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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유치지구 빨치산 토벌지(장흥 보림사 지역에서 빨치산을 쳐 없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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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난 이후 밀고 내려온 북한군에 의해 7월 말에는 전라도 전체가 그들의 손에 넘어갔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을 해나가면서 1950년 10월에는 전라도 도시 대부분을 되찾았다. 그러나 남한지역에 남은 공비(共匪: 공산당 유격대, 게릴라, 빨치산)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북한군이 점령하였던 장흥지역은 10월 초 되찾았으나 이 지역에서도 남아있는 빨치산들이 활동이 계속되었다. 이에 장흥지역에는 빨치산과 치른 전투와 관련된 기념비나 기념탑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1964년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남동리에 세워진 충혼탑(忠魂塔), 1986년 장흥군 유치면 송정리에 세워진 위령비(慰靈碑) 등이 있다. 송정리 위령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지금 여기 모신 깨끗하고 거룩한 영혼들은 6·25 당시 잔인무도한 공산게릴라들에 의해 근면하고 정직한 양민들의 학살되고 조국의 운명마저 헤아릴 수 없는 일대 위기에 처하여 조국과 정의를 지키려는 불타오르는 소명감에서 적수공원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용전분투하다 산화한 광주사범학교 2학년생 문영만 군, 장흥 관산중학교 3학년생 오연차 군, 광주 숭일중학교 3학년생 김원주 군 등의 피다 못한 꽃봉오리들의 애절하고 원통한 그것들이다. 조국과 겨레와 이웃을 사랑하고 아끼고 돌보는 이 없이 산기슭 잡초 속에 묻혀 있기를 설흔 다섯 해 위기와 난국을 거듭해 온 조국의 현실에 새삼 비분과 감루를 금할 길이 없어 뒤늦게나마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이 자리에 그대들의 빛난 영혼들을 모심으로써 애국충혼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빨치산을 몰아내는 데는 군경과 민간인이 따로 없었다. 학생들도 참여하여 빨치산을 몰아내는 데 앞장서기도 하였다. 그만큼 빨치산의 활동이 활발하였다고 할 수 있다.

빨치산과의 전투는 물론 6·25 전쟁 기간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이 불타거나 파괴되는 일도 적지 않았는데,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가지산(迦智山)에 있는 보림사(寶林寺)가 그랬다.

보림사는 통일신라 헌강왕 때 보조국사가 창건한 이래, 그동안 여러 차례 맞은 전쟁으로 불에 타 다시 세워지기도 하면서 오랜 전통을 지켜온 사찰이자 꽤 알려진 사찰이다. 특히 보림사는 통일신라시대 5교9산의 9산 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중심 사찰로, 현재 이곳에는 국보 2개(남·북 3층 석탑과 석등,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와 보물 5개(동 승탑, 서 승탑, 보조선사탑, 보조선사탑비, 목조 사천왕상)의 문화재를 비롯하여 많은 전라남도유형문화재 등이 전해지고 있다.

현재 이렇게 소중한 많은 문화재가 전해지고 있지만, 6·25 전쟁 당시 국보 제204호였던 대웅전 등 20여 동의 대다수 건물이 불타버리고, 천왕문과 사천왕문, 외호문(外護門: 일주문)만 남은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사찰 전체가 거의 불타버린 것은 보림사 골짜기를 비롯한 가지산 지역에서 활동하던 유치지구 빨치산(유격대, 게릴라)을 토벌(討伐: 무력으로 쳐 없앰)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빨치산 토벌은 보림사 골짜기 외에 장흥군 유치면 운월리, 우치리, 국사봉 등 여러 지역에서 토벌작전이 전개되었으나, 현재 그들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보림사 입구에 이 일대 빨치산 토벌 과정을 정리한 내용의 안내판을 설치하여 그때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나라 사랑에 대한 자세는 물론 문화재 보존에 대한 의미를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45 보림사 일대
현재 상태 변형 / 토벌지구는 보림사 인근 지역의 골짜기로 전투 당시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고, 인근 공수평 마을 일대는 탐진강댐의 건설로 물에 잠겼다.

북한군의 침략에 국군과 유엔군의 한강 방어선과 금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1950년 7월 20일 대전 방어선마저 무너지기 전인 7월 11일 이미 북한군 최고사령부는 북한군 제6사단에 특수임무를 주어 서해안을 따라 은밀히 전진하면서 무방비상태에 있는 호남지역을 빠른 속도로 휩쓸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북한군 제6사단은 그 공격 방향을 군산, 익산, 전주로 돌렸으며, 7월 13일 일부 병력으로 공주를 침범하였다. 7월 14일에는 북한군 제4사단이 107전차연대와 함께 공주를 공격하면서 금강을 건넜으며, 일부는 7월 15일 논산을 점령하고 전주로 향하였다.

전라도는 대부분이 평야이기 때문에 북한군이 공격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으며, 열악한 장비와 병력으로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막강한 화력을 막아내던 아군(我軍: 우리 편의 군대)은 끝내 전주, 임실, 남원 등을 적의 손에 빼앗기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정읍, 장성, 광주 등이 계속 북한군에 점령되면서 7월 말에는 전라도 전체가 북한군의 손에 넘어갔다. 전라도 지역을 점령한 북한군은 부산을 목표로 하여 마산·부산 방면으로 계속 공격해 나갔으며, 전라도를 전쟁에 필요한 물건을 모아두는 창고와 식량을 공급하는 기지로 사용하였다.

한편 7월 말 낙동강지역에 도달한 북한군은 국군과 유엔군에 대한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8월 4일경에는 낙동강 방어선이 성립되어 국군과 유엔군은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데 온 힘을 쏟았다. 8월 한 달 동안 계속된 치열한 전투에서 북한군은 엄청난 병력과 많은 장비를 잃게 되어 더는 공격을 계속하기 어려운 처지가 되었으며, 반면 국군은 유엔군의 증원과 함께 추가로 군인을 모집하면서 예전의 전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1950년 9월 15일 이루어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북한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그동안 적을 막아내는 데 급급했던 국군과 유엔군에게 공격하는 자세로 돌아서게 하였다. 이에 빼앗긴 도시들을 되찾아나갔다.

1950년 9월, 경상도 대부분을 되찾은 국군과 유엔군은 전라도로 나아갔으며, 광주와 목포, 전주 등을 되찾았다. 이미 국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군산, 익산 등 주요 항구를 공격하기도 하였는데, 9월 30일 군산을 되찾았으며, 무주, 진안 등으로 진격해 나갔다. 1950년 10월에는 전라도 도시 대부분을 되찾고, 금강까지 차지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을 남한지역 대부분을 되찾았음에도, 남한지역에는 미처 후퇴하지 못한 북한 인민군은 물론 이전부터 사회주의를 지지하거나 북한을 따르는 세력들이 남아 있었다. 이들은 보통 산속으로 들어가 숨어있으면서 유격전[遊擊戰: 적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서 정규군이 아닌 이들이 열세한 장비를 가지고 무장하여 기습·습격 등을 감행하는 전투 형태. 게릴라전(Guerrilla Warfare)이라고도 한다]을 펼치면서 국군이나 경찰을 공격하였다. 또한, 일반인들을 부추겨 사회주의를 지지하거나 북한을 따르도록 꾀하였다. 이들을 공비(共匪) 또는 빨치산(Partisan: 비정규군. 유격대, 게릴라)이라고 부르곤 하는데, 빨치산은 러시아어 ‘파르티잔’을 우리말로 발음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인민 유격대’를 빨치산으로 부르고 있다. 이들 빨치산은 6·25 전쟁 때 조직되어 활동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6·25 전쟁 이전부터 활동하였으며, 전쟁 기간 활발히 활동하다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맺어진 이후에도 활동을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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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읽기자료 1

조선인민유격대(朝鮮人民遊擊隊)는 6·25 전쟁을 전후하여 주로 남한지역에서 유격전을 펼친 사회주의 세력의 부대를 말한다. 흔히 빨치산이라고 부르며, 공비(共匪) 또는 공산 게릴라, 남부군(南部軍) 등으로 부르곤 한다.

조선인민유격대는 해방 후 미군정 시기인 1946년 대구에서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퍼진 사건으로, 사회주의 세력(남조선 노동당)이 시민과 함께 미군정의 식량정책을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하며 시위를 일으킨 사건인 대구 10·1사건(대구 10월사건, 대구 폭동)이 진압되면서 여기에 참여했던 사회주의 세력들이 산으로 들어가 활동한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 1948년 제주 4·3사건과 여수·순천 10·19사건 이후 사회주의 성향의 군인들이 유격대에 가담하면서 본격적인 무장유격대로서의 모습을 갖춰나갔다.

이런 가운데 1949년 6월 30일 남조선 노동당과 북조선 노동당이 당을 합해 조선노동당(朝鮮勞動黨)이 되었는데, 조선노동당은 1949년 7월 ‘조선인민유격대’를 창설하여 남쪽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격대를 하나의 조직으로 만들어 이를 지휘하고 지원하였다. 그러나 1949년 말부터 1950년 초까지 군경 합동으로 전개된 빨치산 섬멸작전(동계대토벌)으로 남로당과 조선인민유격대는 큰 타격을 입어 그 조직이 거의 파괴되었다.

세력이 크게 약해진 조선인민유격대는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활동에 나서 북한군이 남한지역을 쉽게 점령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북한군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그들을 함께 조선노동당과 인민위원회 조직을 다시 세우는 일에 앞장서고, 지역 주민을 사회주의 사상으로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에서부터 시작된 반격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후퇴할 길이 막힌 북한 인민군 패잔병과 지역 사회주의 세력들이 산속으로 들어가 자연스럽게 유격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점령지역에서 활동하던 노동당은 비합법 조직인 지하당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는데, 북한으로부터 지하당을 중심으로 유격대 활동을 펼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전라남‧북도과 경상남‧북도의 남부 4개 도당은 유격대를 편성하였는데, 전남도당은 백야산에서, 전북도당은 회문산에서, 경남도당은 지리산 인근 함양군에서, 경북도당은 박종근과 남도부가 각각 경북 산악 지역과 동해안 지역에서 유격대를 편성하였다.

전라남도지역에서는 1950년 10월 5일 조선인민유격대 전남총사령부가 만들어지고, 여기에서 전남지역 유격대를 모두 지휘하게 되었는데, 전남총사령부(백야산)는 전라남도 지역을 광주지구(무등산), 노령지구, 유치지구(화학산), 불갑산지구, 모후산지구, 백운산지구에 각각 본부를 두는 6개 지구로 나누었다. 이들 유격대는 군경의 보급로를 차단하거나 경찰서와 지서를 습격하고, 남한에 협조하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마을에 불을 지르는 등 후방을 어지럽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현상(李鉉相, 1905~1953)이 이끌던 부대는 북쪽으로 후퇴하다가 1950년 11월에 강원도 북부지역에 도달할 무렵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뒤바뀌자 ‘조선인민유격대 독립4지대’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개편되어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게 된다. 내려오는 과정에 청주를 공격하는 등 9개월 정도 걸려 지리산에 도착한 독립4지대는 남조선 인민유격대 또는 ‘남부군(南部軍)’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이에 남부군은 빨치산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1951년 이후 조선인민유격대는 몇 차례 조직 개편을 통해 활동을 전개하지만, 전쟁이 38도선을 중심으로 오고가며 큰 변화가 없는 가운데 그 세력이 점차 약해졌다. 비록 그들의 공격은 멈추지 않아 큰 피해를 주기도 하였지만, 남한에서 고립된 채 활동하다 보니 그들의 활동에는 한계가 있었다. 더욱이 1951년 12월 1일 부산·대구를 제외한 남한 전 지역에 계엄령 선포와 함께 공비토벌작전이 전개되어 서서히 무너져갔다.

이런 상황에 조선인민유격대 최후의 지도부가 1952년 5월 지리산에서 제5지구당이 결성(위원장 이현상, 부위원장 박영발)되기도 하였지만, 1953년 1월 박영발 사살되고, 정정협정 이후인 1953년 9월 남조선 노동당을 이끌던 박헌형이 간첩으로 몰리는 사건으로 제5지구당 체제가 해체되고, 이현상마저 사살(지리산 빗점골에서 사살된 시체로 발견)되면서 조선인민유격대는 거의 무너졌다. 이어 1954년 1월 전북도당을 이끌던 방준표가 자살하고, 1954년 4월 전남도당을 이끌던 김선우마저 백운산에서 사살됨으로써 지도부 대부분이 사라진 조선인민유격대는 사실상 해체 상태가 되었다.

  • 질문1 조선인민유격대는 6·25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쯤 창설되었다. 몇 년에 세워졌는지 써봅시다.
  • 질문2 전남지역 유격대는 전남총사령부 지휘 아래 6개 지구로 나뉘었는데, 이들 6개 지구의 이름을 써봅시다.
  • 질문3 이현상이 이끌었던 부대의 이름은 무엇인지 써봅시다.

읽기자료 2

전남 장흥지역은 1950년 10월 초 되찾았으나 조선인민유격대들이 유치지구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여 군인과 경찰이 중심이 되어 이들을 토벌하는 작전이 여러 차례 이루어졌다.

당시 전라남도지역에서는 1950년 10월 5일 조선인민유격대 전남총사령부(백야산) 아래 광주지구(무등산), 노령지구, 유치지구(화학산), 불갑산지구, 모후산지구, 백운산지구에 각각 본부를 두는 6개 지구로 나눠 활동하였다. 이들 유격대는 군경의 보급로를 차단하거나 경찰서와 지서를 습격하고, 남한에 협조하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마을에 불을 지르는 등 후방을 어지럽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장흥에서도 민청연대 제17연대와 각 군당 소속 빨치산 약 500명은 용문리와 보림사 골짜기 마을을 근거지로 관공서를 습격하고 이곳 주민을 죽이거나 옷과 식량 등을 빼앗곤 하였다. 이에 1951년 4월 20일 장흥경찰서에서는 민청연대를 공격하여 100여 명을 사살하였다.

그럼에도 빨치산의 활동은 여전하였다. 하여 1951년 7월 29일 전남경찰국 기동대를 비롯하여 광주·나주·화순·보성·영암·장흥·해남 등 경찰서 연합부대 1,500여 명은 보림사가 있는 가지산 일대에서 활동하던 빨치산을 포위하여 그들을 토벌해 나갔다. 보림사 골짜기를 비롯하여 유치면 일대 운월리, 우치리, 국사봉 등 여러 지역에서 토벌작전이 전개되었다.

특히 보림사 골짜기는 유치지구 빨치산들이 자주 활동하던 곳이었으며, 당시 경찰과 빨치산의 전투가 벌어졌던 장흥군 유치면 공수평 마을, 용문리, 운월리, 조양리, 화순군 도암면 우치리, 우산리 지역 등의 중간지점이기도 하였다.

경찰부대는 적들이 후퇴할 길을 미리 막으면서 앞쪽에 옆쪽에서 공격하여 96명을 사살했으며 18명을 사로잡았다. 빨치산을 토벌하는 성과를 얻었지만, 귀중한 문화재가 잃기도 하였다. 토벌 과정에서 천왕문과 사천왕문, 일주문을 제외하고 당시 제204호였던 대웅전을 비롯한 보림사 전체가 거의 불에 타버렸다. 그 뒤 한참 후인 1984년부터 추진된 복원계획에 의해 조금씩 복원되어 현재는 일주문과 사천왕문, 1998년에 복원된 대적광전, 대웅전, 조사전, 삼성각, 명부전 등이 절터를 채우고 있으며, 담장도 말끔히 둘러 정비되었지만, 소중한 문화재를 잃어버린 것은 아쉽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당시 경찰과 빨치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던 장흥군 유치면 공수평 마을, 용문리 등은 현재 사라졌는데, 이는 장흥다목적댐(탐진강댐)이 1997년 11월 공사를 시작, 2006년 6월 8일 장흥군 부산면 지천리에 완성됨으로써 그 상류인 이들 지역이 물에 잠겨버렸기 때문이다.

  • 질문1 6·25 전쟁 당시 장흥지역은 조선 인민 유격대 6개 지구 가운데 어느 지구에 속하였는지 써봅시다.
  • 질문2 빨치산 토벌을 하는 임무를 주로 담당한 이들의 직업은 무엇이었는지 써봅시다.
  • 질문3 보림사를 무대로 활동하던 빨치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큰 피해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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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1950년 10월 15일 장흥 유치지구 전투에서 희생당하신 분들을 합동으로 장례식을 하는 모습이다.

  • 질문1 이들의 옷차림으로 보아 이들은 주로 어떤 기관에 소속된 사람들인지 써봅시다.
  • 질문2 죽은 이들은 누구와 싸우다 사망하였는지 써봅시다.

시각자료 2

1951년 1월 유치지서 탈환작전 중 희생된 학도의용군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송정리 산116-2번지에 세워져 있는 비석(碑石)이다.

  • 질문1 비석에 큰 글씨로 무엇이라고 새겨져 있는지 우리말로 읽어봅시다.
  • 질문2 이 ‘慰靈碑’는 무엇을 위해 세운 비석인지 말해 봅시다.
  • 질문3 비석 옆에 세워진 안내 글에는 학생들의 이름이 나오고 있다. 이런 학생들을 뭐하고 하는지 써봅시다.

시각자료 3

전남 장흥 유치면 봉덕리에 있는 사찰 입구의 일주문과 그 현판 모습이다.

  • 질문1 현판에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사찰의 이름을 무엇인지 써봅시다.
  • 질문2 이 사찰은 고려 시대 5교9산의 9산 가운데 ○○○파(派)였는지 현판에 쓰여 있는 산 이름을 참고하여 빈칸에 알맞은 말을 써봅시다.
  • 질문3 이 사찰은 6·25 전쟁 당시 국보인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 대부분이 불에 타 버렸다. 어째서 사찰 전체가 거의 불에 타버렸는지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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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빨치산을 다룬 문학작품(수기, 전기, 소설, 시집, 만화 등)이나 영상작품(영화, 드라마)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찾아보고 이를 정리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빨치산을 적군이 아닌 인간적인 시각에서 이해하려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빨치산을 인간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면 빨치산을 토벌한 경찰과 국군이 나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런 문제들에 관한 다양한 의견을 서로 나눠 봅시다.
모둠활동 3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세워진 추모탑이나 기념탑, 또는 6·25전적지를 찾아가 봉사활동을 한 후, 그 결과를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제출해 봅시다.
모둠활동 4
전쟁은 아군은 물론 적군 모두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다. 더욱이 같은 민족 간의 전쟁은 또 다른 피해가 따른다. 6·25 전쟁과 같은 민족 간 전쟁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일들을 해야 좋을지 친구들과 대화를 나눠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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