의 침입을 거뜬히 막아낼 수 있었다.

부항 방어벙커는 6·25 전쟁 당시 벌어진 전투에서 큰 역할을 하였음에도 부항파출소 옆에 방치되어 있다가 2008년 10월 1일 문화재청으로부터 ‘김천 부항지서 망루(金泉 釜項支署 望樓)’라는 이름으로 등록문화재 제405호로 지정되었다. 이때 경북 칠곡 왜관철교(등록문화재 제406호), 파주 영국군 설마리전투비(등록문화재 제407호), 연천 유엔군 화장장시설(등록문화재 제408호), 제주 구 육군제1훈련소 지휘소(등록문화재 제409호), 제주 구 해병훈련시설(등록문화재 제410호), 국산 1호 항공기 ‘부활’(등록문화재 제411호)도 함께 지정되었다. 일부에서는 6·25 전쟁 관련 유적지가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이들 문화재가 처음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태백경찰서 망루는 2005년 4월 15일 등록문화재 제167호로 지정되었으며, 그 이전에 지정된 것들도 있다.

등록문화재 지정에 이어 60년이 지나도록 방치돼 있던 부항 방어벙커는 2009년부터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김천시는 역사적 보존가치가 높은 부항 망루를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방어벙커를 복원하고 주변 정비 사업을 추진하여 2009년 6월 25일 공사를 시작하였다. 망루 주변을 자연석으로 쌓고, 파출소 담장을 철거하였으며, 망루로 들어가는 지하통로를 만들고, 지하통로 입구에 팔각정자를 세우는 등 공사 시작 3년 만인 2012년 망루 복원 및 주변 정비 사업을 마무리하였다. 다만, 망루 지붕 등은 복원하지 않았다.

  • 질문1 부항 방어벙커는 15m 정도 떨어진 지서(파출소)와 어떻게 연결하여 사용하였는지 써봅시다.
  • 질문2 부항지서는 방어벙커 외에 다른 어떤 방어시설을 설치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는지 써봅시다.
  • 질문3 부항 방어벙커는 2008년 10월 1일 문화재청으로부터 어떤 이름으로 등록문화재 제 몇 호로 지정되었는지 써봅시다.

읽기자료 2

김천시는 대전-영동-김천-구미-대구로 이어지는 경부선에 있어 6·25 전쟁 당시 교통으로 보나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또 김천시 부항면 지역은 경상도로 이어지는 김천과 전라도로 이어지는 무주의 중간지점으로 대전과 논산, 전주, 구미, 대구와도 그리 멀지 않아 교통이나 군사 면에서 중요한 곳이었다. 더구나 주변에 가깝게는 민주지산과 황악산이 있고, 멀게는 덕유산과 가야산이 있어 빨치산들이 활동하기 좋은 곳이었다.

이런 까닭에 6·25 전쟁 동안 김천과 부항지역에서는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적잖게 벌어졌으며, 부항지서에서도 크고 작은 전투가 적잖게 벌어졌다. 이에 부항지서에서는 망루와 외벽으로 둘러싼 방어시설을 갖추고 경찰과 주민 합동으로 적의 공격에 맞서 싸웠다.

1950년 7월 북한군의 침략에 밀려 남쪽으로 철수하던 각 도의 경찰부대 가운데 경기도 가평경찰부대가 경북 금릉군(현재 김천시) 부항면 월곡리에 있는 부항초등학교에 머무르면서 북한군의 공격을 대비하다가 철수하였다.

1950년 8월 초에는 북괴군이 경북 금릉군 지례면에 머물면서 틈나는 대로 부항면에 드나들며 지방의 좌익분자(左翼分子: 공산당에 속한 사람)들을 앞세워 마을 주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아 일을 시키며 사회주의 교육을 하였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과 함께 9월 16일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낙동강 전선에서 후퇴하던 북한군은 1950년 9월 25일 무주, 영동, 상촌(영동군 상촌면) 등으로 후퇴하고 나머지는 삼도봉(금릉군 부항면 두산리)에 숨어있으면서 틈나는 대로 부항지서를 공격하였다.

1950년 10월에는 지서가 있는 유촌리(금릉군 부항면)를 공비(共匪: 공산당 유격대, 게릴라, 빨치산)들이 여러 차례 공격하여 가축·식량·의류 등을 빼앗아 가고 사람이 사는 집 등에 불을 지르고 갔다. 같은 때 북괴군 1개 중대가 아군의 옷으로 갈아입고 해인3리(금릉군 부항면)에 침입하여 마을 사람에게 소를 요구하였다. 이를 거절하자 4일 후 다시 찾아와 마을 사람 두 명을 방안에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채 불을 질러 죽게 한 다음 마을의 가축과 식량을 빼앗아 갔다.

1951년 10월경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 빨치산 ‘불꽃사단’ 수백 명이 부항지서를 쳐들어왔다. 당시 부항지서에는 스스로 의용경찰로 나선 20여 명과 한청(韓靑: 대한 청년단) 소속 청년 30여 명, 기타 방위군 포함 70여 명이 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M1소총과 북한 인민군으로부터 빼앗은 소련제 AK소총 몇 자루뿐이었다. 유리한 것은 망루와 외벽뿐이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결과 경찰과 주민 5명(경찰관 1명과 청년단원 4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주민과 경찰이 힘을 합쳐 지리산과 삼도봉을 무대로 활동하던 빨치산 부대를 물리치고 지서를 끝까지 지켜내었다.

  • 질문1 부항지서에 북한군이나 빨치산들이 자주 침입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지 지리적인 면을 중심으로 써봅시다.
  • 질문2 남부군 빨치산 불꽃사단을 이끌고 부항지서를 습격한 빨치산 대장은 누구인지 그 이름을 써봅시다.
  • 질문3 빨치산 불꽃사단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큰 역할을 한 부항지서의 시설로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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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위·아래 두 개의 사진은 부항 방어벙커 내부 모습으로, 바닥 모습과 바닥에서 위쪽을 바라본 모습이다.

  • 질문1 벙커 바닥은 어떤 재료들이 사용되었는지 써봅시다.
  • 질문2 벙커는 둥근 형태가 많은데, 이곳은 어떤 형태인지 써봅시다.
  • 질문3 벙커의 윗부분 중간 곳곳에 네모난 작은 구멍들이 있는데, 어떤 용도로 만든 것인지 벙커 사용 방법과 관련지어 대답해 봅시다.

시각자료 2

김천시(옛 금릉군) 부항지서를 지키던 의용대원들의 모습이다.

 

사진출처 : 디지털김천문화대전(http://gimcheon.grandculture.net)

  • 질문1 사진 위쪽 중앙에 “기리빛나라大韓靑年団 / 金陵郡釜項面団部戰鬪決死隊 / 4284.11.15.!”라는 글이 쓰여 있다. 이것을 한글로 써봅시다.
  • 질문2 4284는 단기(檀紀: 단군기원) 4284년 가리킨다. 서기(西紀: 서력기원) 2013년은 단기 4346년에 해당하는데, 그러면 이 사진을 찍은 때는 서기로 몇 년인지 계산해 봅시다.
  • 질문3 건물 위쪽 가운데쯤 밖으로 난 작은 문이 있다. 어떤 용도로 그리 만든 것인지 생각하여 대답해 봅시다.
  • 질문4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건물 맨 위쪽에도 사람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건물이 일반적인 망루라면 이처럼 올라가 사진 찍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건물은 어떤 용도였는지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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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김천 부항지서 망루(경상북도 등록문화재 제405호) 이외에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보령경찰서 망루(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72호). 태백경찰서 망루(강원도 등록문화재 제188호) 등이 있다. 이들을 포함하여 6·25 전쟁과 관련된 망루들을 조사·정리하여 보고서로 제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등록문화재는 무엇인지, 6·25 전쟁 관련 등록문화재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또 근대문화유산이란 것은 무엇인지 등을 조사·정리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6·25 전쟁에서 군인은 물론 경찰관도 큰 공을 세웠다. 자신이 사는 주변에 6·25 전쟁에 참전한 경찰관을 찾아 그들의 경험담을 듣고 그 내용을 녹음하여 주변 친구들과 공유해 봅시다.
모둠활동 4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문화유산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들 문화유산을 잘 보존하여 후세에 물려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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