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영역

본문영역

  • 도입
  • 역사적 배경
  • 읽기
  • 시각자료
  • 모둠활동

주요사적지 배움터

서재필 생가(애국계몽 운동의 선구적 인물)

도입

"…… 조선인들은 남에게 의지하고 힘입으려는 마음을 없애야 한다. 청국에 의지하지 말라. 종이나 사환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일본에 의지하지 말라, 나중에는 내장을 잃으리라. 노국에 의지하지 말라. 필경에는 몸뚱이마저 삼킴을 당할 것이다. 영국과 미국에 의지하지 말라. 청국과 일국과 노국에 원수를 맺게 될 것이다. ……"

 

이 글은 1898년 1월 20일자 『독립신문』에 서재필이 기고한 글이다. 서재필은 자주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 독립협회를 창설하고, 독립문과 독립관, 그리고 독립공원을 건설하였으며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통하여 자주독립사상 뿐만 아니라 평등사상, 자유사상, 한글의 강조, 국제화사상 등 근대적인 가치들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또한 미국에서 거주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528
현재 상태 6·25 전쟁 때 소실되었으나, 2003년에 주요 건물들이 복원되었다.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은 외가인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현재의 용암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가는 충청남도 논산군 구자곡면 금곡리이며, 보성의 외가에서 출생하여 7세 때 충남 대덕의 7촌숙 서광하(徐光夏)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1882년 3월 실시된 별시 문과 병과에 세 번째로 합격했고, 1883년 일본의 도야마육군학교(戶山陸軍學校)에 유학하였다. 이 학교에서 동료 14명과 함께 1년간 현대 군사 훈련을 교육 받고, 1884년 7월 귀국해 사관학교의 설립을 건의하여, 국왕으로부터의 승낙을 받아 조련국(操鍊局)을 만들어 사관장이 되었다. 그는 1884년 12월 갑신정변에 적극 가담하였으나 실패하자 일본을 거쳐 이듬해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컬럼비아 의과대학 야간부(지금의 조지 워싱턴 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미국에 귀화하였다. 갑오개혁을 추진하던 박영효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1896년 4월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중추적인 역할을 하다가 정부와 마찰을 빚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3·1 운동이 일어난 후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 고문으로 추대되었으며, 임시정부의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서 외교활동을 맡았다. 1921년 세계 군축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요청서를 제출하였으며, 1922년에는 미국 대통령을 면담하여 한국의 독립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1925년에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범태평양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일본의 한국 침략을 폭로, 규탄하며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였다.

1947년에 귀국했다가 이듬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77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읽기

읽기자료 1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후 일본을 통하여 미국으로 망명을 하였던 서재필이 1896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서재필의 활동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은 『독립신문』의 창간과 독립협회 운동이었다. 서재필은 제3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의 지원을 받아 1876년 4월 7일 최초의 순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물론 『독립신문』의 창간이 서재필 혼자의 힘만으로 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국내 개화파 중에서 갑오개혁을 추진했던 온건개화파와 서재필의 합작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정부에서는 설립자금과 서재필의 생계 및 주택구입비, 신문사 건물 등을 지원하였으며 신문의 구독을 지원하고 우송상의 혜택도 주었다. 『독립신문』은 처음에 주 3회를 발행하였으나 1898년 7월 1일부터는 일간으로 발간했으며, 총 4면 중 3면은 국문판이었고 나머지 1면은 영문판이었다. 물가와 관보(官報)는 채용된 기자들이 담당했으나 논설을 비롯한 일체의 기사는 서재필이 도맡아 집필했다. 따라서 『독립신문』에 담겨진 지식과 논조 그리고 사상은 그대로 서재필의 것을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독립신문』은 국민계몽과 국정개혁 그리고 사회개량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처음에는 3백 부 정도 발행하다가 나중에는 3천부까지 발행하게 되었다. 마땅한 읽을거리가 없었던 당시에 이웃에서 이웃으로 돌려가면서 읽었을 것을 추정해본다면 그 영향력은 대단했을 것이다. 특히 『독립신문』은 순한글을 사용하여 당시 지식층의 일반적 취향을 거역하고 기존의 가치관에 변혁을 가져왔으며,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일깨우고 투철한 자립정신과 날카로운 비판정신을 국민 속에 확산시켰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통해 자주독립과 국민주권, 만민평등의 민주주의 사상을 대중 속에 확산시켜 국민을 위한 국정 운영에 기여하였다.

한편 서재필은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립하였다. 서재필은 이 협회의 고문을 맡았으며 회장에는 안경수(安駉壽)가 되었다. 독립협회는 1896년 11월 30일 기관지 『대한독립협회회보(大韓獨立協會會報)』를 창간하였다. 창간호에서 안경수는 ‘독립협회의 정신이 대중 속에 독립의 참의미를 깨우치고 스스로 알고 행하게 하며 사람마다 권리를 가지는 국가를 건설하고 밖으로는 국가의 자주를 공고히 함에 있음’을 밝혔다. 독립협회의 창립이 표면적으로는 독립문을 건립하고 그 부지에 독립공원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서재필이 뜻한 사회개혁 활동을 지원해 줄 수 있는 세력의 결집과 조직 기반의 구축이었다. 이어 서재필은 모화관(慕華館)을 개수하여 독립협회의 사무소 겸 집회장으로 만들고 1896년 11월 20일 독립문을 건립하였다.

서재필에 의해 지도된 독립협회는 그 발전 과정에서 성격상 변화를 가져왔다. 최초에는 계몽 단체로 출발하였는데, 1897년 8월에 대중토론회를 개최하면서부터는 점차 정치단체로 발전하여 대중운동을 선도하게 되었다. 또한 광범한 민중이 참여하여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고 외국의 간섭을 규탄하는 대중적 운동조직으로 발전하였다. 독립협회는 대중계몽과 민권의식의 고양을 위한 34여 회의 토론회를 가졌으며,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부터 환궁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문제나 한러은행의 설치 등을 저지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만민 공동회는 서재필의 구상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 독립협회는 윤치호가 회장을, 이상재가 부회장을 맡으면서 적극적인 행동단체로서의 성격이 보다 강화되었으며, 그 운동이 차츰 지방 도시로 확대되어 갔다. 외세에 대한 자주국권 운동과 함께 형벌의 남용에 저항하여 자유민권 보호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898년 8월부터는 의회 설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898년 11월 4일 수구파의 무력에 의해 독립협회의 간부들이 체포되었다. 또한 의회 설립을 둘러싸고 수구파·황국협회와 독립협회·만민 공동회 사이에 실력에 의한 공방전이 전개되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결국 1898년 12월 25일 황제의 칙령에 의해 독립협회는 와해되고 말았다.

  • 질문1 서재필이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은 무엇인가요?
  • 질문2 『독립신문』을 한글로 발행하고 나중에는 영문판도 발행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 질문3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통하여 확산시키고 싶었던 사상을 말해보시오.
  • 질문4 의회의 설립을 계획했던 독립협회가 구상했던 정치체제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2

1919년 고국에서의 3·1운동과 상하이에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소식이 미국에 알려지면서 서재필 또한 독립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1919년 4월 14일~16일 사이에 미국의 필라델피아 리틀 극장에서 한인 연합 대회가 열렸는데, 이 대회는 일본의 한국 강점을 규탄하고 그 부당성을 만방에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서재필은 이 대회를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의장직을 맡아 수행하였다. 여기에는 미국, 하와이, 멕시코의 교민 대표 200 여 명이 참가했다. 열흘 정도의 소집 공고, 어려운 교통편, 대부분 교민이 막노동 일꾼이었다는 당시의 상활에서 이만큼 많은 수의 교민 대표가 모였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대회가 끝난 직후 4월부터 필라델피아 시내 중심부에 있는 빌딩의 한 방을 빌려 대한민국 임시정부 통신부를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한국평론[Korean Review]』를 발행하는 등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 잡지는 한국에서 들어오는 소식과 중국 및 파리에서의 독립운동 상황, 그 밖의 글을 실어 독립운동에 대한 미국인의 인식을 좋게 하는 데 큰 구실을 했다. 1919년 연말까지 통신부의 활동은 순조로웠다. 국민회로부터 재정지원이 약속대로 이루어졌고, 서재필은 이승만과 협력하는 의미에서 이승만이 워싱턴에 설립했던 구미위원부의 고문직을 맡았고, 이승만도 통신부의 후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1920년 서재필의 통신부에 대한 국민회의 지원이 급격히 감소하였고 1921년에는 지원이 끊어졌다. 그동안 위원부와 국민회로부터의 지원금도 겨우 사무실 임대료, 직원 월급, 그리고 『한국평론[Korean Review]』 발행비용을 충당했을 뿐, 서재필은 봉급도 없었고 여비는 자신이 마련해야 했다.

서재필은 통신부 운영, 구미위원부 자문, 『한국평론[Korean Review]』 발행에 그치지 않고 미국 국민을 향한 외교활동에 있어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필라델피아 한인회의 직후 서재필은 ‘한국친우동맹(韓國親友同盟)의 조직을 위한 캠페인에 나섰다. 필라델피아 지회는 1919년 5월 16일 발족했는데, 목적을 극동의 실정을 미국인들에게 알리고 자유를 위해 싸우는 한국민족에게 격려와 동정을 보내고 한국에서 일제의 폭정을 중지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한국 친우 동맹은 그 후 10년 동안 미국과 영국에 10개의 지회로 늘어났고, 한국 독립을 지원하는 회원들 중에는 미국의 상원의원, 의사, 목사, 교수 등이 포함되었다. 1922년에는 워싱턴에서 열린 ‘태평양 군축 회의(太平洋軍縮會議)’에 한국 각계각층 대표들과 각 도 및 군 대표들이 서명한 청원서를 제출하여 미국과 열강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이해시키고 후원을 도모하였다. 또한 1925년 하와이의 호놀룰루에서 열린 ‘범태평양 회의(汎太平洋會議)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일본의 한국 침략을 폭로하고 규탄하기도 하였다.

서재필이 미국에 거주하면서 이룬 독립활동은 많은 것을 희생한 결과였다. 그가 당시를 회고한 바에 따르면 자기의 시간과 재산을 모두 바쳤을 뿐만 아니라 과로한 탓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의사로부터 오랫동안 휴식을 취할 것을 권고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워싱턴 군축회의가 끝나면서 재정난으로 말미암아 ‘통신부’와 ‘한국 친우 동맹’ 사업을 정지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3·1운동 후 약 3년여의 재미 독립활동 기간 중에 시간과 재산을 모두 바치고 사실상 파산하고 말았다. 독립운동 중 사업은 남에게 넘어가고 남은 집 한 채마저도 저당 잡히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놓여있었다고 한다.

갑신정변으로부터 『독립신문』, 독립협회의 활동을 거쳐 미국 시절의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서재필의 생애는 조국의 기화와 독립을 위한 희생과 봉사활동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 질문1 서재필이 주도한 필라델피아 한인 연합 대회에 200여 명이 참석한 의미가 큰 이유는 무엇인가?
  • 질문2 3·1 운동 후 서재필이 미국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의 내용을 말해보시오.
  • 질문3 서재필이 미국에서 독립운동 활동을 계속할 수 없었던 중요한 이유를 말해보시오.

읽기자료 3

1896년 귀국하여 가장 먼저 했던 활동이 공개 강연이었다. 이 강연을 통해 그는 매국과 민족자주 정신을 강력하게 역설하였다. 즉 강연회의 청중으로 하여금 국기에 대해 배례하게 하고 국민의 자주적 자세 확립의 필요성과 국가 운명을 좌우하는 적극적 행위자로서의 민중의 존재 의식을 일깨우려 했다. 이러한 서재필의 민족자주 사상은 대내적으로는 우리 민족 자신의 주체적 자아를 확립하는 것과 대외적으로는 외세의 부당한 간섭이나 침탈을 배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선 그의 민족자주 사상은 우리 민족 구성원 스스로의 자기반성을 통하여 민족적 긍지와 자아를 되찾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독립신문』 창간호의 논설에서 “각국에서는 사람들이 남녀를 물론하고 본국 국문을 먼저 배워 능통한 후에야 외국 글을 배우는 법인데 조선에서는 조선 국문은 아니 배우더라도 한문만 공부하는 까닭에 국문을 잘 아는 사람이 드묾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는 우리의 주체 의식이 부족함을 지적한 것이다. 또한 서재필의 민족 자주 사상은 민족의 대동단결(大同團結)에 의한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자주의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일찍이 그는 근대화로 전환되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뒤처지고 있는 민족의 운명을 극복하고자 갑신정변에 뛰어들었다. 귀국 후에는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했는가 하면 사대(事大)의 상징인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과정에서 민족의 단결에 의한 적극적인 독립의 자세를 역설하였다. 그는 독립협회가 창립된 이틀 후 7월 4일 독립신문의 논설을 통해, “독립이란 그 나라 국민 전체가 원하고 힘써서 세워놓지 않으면 진정한 독립이 될 수 없다. ……(중략)…… 우리 국민 일반은 우리나라 독립자주를 위해 분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민족의 독립은 그 스스로의 독립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 자립은 민족의 단결된 노력을 통해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서재필의 민족 자립 사상은 또한 부당한 외세의 침략에 대해서는 과감히 물리쳐야 함을 강조하는 한편, 국수주의적 주체성으로 나아가는 것은 지양하였다. 바람직한 문물은 받아들이고 선린의 국제관계는 적극 지향해야 한다는 방향을 갖고 있었다. 가령 1896년 5월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조선의 남북 분할과 모스크바 의정서에 의한 비밀 조약이 체결되자 독립신문에 이를 폭로하고 적극적으로 비판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의 민족자주사상은 외세에 대한 무조건적 배척만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머리 깎고 양복 입는 일이 외국으로부터 들어온 것이나 그것이 생활에 유용하고 편리하면 마땅히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하기도 했다.

서재필의 사상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구성 요소는 그의 민족주의 사상이다. 서재필이 운명을 걸었던 갑신정변에서도 근대적 사상으로서 만민의 평등한 권리를 선언하고 군주의 권한을 국민의 의사에 의해 제한하는 민주주의 사상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갑신정변 주역 중의 한 사람이었던 서재필의 민주주의 사상은 이미 갑신정변 때부터 싹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에 망명하여 터득한 가장 중요한 사상적 요소는 관리가 법대로 나라를 다스리며 법이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할 때는 법을 바꿈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의 힘이 중요하다는 인식은 그로 하여금 국민에 대한 민주주의 계몽과 교육에 역점을 두게 하였다. 독립신문 창간호 논설에서 서재필은 민주정치와 언론의 기본주장을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우리는 첫째 편벽되지 아니한고로 무슨 당에도 상관이 없고 상하귀천을 달리 대접하지 아니하고 모두 조선 사람으로만 알고 조선만 위하여 공평히 인민에게 말할 터인데 우리가 서울 백성만 위할 게 아니라 조선 전국 인민을 위해 무슨 일이든지 대언해 주려 함. 정부에서 하시는 일을 백성에게 전할 터이요, 백성의 정세를 정부에 전할 터이니 만일 백성이 정부의 일을 자세히 알고 정부에서 백성의 일을 자세히 아시면 피차에 유익한 일만 있을 터이요, 불평한 마음과 의심하는 생각이 없어질 터이옴. ……(생략)……"

 

이러한 서재필의 민주주의 사상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자각 위에서 천부 인권과 만민 평등, 그리고 민주 주권주의를 내용으로 하였다. 그의 사상은 서구의 근대적 민주주의 정치사상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이는 그가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로크(John Locke), 루소(Jean J. Rousseau), 몽테스키외(Charles Montesquieu), 제퍼슨(Thomas Jefferson) 등의 사상을 적극 보급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서재필의 민주주의 사상은 국민 주권에 관한 그의 주장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가 처음 펴낸 『독립신문』의 영문판 논설에서 “조선 인민의 이익”이니 “조선 인민에 의해서”니 “조선 인민의 조선”이니 하는 주장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민주주의의 대원칙인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의 원리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에게 있어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지 군주나 관인이 백성 위에 군림하여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정부가 백성을 말미암아 된 것이오 백성이 정부를 위하여 난 것이 아니라”고 하여 주권재민의 민주정치 사상을 분명히 천명하였다. 또한 “관인이 백성을 주인으로 생각지 아니하고” 오히려 백성들의 권리와 재산을 부당하게 수탈하고 있음을 신랄히 비판하였다.

그의 국민 주권 사상은 또한 그에 걸맞는 국민의 직분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여 권리와 의무의 균형이 이루어져야 함을 잊지 않고 있다. 또한 민주국가에서의 관리는 국민의 공복임을 역설하였고 나아가 국민의 선거에 의한 지방관 선출과 민주적 자치제도의 수립까지도 주장하였다. 독립협회를 통해 의회 설립 운동이 전개된 것도 이러한 서재필의 민주주의적 정치사상에 그 근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 질문1 서재필이 당시의 민중들에게 민족주의 사상을 일깨우기 위하여 시도했던 주요 활동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서재필이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리려 했던 주요 사상가들은 누구인가요?
  • 질문3 서재필의 주권 재민 사상이 나타나는 독립협회의 활동 내용은 무엇인가요?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시각자료

시각자료 1

1919년 4월 16일 미국 필라델피아 한인 연합 대회 시가행진 모습이다.

  • 질문1 필라델피아 한인연합대회의 개최와 관련된 내용을 신문기사 형식으로 작성하여봅시다.

시각자료 2

서재필 구미위원부 임명장이다.

  • 질문1 구미위원부 임명장을 받은 날 서재필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 일기 형식으로 적어봅시다.

시각자료 3

이승만과 서재필의 친필 서명이 있는 독립 공채이다.

  • 질문1 미국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에게 독립 공채의 구입을 호소하는 글을 작성하여봅시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모둠활동

모둠활동 1

우리나라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변화시켜야 할 일이나 제도 등을 신문 형식으로 제작하여 봅시다.

모둠활동 2
『독립신문』의 내용과 독립협회의 활동을 찾아보고 이 신문과 단체의 활동이 당시 사회에 미친 내용을 모둠별로 정리하여 발표해봅시다.
모둠활동 3
서재필은 미국에서 필라델피아 한인 연합 대회를 주도하고, 통신사, 구미위원부 등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서재필의 미국 활동을 내용별로 분류하여 모둠별로 분담하고 그 활동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조사해서 발표하여봅시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하단영역

관련사이트

주소: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천읍 독립기념관로 1 전화: 041-560-0441 팩스 : 041-560-0426 
 Copyright 2014 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