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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생가(의병장으로 출발하여 도해 순국으로 의기를 드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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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백년 마지막에 태어나
붉은피 온 간장에 엉키었구나
중년의 독립동 19년에
모발만 늙어 서리 끼었는데
나라가 망하니 눈물이 하염없고
어버이 여의니 마음도 아프구나
머나먼 바다가 보고팠는데
이레가 마침내 동지(冬至)이더라
올로 외롭게 서니 옛 산만 푸르고
백번을 헤아려도 방책(方策)이 없네
희고 흰 저 천길 물속이
내 한몸 넉넉히 간직할만 하여라"

 

김도현은 1914년 11월 7일에 집을 떠나 백 여리나 되는 영해(寧海)로 가서 마치 신화의 한 장면과도 같이 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가 생을 마쳤다. 그는 죽음을 결심하고 바다로 가기 직전에 위와 같은 절명시를 남겼다.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의병, 계몽운동 등을 전개했던 김도현은 경술국치를 당하면서 순국을 결심했다. 그러나 부친이 생존해 있어서 그 결심을 늦추다가 부친마저 별세하니, 전국 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의 노중연(魯仲連)처럼 바다에 목숨을 던지는 길을 택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 상청1리 298
현재 상태 원형보존 / 김도현 활동 당시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조선에 대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다양한 민족적 저항이 있어났다. 이 중 가장 강력한 저항은 의병투쟁이었다. 일제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은 처음으로 전국적인 의병투쟁을 불러일으켰다. 을미 의병은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유생들이 주도했고 일반농민이 가담하였다. 그들은 존왕양이를 내세우고 일본 침략군과 거류민을 공격했으며, 친일 관리들을 처단하였다. 그러나 1차 의병은 아관파천으로 친일정권이 무너진 뒤, 단발령이 철회되고 국왕의 해산 권고 조칙이 내려지자 대부분 해산되었다.

열강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승인받은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국권을 강탈하자 이를 규탄하는 구국운동이 다양하게 전개되었고 의병들이 다시 봉기하였다. 을미의병이 국모시해에 대한 복수를 내세웠다면, 을사의병은 국권회복을 전면에 내세웠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지 2년 후인 1907년 일제는 열강과 더욱 긴밀한 관계 속에서 한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이러한 때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하였다. 이에 항일 의병투쟁은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일제에 대한 저항 방식은 의병투쟁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국권을 빼앗기자 교육과 산업을 크게 일으켜서 국권을 회복하자는 실력양성운동도 거국적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순국의 방식을 선택하여 민족의 의기(義氣)를 높이는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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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김도현은 세조 때 단종 복위를 꾀하다 죽음을 당한 김문기(金文起)의 14세손이다. 그의 집안은 단종 복위의 실패 후 경북 영양으로 입향하였고, 대대로 벼슬에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한미한 집안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김도현의 조부 때에 이르러 산골에서나마 천석(千石)을 들을 정도로 경제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자 종손이었던 김도현에게는 가문을 일으켜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어린 시절에는 할아버지인 김하술(金夏述, 1808~1864)이 세운 괴암 서당(槐岩書堂)에서 글을 배웠는데, 어려서부터 기상이 뛰어나고 남다른 데가 있었다. 소년기에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비롯하여 제자백가를 모두 통독하였다. 그는 안동의 권세연(權世淵), 예안의 이만도(李晩燾)등 이 지역 유림들의 학풍에 영향을 받으며 학문을 닦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권세연과 이만도는 그 지방에서 퇴계(退溪) 학통을 대표할 만한 유학자들로서 명망이 높았던 이들이었다. 김도현보다 권세연은 16살, 이만도는 10살이 많았고 학문이 뛰어났으므로 이들의 영향을 받고 학업을 쌓았다. 그러므로 안동 지방의 학풍인 퇴계 학통을 정신적인 지주로 사상이 형성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김도현은 학문을 닦아 1882년에는 과거에 응시하기도 하였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김문기 이후 몰락했건 가문을 일으키고자 했던 김도현은 사회제도의 문란과 점차 기우는 국가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구국(救國)의 결심을 굳혀갔다. 김도현은 위정 척사 사상으로 무장한 유학자였다.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마을에 성곽을 쌓고 반동학군(反東學軍)을 일으켰으며, 을미사변을 당해서는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사상적 경향은 그가 1897년에 올린 ‘팔조소(八條疏)’의 주요 내용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① 국호를 고를 고쳐서는 안 된다.
② 황제를 칭하는 것이 불가하다.
③ 관직을 폐(廢)해서는 안 된다.
④ 역기(曆紀)를 문란케 해서는 안 된다.
⑤ 반란을 토벌해야 한다.
⑥ 원수에 보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⑦ 군기(軍器)를 정비해야 한다.
⑧ 성문(城門)을 견고하게 해야 한다."

 

①, ②는 대한 제국의 성립에 반대한 것으로 당시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유림의 일반적인 주장이었다. 즉 황제를 칭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명나라에 대한 예의에 합당치 못하고 현실적으로는 중국과 적대적 관계가 되기 때문에 고립만 되고 유익함이 없다는 것이다. ③, ④는 행정 개편에 반대하는 것으로, 특히 양력 사용을 반대하는 이유는 그것으로 인한 사회 혼란을 막자는 것이다. ⑤, ⑥은 일제나 열강의 침략에 대한 강한 저항이었다. 이는 의병을 일으켰던 김도현으로서는 당연한 주장이라 해야 할 것이다. ⑦, ⑧은 군비에 관한 것으로 역시 의병장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김도현은 위정척사사상이 강한 유생이면서 실천적이고 전투적이었다. 그런데 을사의병 때에는 다소 사상의 변화를 보였다. 즉 의병을 일으키는 격문에서는 을미의병 때와 같이 위정척사적 면모를 보여주었지만, 한편으로는 각국 공사관에 「포고서양각국문(布告西洋各國文)」을 보내 서양 각국에게 지원을 간청하고 있다. 따라서 서양을 배척한 전통적인 척사 사상에서 다소 벗어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김도현은 1908년 영흥학교(英興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계몽주의 방법을 택한 것은 그가 개화사상과 혁신유림과의 교류를 통하여 사상적으로 다소 변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뒤 도해(蹈海) 순절한 것과 또 그때 지은 절명시 등으로 보아 사상적으로 유생의 범주를 완전히 떠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 질문1 김도현의 사상적 기반은 무엇인가요?
  • 질문2 1897년 김도현이 올린 ‘팔조소(八條疏)’의 주요 내용을 말해보시오.
  • 질문3 김도현의 사상적 변화를 알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2

1896년 2월 17일 김도현은 아우와 사촌 동생 등의 친척과 시골 백성 19명을 거느리고 청량산으로 들어가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튿날 김도현은 진용을 편성하고, 봉화읍으로 들어가 군수를 만나 총과 탄환을 지원받았다. 그 후 김도현은 내성(乃城)과 영주를 거쳐 예안으로 갔다. 2월 26일 예안을 출발하여 안동부로 들어갔다. 이 당시 김도현이 거느린 의병진은 수백 명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김도현이 청량산에서 봉화, 내성, 영주, 예안 등지를 거쳐 안동에 입성하기까지 10여 일 동안 비교적 정돈된 진영을 갖출 수 있었다. 김도현은 안동 의병에 연합을 제의하였으나 실패하였다. 2월 29일 김도현은 영양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영양 의병과의 연합이 뜻대로 되지 않자 청송으로 들어가 청송 의병과의 연합을 모색하였지만 이마저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영덕, 영해, 영양 등지를 거쳐 예안으로 가서 3월 18일 경 선성 의병(宣城義陳)에 합세하였다.

김도현은 선성 의병의 중군장(中軍將)을 맡게 되었고, 영덕군수 부자의 목을 베고 3월 26일경 예천회맹에 선성 의병의 본진을 이끌고 참여하였다. 예천회맹은 1896년 3월 20일 안동, 호좌, 풍기, 순흥, 영천, 봉화, 선성 등 7읍의 의병 부대가 안동의 풍산에서 도회를 열고, 함참 태봉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략하기로 계획하면서 시작되었다. 태봉은 상주시 함창읍 태봉리에 있는 봉우리로 대구에서 충주로 연결되는 병참선상에 놓여있었다. 그래서 일본군이 주둔하였다. 3월 28일 7읍 의병진은 예선 산양에 집결하여 회맹을 하고, 함참 태봉의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길을 나누어 출진하였다. 3월 29일 아침부터 공격이 시작되었다. 각 군 의병 부대의 공격은 모두 독자적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각 의병 부대가 대오조차 갖출 수 없는 상황에서 체계적인 공격이 이루어질리 없었다. 태봉 전투에서 7읍 연합 의병 부대는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 일본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으나 일본군의 공격에 밀려 퇴각하고 말았다.

선성 의병도 흩어져 김도현과 함께 퇴각한 장졸은 15~16명뿐이었다. 김도현이 퇴각하여 산양에 이르렀을 때 남은 병사는 3~4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예안에 도착한 김도현은 중군직을 사퇴하고자 했으나 4월 1일 안동 의병에서 구원을 요청해와 군사 50명을 이끌고 안동으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안동에 도착했을 때 이미 안동부는 일본군의 방화로 불타고 있었다. 예안으로 회군한 김도현은 중군직을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영양으로 귀환한 뒤 방한 허훈의 초청을 받아 진보 의병으로 갔다. 이어 민용호의 강릉 의병의 초청을 받아 6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강릉으로 향하였다. 민용호는 경기도 여주 출신으로 경기도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강릉을 중심으로 관동9군도창의소(關東九郡都倡義所)를 설치하고 여러 의병장을 규합하여 창의하였다. 민요호의 연합 요청을 받은 김도현은 평해, 울진, 삼척을 거쳐 4월 하순경 강릉에 도착하였다. 민용호는 김도현을 선봉장으로 임명하였다.

민용호 의병에 합류한 직후 서울에서 내려온 관군과 대공산성(臺空山城)에서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화력에 우세한 관군에 밀려 퇴진하였고, 의병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후 의병은 진영을 재정비하고 강릉에서 대관령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보현산성에서 다시 관군과 혈전을 벌인 후, 정선, 임계로 후퇴하였다. 이후 의병들은 삼척으로 이동하였으며, 5월 31일 관군과 대전투를 벌였다. 관군의 공격으로 시작된 이 날의 전투는 아침 5시 무렵부터 오후 5시 무렵까지 계속되며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전투 상황이 불리해져 결국 퇴각하고 말았다.

6월 10일경 김도현은 강릉에서 영양으로 회군하였다. 김도현은 삼척에서 흩어져 귀환한 군사를 수습하니 겨우 10여 명에 불과하였다. 김도현은 소청(小靑)의 검각산성(劍角山城)에 본진을 두고 통문을 돌리며 의병들을 모집하였다. 이후 김도현은 검각산성을 중심으로 영양, 안동, 청송, 영덕, 영해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유격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6월 22일 입암 전투와 소청전투였다. 입암 전투와 소청전투는 김도현이 유격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지리적인 이점에도 불구하고 무기의 열세로 말미암아 패한 전투였다.

7월 13일 김도현은 영해읍으로 진군하였다. 이 때 청송·의성 의병과 함께 경주 연합 의병을 결성하였던 김하락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김하락은 6월 18일 경주성 전투에서 패한 뒤 잔여병력을 이끌고 7월 2일 영덕읍에 도착하였다. 이 후 영덕에서 100여 명을 모아 영해 등지를 전전하다 7월 13일과 14일, 양일에 걸쳐 김하락 의병과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김하락은 중상을 입고 목숨을 끊었다. 김도현은 안동의병과 김하락 의병의 잔병들과 함께 영양으로 회진하였다. 7월 20일 경 김도현은 청송의 덕천에서 마평을 거쳐 대전(大前)으로 향하던 중 일본군이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영양으로 진격하였다.

9월 중순경이 되면서 각처의 의병진이 해산하기 시작하였다. 김도현은 각처에서 의병진이 해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도현은 총 113자루를 은닉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