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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락리 전투지(동락리 전투에서 국군이 승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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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충주시 신니면 문락리 동락초등학교(6·25 전쟁 당시 충북 중원군 신니면 문락리 동락국민학교) 정문으로 반듯이 들어가면 기와지붕에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을 만나게 된다. 이 건물이 김재옥여교사기념관(金在玉女敎師紀念館)인데, 보통 김재옥교사기념관으로 부르기도 한다.

동락초등학교 일대에서는 1950년 7월 7일 국군 제6사단 7연대 제2대대와 제3대대가 북한군 제15사단 제48연대와 전투를 벌여 크게 승리하였는데, 6·25 전쟁이 시작된 이래 북한군에게 패하며 후퇴만 하던 국군에게 이곳에서의 승리는 최초의 승리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이곳 전투에서 국군이 승리하는 데에는 동락초등학교에 근무하던 김재옥 교사의 도움이 있었다. 남쪽으로 계속 밀고 내려오던 북한군 제48연대가 중무장한 채 동락초등학교 운동장에 머물고 있을 때, 김재옥 교사는“국군이 멀리 후퇴하였다”며 북한군을 안심시킨 후 4Km나 떨어진 곳에 있던 국군 제7연대 2대대장에게 이 사실을 전해주었다. 북한군의 방어가 허술할 때를 ‘절호의 기회’로 판단한 대대장은 적이 도망갈 길을 막으면서 동락 마을 주변으로 이동, 기습 공격을 하였다. 김재옥 교사의 말을 믿고 느긋하게 있던 북한군은 갑작스러운 국군의 공격에 놀라는 가운데 쉽게 무너졌으며, 도망가던 자들도 미리 길목을 지키고 있던 국군에게 사살되었다. 그 결과 북한군 사살 1,000여 명, 포로 97명, 소총 2,000여 정 등을 빼앗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를 보통 ‘동락리 전투’라 부르고 있다(행정구역상으로는 동락리가 아니라 문락리. 따라서 동락리 전투가 아니라 ‘동락전투’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렇게 6·25 전쟁 당시 국군을 도와 북한군을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운 김재옥 교사의 나라 사랑과 충성심을 기리고,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조국 수호와 자유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길러 통일을 이루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에 동락 전승지이며 김재옥 교사가 근무하였던 동락초등학교 교정에 김재옥교사기념관을 세웠다. 기념관은 충주보훈지청의 지원으로 1988년 9월 5일 공사를 시작하여 1989년 5월 16일 건물을 지었으며, 그 후 전시실을 정비하여 1990년 7월 7일 동락리 전승 기념일에 문을 열었다.

또한, 동락초등학교 안에는 김재옥교사기념관 이외에 1968년에 세운 김재옥교사 현충탑이 있으며(1978년 석조물로 다시 세움), 2000년에 세운 6·25참전기념비 등이 함께 있다. 그리고 동락초등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건너편 산으로 올라가는 곳(충북 충주시 신니면 대화리 산1)에는 동락리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1973년에 세운 전승비(동락전승비)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전쟁 당시 북한군 대포들이 있던 곳을 명중시킨 국군이 81밀리 박격포를 쏘던 장소이기도 하다.

현재 이들 시설물은 우리 국민 모두에게 민족 분단의 아픈 역사를 증언하는 역사적 유적지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충주교육지원청의 지원으로 매년 6월에 충주시 관내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통일대비교실’을 동락초등학교에서 실시하여 통일을 향한 힘찬 발걸음을 준비하는 통일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매년 7월 7일 동락초등학교 교정에서는 (사)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충북도지부 주관으로 ‘6·25 전쟁 첫 전승 기념행사 및 안보결의대회’가 열리고 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문락리 동락초등학교 일대
현재 상태 변형 / 동락초등학교는 그 당시 위치와 변함이 없으나, 도로가 포장되었고 초등학교 건물이 새로 지어졌다.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시작한 북한군은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에 진입하였으며, 6월 30일에는 한강을 건너고자 하였다. 국군이 후퇴하면서 미리 파괴한 한강다리를 복구하는 등 갖은 방법으로 7월 3일 새벽에는 부분 복구된 철교 등을 이용해 북한군 전차 4대가 한강을 건넜다. 이어서 뒤따른 병력을 영등포 방면으로 돌아가게 하고, 열차를 이용해 13대의 전차와 병력을 한강 남쪽 기슭으로 진출시킴으로써 한강 이남의 노량진과 영등포 일대를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7월 3일, 북한군의 전차와 주력부대가 한강 남쪽 기슭에 출현하자 국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으며, 물밀 듯이 내려오는 북한군의 공격에 국군은 부대별로 흩어져 일부는 안양으로, 일부는 과천으로 철수하였으며, 다시 수원으로 후퇴하였다. 국군은 미군이 지원해줄 시간을 벌기 위해 현재의 전선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최대한 늦추기로 하면서 7월 4일에는 시흥지구전투사령부가 평택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그 시기에 미 제24사단의 선두부대인 스미스부대(Task Force Smith)가 평택에 도착하였으며, 국군은 7월 4일에 평택-제천-울진을 연결하는 선에서 유엔군과 연합전선을 세울 수 있었다. 국군이 남쪽으로 후퇴하는 동안에 스미스부대를 시작으로 한국에 상륙(7월 1일 부산 상륙)한 미 제24사단은 경부국도에서 국군과 교대하는 형식으로 투입됨으로써, 그 후 자연스럽게 서부전선은 미군이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도 북한군의 거센 돌풍을 맞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7월 5일 미 제24사단 스미스부대가 오산전투에 직접 투입된 후부터 국군은 전선의 중·동부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수도사단 및 제1·제2사단은 중부전선의 서부지역을 담당하고, 제6·제8사단은 중부전선의 동부지역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동해안은 제3사단이 담당하였다.

국군의 작전개념은 서부전선의 미군과 함께 적의 남하 속도를 최대한 늦추는 데 중점을 두었다. 만일 중부지역에서 북한군을 막아내지 못할 경우, 가깝게는 대전을 포함한 경부선의 동쪽이 뚫리게 되고, 멀게는 부산을 향해 공격할 길을 열어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국군 제6사단 제7연대는 경기 여주-장호원 도로를 따라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하여 충북 음성군 북방에 진출하였으며, 7월 5일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하여 무극리(충북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를 향해 출동하였다. 이처럼 북한군의 남하를 막아내고 늦추기 위한 국군의 필사적인 노력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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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1950년 7월 4일부터 7월 10일까지 충북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 일대에서는 남하하는 북한군을 맞아 이들을 저지하려는 국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충주에 집결 중이던 국군 제6사단 제7연대는 적의 남하를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즉각 제3대대와 수색중대를 경기도 장호원으로 급히 보내 적의 진출을 막는 동시에 제1대대와 제2대를 충북 음성군 북쪽으로 이동시켰다. 제1대대는 7월 5일 6시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하여 무극리를 향해 출동하였다.

제1대대 정찰대는 소여리(당시 주소로는 충북 음성군 군내면, 현재 주소로는 충북 음성군 음성읍)를 지나 기름고개(감우재)에 접어들면서 1개 중대 규모의 북한군을 발견하고 집중사격을 하여 40명을 사살하였다. 3시간이 지난 후 국군 제1대대의 중심 병력이 기름고개 꼭대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북한군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이 보현산(1,124m.동쪽의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포격하면서 국군 제1대대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국군 제1대대와 제2대대는 밤을 이용하여 보현산 북쪽 끝의 376고지와 385고지를 점령하였다.

7월 6일과 7일에도 국군 제7연대 제1대대와 2대대는 지난 밤사이 적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불규칙적으로 사격을 계속하는 가운데 제1대대가 보현산 북쪽 끝 부분의 376고지를, 제2대대가 385고지를 각각 확보하여 다음 공격을 위한 발판을 굳히고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7월 6일 새벽, 미리 약속한 신호에 따라 제1대대와 제2대대 및 제2포병중대는 각종 화기의 화력을 일제히 보현산으로 집중시켰다. 이에 적도 385고지에서 맞대응하기도 하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국군의 공격에 더는 버티지 못하고 후퇴하면서 346고지 방향으로 도망가 버렸다.

이렇게 공격을 시작한 지 1시간도 못되어 보현산을 점령한 제1대대는 계속 제2대대와 제2포병중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도망가는 적을 쫓아 무찔렀다. 드디어 7월 6일 오전 12시에 무극리를 점령하였으며, 오후 2시에는 음성군 생극면 병암리, 즉 무극리 북쪽 2km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도망가던 적이 부대를 증원하여 1개 연대 규모의 병력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공격해오자 제7연대는 무극리를 포기하고 부용산과 무극리 남쪽 3km 방향의 백야리 351고지에 진지를 세우고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7월 8일, 국군 제6사단 제7연대는 서부에서 이동해 온 국군 제1사단 제11연대에게 진지를 넘겨주고 충북 음성군 원남면 보천리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북한군 15사단 병력이 남하해 오자 국군 제1사단 제11연대는 감우재에서 적 1개 중대를 무너뜨리고, 또다시 공격해 오는 2개 중대도 무찔렀다. 7월 9일에는 북한군 1개 대대 병력이 또다시 공격해 오자 제11연대 제2대대가 감우재에서 적을 무찔렀다.

이렇게 국군은 감우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둠으로써 북한군의 침공을 막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감우재 전투는 6·25 전쟁이 일어난 이후 국군이 승리를 거둔 최초의 전투로(7월 7일 동락리 전투에서의 승리를 최초로 보기도 한다), 북한군의 남하를 늦추고 낙동강 방어선을 만들 시간적 여유를 벌 수 있게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국군과 국민들에게 승리에 대한 신념을 불어넣어 주었다.

  • 질문1 무극리 전투에서 북한군을 크게 저지하였던 부대는 제 몇 사단 소속의 부대였는지 써봅시다
  • 질문2 감우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부대는 제 몇 사단에 소속된 부대였는지 써봅시다.
  • 질문3 감우재 전투에서는 국군이 큰 승리를 거두었다. 감우재 전투가 갖는 의미를 써봅시다.

읽기자료 2

미군이 전투에 함께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군과 미군은 북한군에 계속 밀려 후퇴를 하였다. 특히 죽미령 전투에서의 패배로 미군은 작전 실행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중부전선과 동부전선을 담당했던 국군 제6사단과 8사단도 거듭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 후퇴하는 상황에서 국군 제6사단 제7연대는 장호원에서 충북 음성군 방향으로 남하하는 북한군 제15사단을 반드시 막으라는 명령을 받고, 음성군으로 이동하여 북한군을 막아낼 준비를 하였다.

1950년 7월 5일 동락리(문락리 동락 마을)에서 생극 방향으로 공격하던 제7연대 3대대는 북한군의 대규모 부대가 나타나자 대대가 포위될 것을 우려하여 연대장의 승인 없이 밤에 차를 이용하여 음성 부근으로 철수하였다. 동락리 주민이 보기에는 국군이 차량을 타고 멀리 철수하는 것처럼 보였다. 3대대가 임의로 철수함에 따라 생극-동락리-신양리 방향은 방어부대가 없는 열린 통로가 되어버렸다.

3대대의 철수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연대장은 7월 6일 오후 3대대가 있는 곳을 찾아가 꾸지람과 함께 적을 다시 공격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제3대대는 밤을 이용하여 철수하였던 동락리 방향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정찰대의 활동으로 북한군 일부가 이미 동락리를 지나 신덕저수지에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제3대대장은 제9중대장 정재갑 중위에게 저수지 옆의 적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제10중대와 제11중대에게는 가엽산의 310고지로 이동하도록 하였다. 제9중대는 도로(3번 국도)에 적의 차량대열이 나타나자 선두를 공격하였다. 북한군은 소규모의 국군이 저항한다고 판단하였는지 차에 탄 채 기다리고 있었다. 제3대대의 제10중대와 제11중대가 310고지에 도착하여 함께 공격하자 북한군은 크게 당황하여 북쪽 411고지와 덕고개 방향으로 도주하였지만, 큰 손실을 입었다.

한편, 국군 제7연대 제2대대는 제1대대와 함께 무극리를 공격하였다가 제1대대가 장갑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역습을 받자 백야리로 철수한 까닭으로 연대의 명령에 따라 무극리 뒤쪽의 644고지(부용산)로 철수하여 부용산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이때는 북한군 제15사단 제48연대 주력부대는 동락초등학교 운동장에 머물고 있을 때였는데, 동락초등학교 김재옥 교사(당시 19세)는 거짓으로 “국군이 모두 후퇴하였다”며 북한군을 안심시킨 후 빠져나와 4Km나 떨어진 이곳 부용산에 있던 국군 제7연대 2대대를 만나 적의 상황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7월 6일 15시경부터 부용산을 지키고 있던 제7연대 2대대는 7월 7일 새벽 5시경 동락리 방향에서 들려오는 포 소리와 함께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 3대대가 북한군과 싸우는 것으로 판단한 제2대대장 김종수 소령이 확인해 본 결과 동락리 앞 도로에 수십 대의 차량이 북한군을 가득 태운 채 정지해 있는 것은 물론 동락초등학교 운동장에 차량과 포가 포진한 채 경비가 허술한 것을 확인하였다. 당시 북한군은 “국군이 차를 타고 후퇴하였다(멀리 후퇴하였다).”는 동락리 주민의 말과 “국군이 모두 철수했다.”는 김재옥 교사의 말을 믿고 안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군 제2대대의 임무는 부용산을 방어하며 지키는 것이었지만, 이때가 적을 무찌를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라 생각한 대대장 김종수 소령은 7월 7일 17시를 공격시간으로 정하고, 적이 후퇴할 길을 막는 것과 함께 제6중대와 제7중대를 공격지점으로 이동 배치하였다.

17시가 되자, 국군 제2대대 제6중대가 먼저 적에게 집중 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옆 방향에서 갑자기 나타난 국군 제2대대의 공격을 받자 이에 놀란 적들은 서둘러 반격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쌍안경으로 당시 전투상황을 지켜보던 김종수 소령은 박격포 반장인 신용관 중위로 하여금 81mm 박격포 제1탄을 쏘도록 하였는데(현 전승비가 있는 곳), 이 포탄이 운동장에 배치되어 있던 적의 포진지 중앙에 정확하게 명중함으로써 북한군은 순식간에 무너져 도망가기 바빴다. 도망가던 북한군은 이미 기다리고 있던 국군에게 사살되거나 생포되었다. 일부 북한군은 산속으로 도망가기도 하였지만, 7월 8일에 이루어진 국군의 소탕작전으로 완전히 물리치는 큰 성과를 올렸다.

동락리 전투에서 북한군 전사자는 1,000여 명, 포로는 97명이었으며, 각종 차량 80여 대와 장갑차 10대, 소총 등 2,000여 개, 122㎜ 박격포 6개 등 각종 무기를 빼앗았다. 이는 6·25 전쟁이 시작 이후 국군이 거둔 최대의 전과이자 첫 번째 승리였다(감우재 전투를 첫 승리로 보기도 하며, 동락리 전투를 무극리 전투에 포함하여 보기도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결과에 크게 기뻐하며 제7연대 전 장병에게 1계급씩 특진시켰으며, 이것은 국군이 창설된 이후 최초의 사건이었다. 동락리 전투 당시 빼앗은 무기에는 소련제품이라는 표시가 있어 이것을 유엔총회로 보내 소련이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에 대한 증거로 삼기도 하였다.

  • 질문1 동락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국군은 제7연대 몇 대대와 몇 대대인지 써봅시다.
  • 질문2 동락리 전투에서 크게 패한 북한군은 제 몇 사단 몇 연대며, 패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지 써봅시다.
  • 질문3 동락리 전투에서 국군이 승리하는 데 도움을 준 이들은 누구이며, 이들은 북한군에게 국군의 상황을 어떻게 말했는지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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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1950년 7월 6일과 7일 사이에 벌어진 동락리 전투와 관련 있는 전투도이다.

  • 질문1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표시된 부대는 각각 어느 쪽 군대를 나타내는지 써봅시다.
  • 질문2 동락리 전투에서 승리하는데 큰 공을 세운 국군 제7연대 2대대와 3대대를 지도에서 찾아 표시해 봅시다.
  • 질문3 동락리 전투에서 크게 패한 북한군 제48연대를 지도에서 찾아 표시해 봅시다.
  • 질문4 4km나 달려온 김재옥 교사로부터 적의 상황을 알게 된, 당시 644고지(부용산)에 있던 국군은 몇 연대 몇 대대였는지 찾아 써봅시다.

시각자료 2

1950년 7월 4일부터 7월 10일까지 벌어진 충북 음성 무극리지구 전투 당시의 작전 모습이다.

  • 질문1 지도에서 무극리, 기름고개(감우재), 동락리(문락리 동락 마을)를 찾아 표시해봅시다.
  • 질문2 무극리와 감우재를 포함한 음성 방향으로 공격해온 북한군은 15사단 병력이라고 한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을 지도에서 찾아 표시해 봅시다.
  • 질문3 둥락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국군은 제6사단 7연대의 몇 대대와 몇 대대였는지 찾아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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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무극전적관광지(충북 음성군 음성읍 소여리 감우재)나 동락초등학교를 찾아가 그곳에 있는 6·25 전쟁과 관련된 각종 기념비나 기념탑 등을 조사하여 보고서로 제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6·25 전쟁이 일어난 이후 우리 국군이 최초로 승리한 전투에 대해 어느 곳에서는 동락리 전투라고 설명하고, 또 어디에서는 감우재 전투라고 설명하기도 한다(경북 상주시 화서면 화령장전적지가 최초 승리한 곳이라는 주장도 있다). 감우재 전투와 동락리 전투 가운데 어느 전투가 처음으로 승리한 전투인지, 어째서 첫 승리에 대해 서로 다른 주장이 있는지에 대해 조사해 보고 비교·정리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동락리 전투의 승리에 도움을 주었던 김재옥 교사의 활동상은 1966년 국방부에서는 김재옥 교사의 빛나는 반공정신을 널리 알려 그를 찬양하기 위해 ‘전쟁과 여교사’라는 영화를 제작하여 전국에 상영하기도 하였으며, 『전쟁과 여교사』라는 책으로 출판되어 초등학교 반공교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책과 영화는 한 개인을 너무 영웅화시켰다는 지적이 있기도 하다. 이런 지적에 찬성하는 입장과 반대하는 입장 두 모둠으로 나눠 서로의 견해를 주장하며 토론해 봅시다.
모둠활동 4
자신이 사는 주변에 6·25 전쟁에 참여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6·25 전쟁에 직접 참여한 분을 찾아가 그들의 경험담을 듣고 그 내용을 녹음하여 제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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