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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삼면 농민운동지(농민들, 끊임없는 투쟁으로 땅을 되찾다.)

도입

"동지여 동지들의 슬픔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오랜 강자의 착취와 압박에 참을 수 없어 최후의 결사적 의분을 절규하고 있는 것은 그대들의 현실이 아니던가. 힘차게 싸워라! 그대들의 이상을 실현할 때까지! 세계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생명을 희생하더라도! 살기위해서는 죽음을 불사하라! 힘차게 싸워라! 정의 앞에서는 마물(魔物)은 모두 무너진다. 그대들 앞에는 지금 승리가 있을 뿐이다. 동지여 형제여!"

 

1920년대 궁삼면 농민들은 소작료 불납운동과 청원운동, 민사소송 제기 움직임 등으로 국내외 여론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국내 사회단체들로부터 만은 호응을 받기도 하였다. 조선 노농 총동맹은 중앙 집행 위원을 파견하여 진상 조사할 방침을 세웠다. 그 외에도 경성인쇄직공조합의 결의, 전북 부안군 백산면 원천소작동우회의 격려문 발송, 광주 우기노농청년회와 소작인회의 결의 등이 이어졌다. 특히 광주 우기노농청년회가 보낸 위와 같은 전문에서는 당시 사회단체들의 궁삼면 농민운동에 대한 관심의 정도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치열한 농민 운동에도 불구하고 궁삼면 토지 반환문제는 해방 후 농지개혁을 통하여야 해결되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전라남도 나주시 왕곡면 양산리 일대
현재 상태 변형 / 80년이나 소유권 투쟁의 대상이었던 궁삼면의 농지들은 그 자리에 있다.

궁삼면 농민들은 17세기 이후 영산강변의 미경지를 개간하여 소규모의 자영농 또는 소작농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말 삼정의 문란과 지방관의 횡포 등 급격한 사회변동은 이들의 지위를 위협하였다. 그리고 각 궁방과 향리들도 민유지(民有地)를 불법으로 점유하는 폐단이 잇따랐다. 지방관의 횡포와 왕실의 토지겸병에 덧붙여 궁삼면 농민들의 지위를 위협한 것은 거듭되는 자연재해였다. 1888~1889년에 있었던 이른바 ‘무자년 가뭄’이 그것이다. 궁삼면은 이미 1888년 이전에 계속되는 자연재해로 기아상태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또다시 찾아온 무자년 가뭄은 당시의 농민들이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세금을 감면해주기는커녕 미납된 세금까지 독촉하여 농민들의 생존을 위협하였다.

1890년 봄 경저리(京邸吏) 전성창(全聖暢)은 궁삼면의 미납된 세금을 거두기 위해 나주에 내려왔다. 전성창은 가뭄으로 인해 곤란을 겪는 농민들에게 토지세를 대납해 주겠다고 백지날인을 받은 후 넓은 토지를 모두 자기 앞으로 소유권을 부당하게 이전하였다. 농민들은 반발하면서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지만, 정성창은 이를 무시하고 토지를 경선궁(慶善宮)에 팔았고, 경선궁은 이를 다시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팔았다. 1910년대에 농민들은 동양척식회사를 상대로 소작료 불납운동과 법정투쟁을 전개하였지만 실패하였다. 1919년 3·1 운동과 함께 궁삼면 농민들은 토지 소유권 탈환을 위해 농민집회를 갖는 등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그 결과 1926년 조선 총독부는 일부 토지만을 무상으로 반환하였고, 궁삼면 토지 소유권 분쟁은 일단락되었다. 해방 후 궁삼면 토지 소유권 문제는 미군정의 신한 공사에서 담당했다. 농민들은 남한의 토지 개혁이 이루어지던 1950년대 이후 유상으로 토지를 되돌려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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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읽기자료 1

경저리[京邸吏 또는 경주인(京主人)]의 임무는 서울의 중앙 관아와 지방 관아와의 문서연락, 세공의 납부 등이었다. 그런데 경저리는 본래의 임무와 역할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해당 군현에서 갖가지 형태의 수탈을 일삼았다. 그 전형적인 사례가 '궁삼면'의 조세납부를 담당했던 경저리 전성창이고, 전성창의 조세 독촉으로 인해 '궁삼면'의 토지소유문제가 발생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나주군은 1888년부터 1890년 사이에 극심한 한발을 겪어야 했다. 농작물 대부분이 고사하였는데, 특히 궁삼면은 피해가 극심하여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자가 많았다. 이로 인해 궁삼면에는 사망자와 이산자의 소유지인 무망답(無亡沓)이 1,400여 두락이나 발생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급재(給災)’라 불린 구제제도가 있어, 일반 민전이 천재지변이나 불가항력의 손실을 입게 되면 감세나 면세를 해 주었다. 큰 가뭄 이후, 농민들은 나무 열매와 해변에서 주운 해초로 겨우 기아를 면하고 있는 상태로 토지세의 납부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따라서 궁삼면에 당연히 급재가 적용되어야만 했었다.

그러나 나주목사 김규식(金奎軾)은 1890년에 사망자와 떠난 자 소유지의 3년간 미납금 14,000원을 남아 있는 농민들에게 부담시켰다. 이 때 경저리 전성창이 대납 수행이라는 경저리의 임무를 맡아 '궁삼면'에 등장한다. 전성창은 경저리의 직무상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아전들을 중개인으로 삼아 "삼면은 흉년이 들어 매우 곤궁하다. 자신은 자손을 위해 덕을 쌓으려고 한다. 먼저 면민의 토지를 고가로 매수하여 경우궁(景祐宮)에 부속시키고, 대신 지금까지의 미납 세금은 전부 대납하겠다. 또한 소를 대여하고 양곡이 부족한 자에게는 곡식을 나누어주어 농사를 짓게 한 다음, 벼로 대납 세금을 변제하도록 하겠다. 유망민을 다시 되돌아오게 하여 농민의 생활을 회복시켜야한다"라고 하며 면민들에게 무망답에 대한 조세 등을 자신이 대납하는 절차를 밟는다. 그리고 전성창은 조세의 대납을 위해 소유명의를 자기에게 넘길 것을 강요했다. 결국 무망답을 자신의 명의로 삼았다.

또 전성창은 잔류농민의 전답에도 미납분을 포함한 세금 10만여 원이 발생했다고 거짓말하면서 "이러한 흉작에 납세한다는 것은 아주 곤란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납세 명령이 내려진 이상 이를 취소할 수 없다. 일시적으로 내가 대납할 테니 풍년이 되면 이를 배상해라"며, 잔류농민의 연체 세액에 대해서도 일시 대납할 것을 제안했다. 이후 전성창은 '궁삼면'에 대한 대납 계약을 맺을 때에 ‘무망답'의 문기를 사전에 불법적으로 만들었으며, 남아있는 농민의 토지까지도 은밀하게 경우궁에 넘겼다.

전성창은 남아 있는 농민의 토지가 경우궁 궁장토라며 도조로서 결 당 벼 8석을 징수하려 했다. 농민은 이미 1892년 말까지 경저리와의 대납 계약에 의거해 3년간의 대납액 등으로 3,550원과 벼 17,290석을 납부한 상태였으므로, 잔류농민과 경저리와의 대납 관계는 모두 끝난 상태였다. 잔류농민은 1894년에 나주군수 민종렬(閔種烈)에게 경저리의 불법적인 도조 징수에 선처해 줄 것을 탄원한다. 그러자 군수는 경우궁에 투탁 여부를 조회하였다. 경우궁 측에서 “나주, 지죽, 상곡, 욱곡, 삼면의 논은 전성창이 궁장의 예에 따라 잡비를 제외하고 스스로 원하여 우리 궁으로 가져왔기 때문에 경우궁은 어떠한 사정이 있는지 그 내용을 몰라, 강진군 병영 병사로 하여금 세금을 거두어들이라고 명한 적이 있다. 또 이전에 출장한 전대현(全臺鉉)이 궁장토에 속한다며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어들여 궁삼면 인민이 극심한 곤란에 빠졌다는 소리를 들어 불안감을 느껴 이후 궁삼면 토지에 관해서는 전혀 관계없다”는 회답을 보내오자, 군수는 잔류 농민에게 조세를 직접 납부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무망답'에 대해서는 토지 대금으로 3년간의 미납세금을 전액 군청에 납부하는 형태로 군청으로부터 매수하여 이후 농민의 공유지로 삼았다.

그러나 전성창은 1895년 7월에 다시 나타나 여러 가지 이유로 농민들을 수탈하였다. 전성창이 다시 수탈하는 것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1895년 9월에 이용백(李鎔伯)을 농민대표로 선출하여 전성창의 도조 징수의 부당성을 내부(內部)와 법부(法部)에 제소한다. 고등재판소는 1897년 5월 18일 전성창이 농민들에게 배상할 것으로 판결하였다. 고등재판소는 전성창이 "여러 농민의 토지를 빼앗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는 판결을 내려 궁삼면의 토지가 정당한 백성들의 소유인 것을 인정하고, 그간의 착취물의 반환을 명령했다. 농민은 '고등재판소에서 면민이 승소하여 백성들 소유의 토지임이 확정되었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이 판결은 이후 농민들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게 한 법률적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전성창은 고등 재판소의 판결로 궁삼면 토지 소유권을 더 이상 주장할 수 없게 되자, 1898년에는 1888년 당시 미납 세금 대납의 조건으로 궁삼면 농민들에게 받았던 토지 문전을 이용해 궁삼면 토지가 경선궁(慶善宮)토지라고 억지 주장을 펴기 시작하였다(경선궁은 1897년 순빈 엄씨의 궁으로 설립되었다). 전성창은 엄비의 사촌인 광주 관찰부 주사 김영규와 짜고 경선궁이 궁삼면 토지를 매수한 것처럼 위조하였던 것이다. 이에 농민들은 다시 소송을 결의하고 경성에 올라갔으나 김영규의 형이었던 궁내부 경무관 김영진이 이들을 체포하고 농민대표들에게 궁삼면 토지가 경선궁 소유라는 문건에 강제 날인하도록 하였다.

  • 질문1 궁삼면 농민들이 매우 궁핍하게 된 첫 번째 원인은 무엇인가요?
  • 질문2 경저리 전성창이 농민들 소유의 토지를 침탈하는 경위를 말해보시오.
  • 질문3 수탈된 궁삼면의 토지가 민유지임을 입증하는 근거가 되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 질문4 정성창이 탈취한 궁삼면 토지가 경선궁으로 넘어가게 된 경위를 설명해보시오.

읽기자료 2

동양척식회사(이하 동척)의 토지 매수는 설립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동척은 "한국의 전답은 가격이 저렴하므로 해변 매립 등 개척 사업에 착수하는 것보다도 이미 개간된 땅을 매수하는 것이 두 배 이상의 이득이 있다"는 판단 아래, 개척·개간보다는 비옥한 경지를 획득하는 것으로 토지매수 방침을 정했다. 최초 매수 대상지가 '궁삼면'의 전답이었다. 동척이 궁삼면의 토지에 주목한 이유는 "전라남도는 기후 풍토 및 경작상태로 볼 때 일본인 이민을 수용할 여유가 많고 모범적 농촌을 경영하는 데 가장 적절한 위치에 있다.……(중략)…… 이 토지 근방에는 일본인이 천명 이상 거주하고, 앞으로도 더 많이 유입될 수 있다. 또 앞으로 호남 철도가 개통되면 철도의 연선으로서 전도가 유망한 땅이다"라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다. 동척은 바로 토지 매수반을 궁삼면에 보냈다.

토지 매수반은 경선궁의 감무인 순빈 엄씨 서거 이후의 대리인인 엄주익(嚴柱益)에게 토지 매각을 신청하였다. 엄주익은 "이 토지는 면민과의 계쟁지이어서 매각하기 어렵다"며, 토지 매각을 거절하였다. 이 '계쟁'이란 농민대표 최기림(崔基林)이 1909년 7월 '궁삼면'이 경선궁에 다시 환부되기 직전에 궁감인 김영진에게 전답의 반환을 요구했던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동척은 엄주익에게 “궁삼면 토지로 인해 나중에 면민과의 소송 등이 일어나 폐사가 패소하더라도 손해를 폐사에서 부담하고 귀하에게 어떠한 손실을 끼치지 않겠다”는 보증문서를 교부하고, 은밀하게 토지매수 작업에 착수하였다. 즉 동척은 보증 문서를 교부하여 불법 매수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였으며, 이로 인해 나중에 소송이 제기될 것이라는 사실도 이미 예상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토지 매수를 강행한 것은 농민의 토지 소유권을 무시하고 강압적으로 토지를 탈취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척과 경선궁과의 토지 매매의 구체적인 경과는 다음과 같다. 경선궁은 동척과의 사전협의를 한 뒤 농민대표의 토지 반환 요구에 대해, “궁삼면에서 3년 동안 매년 천석의 벼를 상납하면 토지를 반환하겠다. 반환할 때는 궁삼면의 서류가 나주에 있으므로 도지부 관리를 출장시켜 면민에게 건네주겠다”며, 토지 반환의 요구에 응할 듯한 태도를 보였다. 경선궁은 나주 군청에 도지부 촉탁원을 파견하여 상곡면의 이길룡(李吉龍)이라는 사람에게 토지 관계서류를 인도함으로써 토지 반환 수속을 밟게 하였다. 그러나 이길룡이라는 사람이 바로 토지매수반의 반장이었다. 이길룡은 군청에서 받은 서류의 사본을 곧바로 동척에 송부하고, 1909년 12월 10일 경선궁과의 토지매매 계약을 체결하였다.

동척의 궁삼면 토지집적은 동척의 보증문서의 교부에서도 잘 나타나 있듯이, 농민 소유의 토지를 불법적으로 매수한 것이었고, 또 경선궁은 농민의 저항 때문에 시가 200만원에 상당하는 토지를 8만원이라는 헐값에 매각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다. 매수면적 중에는 기존의 경선궁장토와는 관계없는 토지도 포함되는 등 동척의 토지 매수는 약탈 그 자체였다.

궁삼면의 토지를 매수한 직후, 동척은 영산포 이창동(二倉洞)에 동척 출장소를 설치하고 "이번에 경선궁으로부터 궁삼면 토지를 매수하였다"며, 농민에게 매매 계약의 승인과 소작 계약에 응하도록 설득하였다. 원래 경선궁장토가 아닌 토지를 불법적으로 매수한 것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농민의 승인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농민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교중성(大橋重省)은 “전답의 대금은 궁삼면 인민에게 지불하겠다. 당장 상경하여 궁감에게 이런 뜻을 전하고, 또 광주의 관찰사 신응희(申應熙)도 상경하여 토지대금은 면민에게 지불하도록 하겠다”며, 완화책으로 1910년도 소작계약을 체결할 때 농민에게 토지대금을 지불하겠다고 제안하였다.

또 동척은 토지매매대금의 지불 이외에 각종 관개시설의 정비와 학교설치 등을 조건으로 내세워 궁삼면의 면장 등에게 토지매매 계약서에 날인하도록 종용하였다. 그러나 농민은 '동척이 어떠한 위로책을 강구해도 토지를 환부할 의사가 없으므로 이에 응할 수 없다'며, 한 사람도 날인하지 않았다. 그러자 동척은 지죽면의 염자옥(廉子玉), 이화익(李化益), 김운서(金雲瑞), 상곡면의 장홍술(張弘述) 등 4명을 경찰서로 연행하여 태형 90대 등 가혹한 형벌을 가하여 토지매매 계약서에 강제로 날인시켰다. 동척은 1910년 9월 23일 '토지 가옥 증명 규칙'에 의거해 나주 군수와 목포이사관의 사증을 받아 '궁삼면'에 대한 소유권을 취득하고 인증 수속을 완료하였다.

  • 질문1 동양척식회사가 개척 사업에 착수하기 보다는 개간지를 매입하는 방법을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동양척식회사가 설립되고 최초로 매입한 토지는 어디인가요?
  • 질문3 많은 농민들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궁삼면 토지가 불법적으로 동양척식회사에 넘어가게 된 과정을 말해보시오.

읽기자료 3

동척은 불법적으로 궁삼면 토지를 매입한 후 1911년 궁삼면 일대의 토지에 ‘동척회사소유(東拓會社所有)’라는 표지판을 세웠다. 그러나 궁삼면 농민들은 동척의 불법적 토지 매입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동척의 처사에 목숨을 걸고 저항하였다. 당시 동척과 일본인 지주의 무리한 토지 매입에 대해서 일본 총독까지도 우려를 표명할 정도였다.

1912년 초 궁삼면 농민들은 나주군수와 도장관 등에게 궁삼면 토지의 소작권을 돌려 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농민들은 청원운동의 한계를 실감하고 1912년에는 궁삼면 농민 1,493명의 이름으로 소지소유권 확인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광주지방법원은 동척과 궁삼면 농민 어느 쪽의 입장에 대하여 모두 각하하는 판결을 내렸다. 농민들은 1912년 12월 다시 광주지방법원에 ‘소지소유권 확인 겸 인도청구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 소송에서 재판부는 다시 동척의 주장과 농민들의 주장을 각각 기각하였으나 실제로는 동척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동척은 사원과 헌병 등을 동원하여 소작료를 강제 징수하였다. 궁삼면 농민들은 동척과 법정투쟁을 하는 과정에서도 소작료 불납 운동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궁삼면 농민들의 토지 탈환 운동은 1915년 말부터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일시적 소강국면을 맞게 되었다.

3·1 운동을 계기로 소강국면에 있던 궁삼면 토지소유권 분쟁은 다시 시작되었다. 1919년 9월 궁삼면 농민들은 농민 대표 4명을 동척 본사에 보내 토지의 원가 반환을 실행하든지 해당 토지의 절반을 무상분배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하여 동척은 농민들이 만족할 수 없는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그러자 1919년 11월 궁삼면 농민 200여 명이 영산포 시장에서 농민집회를 개최하고 토지의 무상반환을 요구하였다. 농민들은 ‘동척 창고에 폭탄을 던지자’는 내용의 유인물을 뿌리면서 소작료 불납 운동을 병행하였다. 이렇듯 농민들이 토지 소유권 분쟁을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은 3·1 만세 시위를 통해 농민들이 일제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한 결과였을 것이다.

1920년대에 들어서도 농민들의 항쟁을 계속되었으며, 1925년 후반에는 보다 조직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여 갔다. 1925년 10월에 접어들어, 궁삼면 문제에 대한 국내외적인 관심이 집중되면서 궁삼면 농민들은 보다 조직적인 활동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러한 농민들의 인식은 곧 궁삼면 농민회 및 토지회수운동동맹의 조직 결성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궁삼면 농민들은 소작료불납동맹 등을 통해서도 소지소유권 주장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동척을 상대로 한 궁삼면 농민들의 저항은 국내외 여론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결과 총독부를 비롯한 일제 당국은 1926년 조정안을 제시하게 되었다. 이로써 궁삼면 농민들은 제한적이지만 일부를 무상반환 받게 되었다. 1926년 동척이 제시한 조정안은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조치에 불과하였지만 토지소유권 분쟁을 일시적으로 소강 국면에 접어들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930년대는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쌀값이 폭등하는 등 경제적 여건이 1920년대에 비해 악화되었다. 경제적 악화는 농가부채를 더욱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잦은 자연재해 역시 궁삼면 농민들의 생활을 힘들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1930년대 말 전시체제로 일제는 물적·인적 수탈을 더욱 가속화하였다. 이러한 1930년대의 전반적인 상황은 궁삼면 농민들의 생활과 토지탈환운동을 침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기 농민회가 재건되고 궁삼면 농지탈환운동이 다시 이어졌다. 미군정은 1945년 9월 25일 미군정 법령 제2호 「패전국 소속 재산의 동결 및 이전제한의 건」을 제정하였다. 궁삼면 통지 역시 ‘동척 소유의 농지’로 되어 있었으므로 법령 제2호의 대상이 되었다. 미군정이 궁삼면 농지를 적산(敵産)으로 규정하자 궁삼면 농민들은 농민집회를 개최하는 등 강하게 반발하였다. 그러나 궁삼면의 농지 소유권 분쟁은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한 후 이루어진 농지 개혁으로 그 해결을 보게 되었다.

  • 질문1 궁삼면 농민들이 벌였던 토지 반환 운동이 1910년대와 1920년대 중반 이후의 모습이 어떻게 다른가요?
  • 질문2 3·1 운동은 궁삼면 농민운동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 질문3 1930년대 이후 궁삼면 농민운동이 그 이전에 비하여 침체되었던 요인은 무엇인가요?
  • 질문4 궁삼면 농지 소유권 분쟁이 완전히 해결된 것은 언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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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1925년 11월 2일 자『동아일보』 관련 기사(왼쪽)와 1930년 8월 23일자 『중외일보』 관련 기사(오른쪽)

 

다음은 궁삼면 토지회수 운동과 관련된 신문 기사이다.

  • 질문1 신문의 기사를 확인하여 1920년대와 1930년대 궁삼면 농민운동의 양상을 비교하여 봅시다.
  • 질문2 농민들의 토지회수 운동에 대하여 일제는 어떻게 대처하였을까요?

시각자료 2

다음은 나주시 왕곡면 양산리에 세워진 ‘나주궁삼면항일농민운동기념비’이다.

  • 질문1 일제와 맞서 싸운 농민들의 고충은 무엇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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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자신들의 토지를 강탈당한 궁삼면 농민들의 입장을 일기 형식으로 써서 발표해봅시다.

모둠활동 2
궁삼면 농민들이 80여 년 동안 어떠한 강압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하여 토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는지 모둠을 나누어 토론하고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나주 궁삼면 외에 일제강점기에 전개되었던 농민운동을 모둠별로 나누어 조사하여 서로 다른 곳에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농민운동들이 갖는 공통점을 이야기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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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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