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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노동당사(북한 노동당 철원군 당사를 차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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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시에서 동두천시와 연천읍으로 이어지는 3번 국도에서 백마고지역(驛)을 지나 대마사거리에서 87번 국도로 가다 보면 노동당사 삼거리를 조금 지나면 왼쪽에 보기 흉한 모습의 빈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북한이 철원군 노동당사로 사용하던 옛 건물이다.

‘철원 노동당사’로 불리는 이 건물은 90년대 대중적인 가수로 이름을 떨친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발해를 꿈꾸며’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한 곳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또 이곳은 ‘KBS 열린음악회’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철원 노동당사는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에 있는데, 철원읍은 철원군의 중심지로, 서울과 원산을 연결하는 철도역이 있던 곳인 동시에 금강산 전철이 경원선에서 동북부로 갈라져 내금강에 이르도록 하는 곳이기도 하여 교통이나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이었다. 38도선 북쪽에 있는 철원지역은 6·25 전쟁 이전에는 북한 땅이었으나 6·25 전쟁 이후, 남한 땅이 되었다. 거꾸로 6·25 전쟁 이전 남한 땅이던 개성은 6·25 이후 북한 땅이 되었다.

6·25 전쟁 이후 철원지역은 우리 땅이 되었으나 철원읍에 말짱한 건물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되었다. 또한 철원읍 대부분이 민통선(民統線: 비무장지대 바깥 남방한계선을 경계로 남쪽 5~20㎞에 있는 민간인 통제 구역으로, 민간인 출입 통제선이라고도 부른다) 안쪽에 위치, 통제를 받게 되어 철원군청을 갈말읍 신철원리로 옮기게 되었다. 이에 갈말읍이 철원의 중심지로 발달하면서 이 지역을 신철원(新鐵原)이라고 부르고, 옛 철원군의 중심이었던 철원읍 지역은 구철원(舊鐵原)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철원읍(구철원)에는 강원도청이 있기도 할 정도로 강원도의 행정중심지이자 철원군의 중심지였다. 이곳에 세워진 노동당사는 1845년 광복 이후 6·25 전쟁 전까지 철원, 김화, 평강, 포천지역을 관리하던 북한 노동당 철원군 당사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이 노동당사는 6·25 전쟁을 거치면서 거의 파괴되고 건물 외벽만 남아 내려오고 있는데, 외벽에 남아있는 포탄 흔적 등은 전쟁 당시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거의 붕괴할 위험마저 있어 내부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보는 이에 따라 흉물스럽고 을씨년스럽기조차 한 철원 노동당사는 분단과 전쟁의 비극을 증언하는 중요한 자료로 인정되어 문화재청으로부터 2002년 5월 31일 등록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된 가운데 이를 활용한 방안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현재 안보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는 가운데 이 노동당사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철원 감리교회’와 연결하여 안보공원을 조성하자는 의견도 있다. 2013년 6월 22일에는 정전 60주년을 기념하여 이곳에서 ‘철원DMZ평화음악회’가 열려 전쟁의 상처를 치료하는 평화의 마당이 되기도 하였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3-2
현재 상태 훼손 / 전쟁 탓에 원래 모습은 파괴되고 건물 일부만 남아 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군이 항복하자 조선은 해방되었지만, 9월 2일 미국과 소련은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는 북쪽은 소련군, 남쪽은 미군이 분할 점령할 것을 발표하였다. 이미 소련군은 8월 22일 평양에 도착, 8월 말경에는 38선 이북의 모든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9월 16일 군정 실시를 발표하였다. 또 소련군은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 행정권을 북한 각 지역의 인민 위원회에 주는 간접 통치 방식을 취하면서 민족주의 세력을 탄압하는 가운데 소련군과 함께 귀국한 공산주의 세력을 밀어줌으로써 자신들에게 유리한 공산정권을 세우고자 하였다.

미군은 9월 8일 인천에 상륙하고, 9월 9일 서울에 들어와 조선 총독으로부터 항복을 받았으며, 이어 군정 실시를 선언하고 공산화 방지를 위해 민주주의 실현과 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조선 총독부의 행정 체제를 활용하고자 하였다. 미군정은 각 지역의 인민 위원회(조선 인민 공화국)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조선 총독부의 관료와 경찰을 통해 자신들을 지지할 세력들을 확대해 나가며 반공산주의 정권을 세우고자 하였다.

이렇게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 점령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독립국가 건설 문제는 소련과 미국 두 나라의 정치적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당시 38선 북쪽에 있던 철원군 지역은 소련군정의 관리 아래 들어갔다.

여하튼 미군정의 관리를 받는 남쪽은 사회주의 세력과 자본주의 세력 등 다양한 세력들 간의 갈등, 즉 1945년 12월 27일 열린 모스크바삼상회의의 신탁통치안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과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견해 차이 등으로 대립하여 상대적으로 혼란한 분위기였다. 이에 비해 소련군정의 관리를 받는 북쪽은 1945년 10월 10일 창건한 조선 노동당과 소련이 내세운 김일성을 중심으로 상대적으로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자리를 잡아갔다.

북쪽에서는 소련이 지지하는 사회주의 세력이, 남쪽에서는 미국이 지지하는 자본주의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해나가면서 남과 북은 서로 다른 이념으로 입장을 달리하는 것은 물론 서로 대립적인 분위기 속에서 남북 모두 아우르는 하나의 정부를 세우기는 점점 멀어져 갔으며, 좌우합작을 통한 남북 단일정부를 세우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은 남북 어느 쪽에서도 발붙이기 어려웠다.

마침내 남쪽에서는 1948년 5월 10일 UN 관리 아래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어 8월 15일 대한민국[한국(구별하여 남한과 북한), ROK(Republic of Korea)]이 건국되어 미군정이 폐지되었으며, 뒤이어 북쪽에서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조선(구별하여 북조선과 남조선), DPRK(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 수립되어 소련군정이 폐지되었다.

정부 수립으로 대한민국에서는 사회주의를 따르는 세력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는 자본주의를 따르는 이들의 설 자리가 좁아지거나 없어져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다. 나아가 남과 북은 각각 자신들의 이념과 체제를 단단히 하는 가운데 서로 대립하였는데, 남북 대립은 급기야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대대적인 남침으로 전쟁으로까지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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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1950년 6월 25일 대대적인 남침을 시작한 북한군은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였으며, 7월 3일에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물밀 듯이 내려왔다. 국군의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미군 제24사단이 참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차를 앞세우고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는 북한군에게 국군과 미국은 7월 16일에는 금강 방어선마저 내주고 말았으며, 7월 25일에는 영동-경북 상주-함창-예천-안동-영덕 남쪽으로 이어지는 전선이 형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주로 서부전선을 담당하고, 중부와 동부는 국군이 담당하게 되었다.

북한군의 우세한 병력과 장비에 밀려 8월 초에는 낙동강까지 후퇴한 국군과 미군은, 이제는 더는 물러날 수 없다는 각오 아래 낙동강 방어선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아 9월 중순까지 약 1개월 반 동안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쟁 상황이 역전되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허리가 잘린 북한군은 북쪽으로 후퇴하였고, 국군과 유엔군은 9월 28일 수도 서울을 되찾았으며,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차지하였으며, 10월 말에는 압록강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북한군을 돕기 위해 10월 25일 참전한 중국군의 대대적인 공격에 밀려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하게 되었고. 1951년 1월 4일 서울에서 후퇴하고 1월 5일 서울을 다시 빼앗기기조차 하였다. 그러나 평택까지 밀렸던 국군과 유엔군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3월 14일 다시 서울을 되찾고, 5월 중순경에는 38선 부근까지 올라갔다. 이후 전쟁은 큰 변화 없이 38선 부근을 중심으로 남북이 서로 밀고 밀리는 상태만 계속되었다.

이런 상황에 소련의 휴전 제안에 따라 미국과 소련 두 나라는 휴전할 것에 동의하였다. 하지만 휴전은 서로 간의 견해 차이로 금방 이루어지지 않고, 1951년 6월부터 정전회담을 시작한 지 근 2년이 지나서야 정전협정이 맺어졌다. 우리 정부는 휴전을 반대하고 정전회담에 참여하지 않기도 하였지만,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중국군 및 북한군은 비무장지대 설치,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 감독위원회 설치 등을 중요 내용으로 한 정전협정(정식 이름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사령관 및 중공 인민 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 마침내 체결되었다.

6·25 전쟁 이전 북한 땅에 속했던 철원지역은 전쟁 내내 치열한 전쟁터가 되었다. 특히 북한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나 휴전을 논의하던 기간 및 정정협정을 앞두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땅을 차지하려고 벌어진 전투에서는 엄청난 희생이 반복되었는데, 이때 보여준 국군의 애국적인 활약은 대단한 것이었다.

철원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로 철의 삼각지대를 중심으로 벌어진 전투가 유명한데, ‘철의 삼각지(Iron Triangle)’는 철원과 김화, 그리고 평강(현재 북한 지역)을 연결하는 삼각형의 지대로, 이 지역은 우리가 공격하기에는 불리하고 적이 방어하기에는 최적의 지형적 특색을 지니고 있어 미8군 사령관이던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Alward Van Fleet) 장군이 그리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 지역은 중부전선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만약 이 지역이 뚫리면 중부전선 전체가 위험에 빠지게 되는 중요한 곳이었다. 특히 이 지역은 북한군이 남침을 위한 중부전선의 본거지로 삼았던 곳으로, 나진·성진·원산항에서 보낸 군수물자와 각지에서 동원한 병력을 이 지대에 집결시킨 뒤 각 전선에 투입하였던 곳이었다.

이처럼 철의 삼각지대는 북한군과 중국군 최대의 중간 보급지대로서 교통이나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이었기에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작전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그중에서도 서로에게 전체적인 작전과 전세에 많은 영향을 끼친 전투로는 파일드라이버작전(1951년 5월 27일~6월 20일), 백마고지전투(1952년 10월 6일~15일), 저격능선전투(1952년 10월 14일~11월 24일) 등이 있다. 특히 서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벌인 백마고지전투에서는 열흘 동안 고지의 주인이 무려 24번이나 바뀌었다고 한다.

교통의 중심지이자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던 철원지역에서는 6·25 전쟁 내내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거의 폐허가 되었다. 다만,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면서 전쟁 이전에 북한에 속해 있던 철원군은 1읍 9면 가운데 지금의 철원읍, 동송읍, 갈말읍, 신서면(연천군), 묘장면, 인목면의 남반부, 북면의 유정리·홍원리, 내문면 독검리는 우리 땅이 되었고 어운면·인목면·북면·내문면의 일부는 비무장지대로 들어갔으며, 나머지만 북한 땅으로 남았다. 현재 철원군은 철원읍·동송읍·갈말읍·감화읍 4개 읍(邑)과 7개 면(面), 109개 리(里)가 있으며, 예전에 철원읍에 있었던 군청(郡廳)은 철원군 갈말읍 신철원리에 있다.

  • 질문1 철원은 6·25 전쟁 전후로 남한과 북한 가운데 누가 차지하고 있었는지 써봅시다.
  • 질문2 6·25 전쟁에서 철원을 비롯한 철의 삼각지대가 중요한 지역이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써봅시다.
  • 질문3 철원군청이 있었던 행정구역(읍) 이름을 6·25 전쟁 이전과 이후로 나눠 써봅시다.

읽기자료 2

조선노동당은(朝鮮勞動黨) 북한 정권을 세워지고서부터 지금까지 북한의 모든 영역을 장악해 오고 있는 권력의 중심 기관이자 집권당이다. 북한은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이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창건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조선공산당 서북 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가 개최된 1945년 10월 10일을 조선노동당 창건일로 공식화하여 1949년부터 사회주의 명절로 기념해 오고 있다.

북한은 1945년 10월 13일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창설하여 1946년 4월 말 북조선분국을 북조선 공산당으로 바꾸었다. 북조선공산당은 같은 해 8월 29일에는 중국에서 돌아온 조선독립동맹 계열의 조선신민당(朝鮮新民黨)과 당을 합하여 북조선 노동당이 되었다. 이후 북한 정권이 세워진 다음 해인 1949년 6월 30일 남한에 있었던 남조선 노동당과 당을 합하여 조선 노동당이 되었다.

이런 과정에 각 지역에 노동당이 세워졌으며, 당시 북한지역에 소속되어 있던 철원군에서도 노동당원들이 근무할 노동당 건물을 세우게 되었다. 철원 노동당사는 6·25 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인 1946년 초 공사를 시작하여 그해 말에 완공한 러시아식 건물이다. 당시 북한 정권은 철원지역 주민의 돈을 모르고 노력을 동원하여 3층으로 된 콘크리트 건물의 노동당사를 지었다고 한다. 당시 북한은 주민에게 ‘성금’이라는 명목으로 1개 리(里)마다 쌀 200가마에 해당하는 돈과 노동력 또는 각종 장비를 제공하도록 하여 건물을 지었는데, 특히 내부 구조물을 지을 때는 보안을 위해 열성당원만 작업에 참여시키고 열성당원이 아닌 이들은 아예 작업에 동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당사에서는 1947년 초부터 중앙으로부터 내려오는 비밀을 필요로 하는 사업과 철원지역 주민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중부지역의 대남공작(對南工作: 간첩을 파견하거나 북한을 따르는 세력을 찾아 지원하고, 남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등 북한이 남한에 대해 비밀리에 하는 모든 활동) 등의 일을 주로 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사 뒤편에 설치된 방공호에서 사람의 유골과 실탄, 철사줄 등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당시 이곳에서는 반공활동을 하던 이들이 이곳으로 잡혀 와 고문과 죽임을 당하였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이 건물은 6·25 전쟁을 거치면서 파괴되어 지금은 건물 외벽만이 보존되고 있는데, 1,850㎡의 면적에 지상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이 건물은 골조에 나타난 창의 형태를 보면 원래 3층이었음을 알 수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현재 1층은 각방 구조가 남아 있으나, 2층은 3층이 내려앉는 바람에 허물어져 골조만 남아 있어 그 형태를 알 수 없다.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1층 구조를 보면 몇 개의 방은 공간이 매우 작아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하기도 한데, 아마 1~2명이 사용하였거나 취조실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짐작하기도 한다. 그리고 검게 그을린 건물의 외벽 곳곳에는 포탄과 총탄 흔적이 남아 있어 이를 통해 전쟁 당시의 모습을 확인하기도 한다.

여기저기 상처 입은 모습으로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철원 노동당사는 분단의 비극과 전쟁의 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물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건물은 6·25의 참상을 보여주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는 가운데 예전에는 건물 안쪽까지 들어갈 수 있었으나 현재는 붕괴의 위험이 있어 내부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곳을 평화를 위한 장소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있기도 하다.

  • 질문1 철원 노동당사가 언제(연도 또는 어떤 시기) 세워졌는지 써봅시다.
  • 질문2 북한은 철원 노동당사는 세우기 위해 철원 주민에게 어떻게 하였는지 써봅시다.
  • 질문3 철원 노동당사는 주로 어떤 일을 하던 곳이었는지 써봅시다.
  • 질문4 철원 노동당사를 평화의 상징으로 이용할 방법을 찾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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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철원 노동당사 건물의 내부 모습이다.

  • 질문1 건물이 어떤 상태인지 써봅시다.
  • 질문2 건물 바깥쪽에는 곳곳이 깨져있거나 구멍이 나 있는데, 이는 무엇 때문인지 써봅시다.

시각자료 2

2013년 6월 22일 강원도에서 열린 어느 행사의 포스터이다.

  • 질문1 이 행사의 제목이 뭐라고 쓰여 있는지 확인하여 직접 써봅시다.
  • 질문2 포스터 맨 위에 ‘정전 60주년 기념행사’라고 쓰여 있는데, 그렇다면 정전은 언제 이루어졌는지 써봅시다.
  • 질문3 포스터 양쪽 모두에 같은 건물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 건물의 이름을 써봅시다.
  • 질문4 노동당사 앞에서 이런 행사가 개최된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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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철원 노동당사는 현재 어떤 상태인지 현장답사나 인터넷 등을 통해 알아보고, 이곳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다양한 활용 방안에 대해 친구들과 의견을 주고받아 봅시다.

모둠활동 2
철원 노동당사의 소유자는 대한 감리교회 유지재단이다. 그리고 노동당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철원 감리교회’가 있는데, 이곳은 6·25 당시에는 인민군 병영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기도처이던 지하실에서 많은 주민이 학살되기도 한 곳이기도 하다. 철원 감리교회에 대해 조사·정리하여 보고서로 제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철원 노동당사는 문화재청이 지정한 등록문화재 제22호이다. 등록문화재는 무엇인지 알아보고,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있는 등록문화재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조사·정리하여 보고서로 제출해 봅시다. 또한,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면 좋겠다는 문화유산을 함께 조사·정리하여 보고서로 제출해 봅시다.
모둠활동 4
자신이 사는 주변에 6·25 전쟁에 참여하신 분들이 적지 않게 계십니다. 6·25 전쟁에 참전한 분을 찾아가 그들의 경험담을 듣고 그 내용을 녹음하여 주변 친구들과 공유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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