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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칠보발전소 전투지(정읍에서 적을 무찔러 발전소를 지키다)

도입

전라북도 정읍이나 태인에서 산외면 방향으로 가다 칠보면에 다다르면 동진강 오른쪽 산줄기에 하얀색의 원통 3개가 거의 산 정상에서부터 아래까지 콘크리트 구조물로 길게 이어져 있는 게 있어 눈에 훤히 들어온다. 또 맨 아래 마당에는 전기시설 건물들이 여럿 있어 눈에 띈다. 이들은 무슨 시설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곳이 섬진강수력발전소라는 곳이다. 그런데 발전소라면 댐이 있고 많은 물이 있기 마련인데 그런 게 보이지 않아 어떤 발전소이기에 이런 곳에 세워졌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하기도 하다.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에 있어 흔히 ‘칠보발전소’라고도 부르는 섬진강수력발전소는 옥정호(玉井湖)로부터 6km 넘는 압력수로를 통해 물을 끌어와 그 높이차를 이용하여 전기를 생산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유역 변경식 수력발전소로, 발전(發電: 전기를 생산함)하는데 사용한 물을 다시 동진강(東津江)으로 흘려보내 호남평야의 농사짓는 물로 사용하는 한편 사람들이 먹거나 사용하는 용도로 제공하고 있다.

6·25 전쟁 당시 호남평야(湖南平野: 전라북도의 서쪽을 차지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평야로, 주로 만경강·동진강 유역에 펼쳐져 있으며, 전주·익산·정읍·군산·김제를 비롯하여 완주·부안·고창 등의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 전북평야, 전주평야라고도 부른다]에 농업용 물을 제공하던 칠보발전소는 아주 중요한 곳이었으며, 전력이 부족하던 당시에 칠보발전소의 위치는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정읍은 전라남도로 이어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따라서 6·25 전쟁 기간 정읍지역과 칠보발전소를 차지하기 위한 전투가 적지 않게 일어났다. 그 가운데 ‘칠보발전소 전투’하면 보통 1951년 1월 14일, 1,900여 명의 빨치산이 칠보발전소를 쳐들어왔을 때, 전북 제18전투대대와 경찰 병력이 그들을 무찔렀던 전투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대대장 차일혁 경감의 활동은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라는 책으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또 차일혁 총경을 배경으로 ‘애정산맥’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져 1953년 전국 극장가에서 1위를 석권하기도 하였다.

6·25 전쟁 당시 정읍, 특히 칠보발전소가 차지하는 위치가 중요했던 만큼 정읍시에는 6·25 전쟁과 관련된 기념비들이 여럿 세워져 있다. 거룩한 얼(정읍시 수성동 충무공원, 보통 ‘정읍 충혼탑’이라고 부르며, 충무공원은 이곳에 이순신 장군 사당인 충렬사가 있어 충렬사공원이라고도 부른다), 향토자유수호기념비(정읍시 내장동 내장산 안), 무명전몰용사추모비(정읍시 산내면 매죽리), 충혼탑(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보통 ‘칠보 충혼탑’이라고 부른다) 등이 있는데, 칠보 충혼탑(忠魂塔)은 섬진강수력발전소(칠보발전소) 건물 뒤쪽, 산허리쯤에 세워져 있다. 이곳에 처음 가는 이들은 충혼탑으로 올라가는 위해 칠보발전소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기 쉽지만, 칠보발전소 바깥쪽 뒷길을 이용해야만 충혼탑으로 갈 수 있다.

철근콘크리트로 높이 15m, 하늘을 향해 길게 세워진 칠보 충혼탑은 전라북도경찰국 칠보지구특별경비대대가 군경과 발전소원, 애국청년 등과 함께 1951년 6월 17일 칠보발전소를 지키다 순국한 69명(경찰 25명, 향토방위대 26명, 학도호국단 1명, 발전소 직원 10명, 민간인 7명) 및 당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54년 6월 25일 세운 기념탑으로, 탑 정면 아래쪽 이들의 이름은 새겨져 있다. 매년 6월 6일 현충일에 이곳에서 참배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정읍시와 정읍경찰서는 충무공원 충혼탑인 ‘겨레의 얼’ 앞에서 기념행사를 개최하여 정읍지역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을 기리고 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210일대
현재 상태 변형 / 1945년 4월 제1호기 준공 이후 1965년과 1985년 2호기, 3호기가 각각 준공되었다. 발전소 뒤편에 충혼탑이 건립되어 매년 추모행사를 하고 있다.

북한군의 침략에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1950년 7월 1일 부산에 처음 도착한 유엔군은 7월 5일 미 제24사단 스미스부대가 급히 오산전투에 직접 투입되었으나 패배하여 국군과 함께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7월 16일 금강 방어선마저 무너지자 북한군 주력은 대전을 공격하는 한편, 후속부대인 제6사단으로 1번 국도(一番國道: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평안북도 신의주시에 이르는 일반국도)를 통해 호남지방 진출을 시도하였다.

금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7월 20일 대전 방어선마저 무너지기 전인 7월 11일 이미 북한군 최고사령부는 북한군 제6사단에 특수임무를 주어 서해안을 따라 은밀히 전진하면서 무방비상태에 있는 호남지역을 빠른 속도로 휩쓸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북한군 제6사단은 그 공격 방향을 군산, 익산, 전주로 돌렸으며, 7월 13일 일부 병력으로 공주를 침범하였다. 7월 14일에는 북한군 제4사단이 107전차연대와 함께 공주를 공격하면서 금강을 건넜으며, 일부는 7월 15일 논산을 점령하고 전주로 향하였다.

전라도는 대부분이 평야이기 때문에 북한군이 공격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으며, 열악한 장비와 병력으로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막강한 화력을 막아내던 아군(我軍: 우리 편의 군대)은 끝내 전주, 임실, 남원 등을 적의 손에 빼앗기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정읍, 장성, 광주 등이 계속 북한군에 점령되면서 7월 말에는 전라도 전체가 북한군의 손에 넘어갔다. 전라도 지역을 점령한 북한군은 부산을 목표로 하여 마산·부산 방면으로 계속 공격해 나갔으며, 전라도를 전쟁에 필요한 물건을 모아두는 창고와 식량을 공급하는 기지로 사용하였다.

한편 7월 말 낙동강지역에 도달한 북한군은 국군과 유엔군에 대한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8월 4일경에는 낙동강 방어선이 성립되어 국군과 유엔군은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데 온 힘을 쏟았다. 8월 한 달 동안 계속된 치열한 전투에서 북한군은 엄청난 병력과 많은 장비를 잃게 되어 더는 공격을 계속하기 어려운 처지가 되었으며, 반면 국군은 유엔군의 증원과 함께 추가로 군인을 모집하면서 예전의 전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1950년 9월 15일 이루어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북한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그동안 적을 막아내는 데 급급했던 국군과 유엔군에게 공격하는 자세로 돌아서게 하였다. 이에 빼앗긴 도시들을 되찾아나갔다.

1950년 9월, 경상도 대부분을 되찾은 국군과 유엔군은 전라도로 나아갔으며, 광주와 목포, 전주 등을 되찾았다. 이미 국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군산, 익산 등 주요 항구를 공격하기도 하였는데, 9월 30일 군산을 되찾았으며, 무주, 진안 등으로 진격해 나갔다. 1950년 10월에는 전라도 도시 대부분을 되찾고, 금강까지 차지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을 남한지역 대부분을 되찾았음에도, 남한지역에는 미처 후퇴하지 못한 북한 인민군은 물론 이전부터 사회주의를 지지하거나 북한을 따르는 세력들이 남아 있었다. 이들은 보통 산속으로 들어가 숨어있으면서 유격전[遊擊戰: 적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서 정규군이 아닌 이들이 열세한 장비를 가지고 무장하여 기습·습격 등을 감행하는 전투 형태. 게릴라전(Guerrilla Warfare)이라고도 한다]을 펼치면서 국군이나 경찰을 공격하였다. 또한, 일반인들을 부추겨 사회주의를 지지하거나 북한을 따르도록 꾀하였다. 이들을 공비(共匪: 공산당 유격대, 공산 게릴라) 또는 빨치산(Partisan: 비정규군. 유격대, 게릴라)이라고 부르곤 하는데, 빨치산은 러시아어 ‘파르티잔’을 우리말로 발음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인민 유격대’를 빨치산으로 부르고 있다. 이들 빨치산은 6·25 전쟁 때 조직되어 활동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6·25 전쟁 이전부터 활동하였으며, 전쟁 기간 활발히 활동하다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맺어진 이후에도 활동을 계속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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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전북 임실군과 정읍시에 걸쳐있는 옥정호(玉井湖)는 1965년 12월 섬진강댐(섬진강다목적댐, *새 댐, 임실군 강진면 옥정리)이 세워지면서 만들어진 인공호수이다. 운암호(雲庵湖)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원래 운암호는 호남평야의 농사를 위해 섬진강의 물을 끌어다 쓰기 위해 일제강점기인 1928년 동진수리조합에서 댐(운암댐. *구 댐, 임실군 운암면 입석리)을 쌓아 만든 저수지이다. 이곳의 물을 수로를 통해 끌어와 낙차(落差: 떨어지거나 흐르는 물의 높낮이의 차)를 이용하면 전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

이에 정읍시 산외면 종산리에 운암수력발전소가 세워졌는데, 운암발전소는 1929년 10월 설립된 남조선 전기 주식회사에서 1929년 12월 공사를 시작하여 1931년 10월에 완성되었다. 처음에는 운암댐(구 댐)의 물을 사용하여 전기를 생산하였으며, 그 물을 동진강으로 흘려보내 농업용수(農業用水: 농사짓는 데 사용하는 물)로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1965년 12월 새 댐(섬진강댐)이 만들어짐으로써 구 댐은 물속에 잠겨 버려 섬진강수력발전소와 같이 새 댐의 물을 사용하였는데, 현재는 기계가 너무 낡아 1985년 2월 폐쇄되어 빈 건물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1945년 4월,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에 새로운 발전소가 하나 더 세워졌는데, 이것이 섬진강수력발전소 제1호기이다. 흔히 칠보발전소(칠보수력발전소)라고 부르기도 하는 섬진강수력발전소는 다른 곳으로부터 물을 끌어다가 그 낙차를 이용하여 발전하는 ‘유역 변경식 수력발전소’이다. 섬진강수력발전소는 전기를 생산하는 동시에 그 물을 동진강으로 흘려보내 호남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였다.

섬진강수력발전소 건설은 일제강점기인 1940년 9월 남조선 전기 주식회사에서 처음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1943년 9월 남조선 전기 주식회사가 조선 전업 주식회사에 통합되어 계속 공사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전쟁을 치르는 관계로 물건을 구하기 어려워 공사가 늦어지는 가운데 전체 공사의 약 60%, 댐 공사의 23%가 완성된 상태에서 1945년 4월 제1호기의 첫 발전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섬진강수력발전소는 1945년 4월 제1호기의 첫 발전을 시작하였으나, 1945년 광복과 함께 사용이 중단되었다. 1946년 정부의 보조로 다시 공사가 이루어졌으나 공사시행계획의 변경, 자재 구입의 어려움, 시공업자 선정 잘못 등으로 공사 추진이 늦어지다가 원조단체인 미국 ECA가 공사를 맡았으나 6·25 전쟁이 일어나 다시 중단되었다.

이곳은 1950년 7월 21일 북한군에게 점령당하였는데, 이들은 산업성(産業省) 전기국(電氣局) 아래에 섬진강발전부(發電府)를 두어 칠보·운암·보성강 발전소를 통합하여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유엔군의 폭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발전기를 비롯하여 각종 기계를 해체하여 여러 곳에 흩어놓기 시작하던 중 유엔군의 폭격으로 적지 않은 시설이 파손되기도 하였다.

9월 28일 국군이 이곳을 되찾을 때에는 공비(빨치산)들이 산으로 도망가면서 불을 지르고 총을 쏘는 바람에 건물 5동이 불타고 변전설비가 파괴되는 등 심한 피해를 보았다. 그 뒤 파손되거나 여러 곳에 흩어놓은 기계들을 정비하여 1950년 12월 복구공사를 시작하여 1951년 4월 제1호기 복구를 완료하였다.

6·25 전쟁 후, 국토건설사업의 하나로 건설부 주관 아래 한국전력공사가 다시 댐 건설을 추진하게 되어 섬진강수력발전소 제2호기 건설이 이루어졌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따라 1961년 8월 19일 공사를 시작하여 1961년 11월 23일 건설부와의 업무계약 아래 일본공영과 설계용역계약을 맺었으며, 1965년 12월 완성하였다. 길게는 1940년 처음 공사가 시작된 지 25년 만에 완성되었다.

제2호기는 임실군 강진면 옥정리와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 사이의 섬진강 상류에 중력식(重力式) 콘크리트댐(섬진강다목적댐.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댐)을 쌓아 많은 물을 확보하여 발전(發電)을 하도록 하였다. 나아가 운암발전소가 폐쇄되면서 저수지 수량을 유효하게 이용할 목적으로 제3호기가 1983년 9월 공사를 시작하여 1985년 3월 완성되었다.

섬진강수력발전소는 발전에 사용한 물을 동진강에 흘려보내 동진강 하류지역에 농업용수를 공급할 뿐만 아니라 전주·정읍·김제 시민의 생활용수를 제공하고 있다. 나아가 섬진강댐은 발전과 용수 공급은 물론 홍수 조절 등 자연재해를 조절할 수 있는 다목적댐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질문1 섬진강수력발전소를 다른 말로 ○○발전소라고 부르는지 빈칸에 알맞은 말을 써봅시다.
  • 질문2 섬진강수력발전소가 세워진 때(처음 발전을 시작한 때)는 언제인지 그 해당 연도를 써봅시다.
  • 질문3 섬진강수력발전소를 점령한 북한군은 유엔군의 폭격에 대비하여 발전소의 건물을 어떻게 하였는지 써봅시다.

읽기자료 2

전력이 부족하고 농업이 중요한 산업을 차지하던 때, 전기를 생산하고, 그 물을 다시 농업용수로 사용하거나 홍수 등 자연재해를 조절하는 데 필요한 발전소나 댐은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따라서 6·25 전쟁 기간 칠보발전소를 차지하기 위한 전투가 적지 않게 일어났다. 북한군은 이곳을 빼앗거나 이곳을 파괴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으며, 아군이 온 힘을 쏟아 이곳을 빼앗기지 않고 지키려 하였다.

칠보발전소를 둘러싼 전투는 적지 않게 일어났다. 그 가운데 ‘칠보발전소 전투’하면 보통 1951년 1월 14일, 1,900여 명의 빨치산이 이곳 칠보발전소를 갑자기 쳐들어왔을 때, 전투경찰 제18전투대대와 지서 병력이 이들을 무찔렀던 전투를 가리키며, 이때의 전투를 ‘칠보발전소탈환작전’이라고도 부른다.

1950년 9월 15일 성공한 인천상륙작전으로 남한을 점령하고 있던 북한군이 물러갔다고는 하나 호남지방은 아직도 공비(빨치산)들이 남아 활동하였다. 전북 회문산에는 공비들의 도당사령부가 설치되어 있고, 쌍치면 가마골에는 공비들의 연합사령부가 상부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1951년 1·4후퇴(중국군의 참전으로 1월 4일 서울에서 후퇴. 1월 5일에는 서울을 빼앗김) 직후에는 이들 빨치산 활동이 활발하였다.

그런 가운데 정읍군 칠보면 섬진강 상류 운암호(옥정호)에 있는 칠보발전소가 공비들의 공격으로 완전히 포위되었다. 당시 칠보발전소는 충남과 전남, 전북지역에 전기를 보내주는 발전소이자 남한에서 유일하게 전기를 생산(강원도 영월발전소가 적에게 점령된 직후라 남한지역의 송전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하는 아주 중요한 발전소였지만, 그 당시 발전소는 북한군에 포위되어 전기를 보내는 게 불가능하였다. 아군은 칠보발전소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발전소라는 것을 알면서도 1·4후퇴로 남으로 밀리는 상황에서 병력을 보낼 수가 없었다. 대신 전투경찰이 칠보발전소로 출동하였다.

1951년 1월 12일, 전북도당위원장이 지휘하는 회문산지구 빨치산 1,900여 명이 칠보발전소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급히 소집된 전북도경 공비대응작전회의 결정에 따라 전북도경 전투경찰 18대대장 차일혁 경감은 1월 13일 저녁 5대의 차에 불과 105명의 대원과 중화기를 싣고 항가리(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를 떠나 칠보로 향하였다. 가는 도중 차 1대가 고장이 나 30명을 내려놓고 75명만이 1월 14일 아침 5시경 태인에 도착하였다. 태인지서의 상황 보고에 의하면, 적은 칠보 방면을 완전히 포위한 채 수시로 태인을 위협하고 있으며, 이미 포위당한 아군은 모두 무너질 위기에 놓여 있었다. 오전 6시 다시 출발하여 대규모 부대가 오는 것처럼 속여 가며 전투를 펼치면서 마침내 칠보지서에 도착하였다. 지서에서 3일간이나 적들에게 갇혀서 이제는 총알조차 떨어져 최후의 전투를 각오하고 있던 경찰대원, 학도병 등 300여 명을 구출하였다.

앞으로 문제는 발전소였다. 칠보지서에서 발전소까지 불과 1.5km에 불과했으나 사방의 고지들을 적들이 점령하고 있어서 발전소까지의 진출은 목숨을 걸어야 했다. 특공대를 앞세워 공격을 시작, 밀고 밀리는 전투가 끝에 공비들을 발전소 지역에서 물러났다. 적과 싸우기 시작한 지 11시간 만인 1월 15일 오후 5시경이었다. 이후 선왕봉 고지, 명천 320고지, 시산 300고지, 장군봉, 800고지 등을 모두 차지하여 발전소를 빼앗으려는 적의 공격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아울러 3일간 적에게 포위되어 발전소에 고립된 채 죽음을 눈앞에 두어야 했던 아군 동료를 구출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 사살 68명, 빼앗은 무기 총 12정, 수류탄 5개, 실탄 600발 등이었으며, 발전소를 확보하기까지 우리의 피해는 전사 12명, 부상 22명이었다. 75명의 전투경찰이 적 2,000여 명을 상대, 그것도 이미 유리한 고지 확보하고 있고 장비마저 우수한 적을 상대로 싸워 이긴 칠보발전소 전투는 자랑스러운 전투가 아닐 수 없다. 이 승리로 발전소는 정상 가동되어 전기를 보낼 수 있었다.

전열을 정비한 적은 다시 발전소 뒤쪽 418고지를 차지함으로써 이곳을 빼앗기기도 하였으나 1월 16일 다시 찾았다. 그 후 1951년 3월 15일에도 칠보발전소 동쪽 1㎞ 지점 독고봉에 빨치산 90명이 침입하였는데, 차일혁 경감이 지휘하는 제18전투대대는 6시간의 교전 끝에 74명을 사살하였고, 소총 56정을 빼앗으며 발전소를 지켰다.

한편 섬진강수력발전소 뒤편 산기슭에 충혼탑이 세워져 있는데, 여기에 기록된 내용은 1951년 1월 14일 벌어진 칠보발전소 전투와는 다른 전투에서 순국한 이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이다. 충혼탑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쓰여 있다.

 

칠보 충혼탑

국가산업 부흥의 원동요소인 전력을 생산하는 섬진강발전소와 송전시설은 험준한 산간 노령산맥에 위치하고 있어 6·25이후 在山共匪(재산공비)의 유일한 파괴대상인 반면, 이 시설의 수복과 수호경비는 당시 중대한 국가적 긴급한 과제일 뿐 아니라 실로 삼남지방의 전력 여부를 좌우하였다.

마침내 9·28 수복 당시 광주주재 국군정예의 지원을 얻은 애국경찰과 지방 향토청년 및 발전소직원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발전시설의 운전과 삼남지방의 전력공급에 위협이 발생하게 되자 1951년 6월 17일 칠보지구 특별경비대대가 편성, 이곳에 배치되어 군경 및 발전소원, 애국청년 등과 함께 발전소를 사수하다 69명이 산화하였다.

이와 같이 극악무도한 공비를 상대로 원활한 발전과 그 송전을 위하여 순직한 칠보 특별경비대대를 비롯한 그 외 군경 및 발전소 직원, 애국청년 등 위국충정한 영령 100여주의 위대한 업적을 영세불망키위하여 1954년 6월 25일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이 탑은 철근콘크리트로 높이 15m, 총용적 32㎥이며, 매년 현충일 참배가 거행되고 있다.

  • 질문1 칠보발전소 전투가 벌어진 시기는 서울을 다시 빼앗긴 후였습니다. 서울을 빼앗기기 하루 전인 1951년 1월 4일 정부가 서울에서 후퇴한 일을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써봅시다.
  • 질문2 칠보발전소 전투는 언제 일어난 전투인지 써봅시다.
  • 질문3 칠보발전소 전투를 승리를 이끈 당시 전북도경 전투경찰 18대대장은 누구였는지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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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전북 정읍 칠보면에 있는 칠보발전소의 모습이다.

  • 질문1 사진에서처럼 칠보발전소는 다른 곳에 있는 물을 끌어와 낙차를 이용하여 전기를 생산한다. 이런 발전소를 ‘○○○○○ 수력발전소’라고 한다. 빈칸에 알맞은 말은 무엇인지 써봅시다.
  • 질문2 사진 아래쪽에 흐르고 있는 강물은 발전소에서 발전한 물을 흘려보낸 것이다. 이 강(江)의 이름은 무엇인지 써봅시다.

시각자료 2

칠보발전소 뒤편 산자락에 세워진 기념탑과 탑 위쪽 새겨진 글씨 모습이다.

  • 질문1 이 탑의 이름은 무엇인지 새겨진 글씨(사진 왼쪽 윗부분)를 참고하여 써봅시다.
  • 질문2 이 탑이 세워진 데에는 칠보발전소와 관련이 있다. 어떤 일로 세운 탑인지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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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자신의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 가운데 6·25 전쟁에 참여한 이들이 전쟁과 관련하여 찍은 옛 사진들을 모아 정리한 후 그들에게 드리고, 나아가 친구들과 함께 공유해 봅시다.
모둠활동 2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주변에 전쟁과 관련 있는 곳(국가수호 사적지, 공원 등)을 찾아가 봉사활동을 한 후, 그 결과를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제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세워진 추모탑이나 기념탑, 또는 6·25전적지 가운데 경찰과 관련된 곳을 찾아 그들의 활동상 및 보고 느낀 점을 정리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4
빨치산과 관련된 책으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차길진, 후아이앰)와 『남부군』(이태, 두레)등이 있다. 이 책을 읽고 느낀 감상문과 함께 두 책의 입장을 비교·정리하여 보고서로 제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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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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