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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광주학생운동 시위지(항일독립운동의 횃불로 우뚝 선 광주지역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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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지에 한 글자도 쓰지 말자”, “연필도 잡지 말자”, “백지 그대로 두 고 운동장으로 나가자”, “그 다음에는 일주일동안 교실로 들어가지 말고 시험을 거부하자”, “시험 기간 동안 운동장에 모여 구속 학생들이 석방될 때까지 시험을 거부하자"

 

백지동맹은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발발하고 많은 학생들이 구속되자 구속된 학우들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기 위해 중간고사를 백지로 제출할 것을 결의한 사건이다. 이 모임은 광주전지역 학교대표들의 모의에 의해 전단을 공동으로 작성하고 각 학교에 퍼트린 조 직적인 활동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여학생들로는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이하 광주여고보)가 유일하게 백지동맹에 참여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광주여고보 여학생들은 일주일간 시험거부를 지속하였다. 당시 이 학교의 3학년 대표 최순덕은 같은 학교 여학생들 몇몇과 함께 구속된 같은 학교 학생들의 석 방을 요구하는 내용의 격문을 작성하여 전 교실에 뿌리고 다니며 백지동맹 참여를 외쳤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광주광역시 동구 장동 39-12 전남여자고등학교
현재 상태 변형/ 1928년 완공된 건물이 현재 남아 있어 기념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전국 194개교에서 5만 4,000여 명의 학생이 참가한 거국적인 항일 운동으로, 3·1운동, 6·10 만세 운동과 함께 일제강점기 3대 민족운동의 하나로 일컬어져왔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일제의 폭압적인 지배와 왜곡된 식민지 교육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던 학생운동의 성장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3·1운동 이후 외형상 교육의 기회는 늘어난 것처럼 보였지만 고등교육은 극히 제한되어 있어 조선인 학생들은 항상 입학난을 겪어야 했다. 교육 내용 역시 실업교육과 일본어, 일복역사 교육이 주가 되어 충실한 일본의 황국신민을 양성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은 항상 권위주의적으로 학생들 위에 군림하였으며 학생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 자치활동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이러한 식민지 차별교육에 대해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학생들이 불만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욱이 식민지 사회의 사회경제적 피폐상은 학생들로 하여금 단순히 교육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일제 식민통치의 모순을 전체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교육적 차별과 식민지배의 모순을 극복하기위해, 나아가 민족의 해방을 위해 학생 단체를 조직하거나 동맹휴학 등을 강행하면서 학생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학생층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상대적으로 선진적인 지식층들이었으며 노동자, 농민 등 다른 사회계층보다 조직화되기 쉬웠기 때문에 항상 민족운동의 전면에서 활동하였다. 최초의 전국적인 학생단체인 ‘조선학생대회’가 1920년 조직된 이후 여러 학생단체가 조직되었다. 또한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어 조직화된 학생 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20년대 학생운동의 대표적인 형태는 동맹휴학이었다. 동맹휴학은 1920년대 전반기에는 서울과 그 인접 지역에서 많이 일어났으나 후반기에 가면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일어났다. 1920년 후반에 나타나는 학생운동에서 또 다른 변화는 비밀 결사의 대두였다. 「치안유지법」과 6·10만세운동을 계기로 학생단체에 대해서도 탄압이 심해지자 학생들은 동맹휴학 투쟁을 전개해 나가는 동시에 보다 적극적이고 장기적인 항일투쟁을 목적으로 비밀 결사를 조직해 나갔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두 가지 형태의 비밀 결사가 조직되었는데, 하나는 각 학교 단위로 결성된 독서회였으며, 다른 하나는 독서회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지역단위로 조직된 비밀 결사였다. 광주의 성진회, 독서회중앙부 등이 여기에 속한다.

1920년대 학생운동의 성장, 즉 일제의 동화교육, 차별교육에 대해 저항하는 항일민족의식의 성장, 학생단체의 성장, 6·10만세운동을 통한 정치적 역량 축적, 동맹휴학과 비밀 결사의 활발한 전개 등이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는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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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1929년 10월 30일 광주를 출발한 통학 열차가 오후 5시 30분 나주역에 도착하였다. 통학생들이 출구로 나오는데, 광주중학교에 다니는 후쿠다[福田修三] 등 일본인 남학생들이 광주여고보 학생인 박기옥(朴己玉) 등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였다. 기차 안에서부터 시작된 일본인 남학생들의 여학생들에 대한 희롱이 나주역에 도착하고서도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 광경을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朴準埰)는 분노하여 역을 나오자마자 후쿠다를 불러 따졌다. 언쟁 중에 후쿠다의 입에서 ‘센징’이란 말이 나오기 무섭게 박준채의 주먹이 날아갔고 이어 난투극을 벌였는데, 급기야 역 광장에 있던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들간의 패싸움으로 번졌다. 이튿날인 10월 31일 광주로 가는 통학열차 안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 박준채를 둘러싸고 시비를 걸었다. 그 사이 광주고등보통학교(이하 광주고보)와 광주농업고등보통학교(이하 광주농교) 학생들이 몰려와 대치하였으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날 오후 5시 광주를 떠나 송정리로 가던 통학열차 안에서 광주고보생과 광주중학생 사이에 패싸움이 벌어졌다.

이에 나주역전파출소의 일본인 순경들이 나와서 일방적으로 박준채를 구타하였다. 또한 일본인 신문인 『광주일보』도 한국 학생들을 힐난하는 편파적인 보도를 하였다.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자 광주고보 학생들과 광주중학 학생들 사이의 분위기가 험악하게 되어 일촉즉발의 대치 단계에 이르렀다.

일본의 4대 명절의 하나인 ‘명치절’인 11월 3일 광주고보 학생들은 명치절 기념식에서 일본 국가를 부르지 않았고 신사참배도 거부하였다. 또한 이날 도처에서 한국학생들과 일본 학생들이 충돌하였다. 급기야 이들은 야구방망이와 농기구 등을 휘두르고 돌을 던지며 서로 난투극을 벌였다. 투석전과 육박전이 벌어지는 동안 광주여고보 학생들은 돌을 치마에 담아 날라다 주었고 붕대와 구급약품으로 부상자들을 치료하였다.

한편 광주일보를 습격했던 일단의 광주고보생들은 학교로 돌아와 집회를 열고 투쟁 방법을 토론하다가 광주역전에서 일본 학생들과 충돌했던 학생들이 돌아와 사태를 보고하자 가두 투쟁을 결행하기로 결의하고 약 300명이 대오를 편성하여 오후 1시쯤 교문을 박차고 거리로 나섰다. 이에 시민들이 합세하여 한때 3,000명까지 불어나게 되었다.

일제는 경찰력을 총동원하여 경계를 펴고, 광주시내의 중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또한 한국 학생 75명을 주모자로 구속했다가 그 중 62명을 검사국으로 송치하고, 일본 학생은 7명만을 구속했다고 모두 석방하였다. 한일 학생들의 충돌에 대하여 일제가 극히 편파적 대응을 하자, 광주 시민과 학생들은 다시 분노하였다. 광주에서의 시위는 전국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켜 신간회와 조선청년총동맹 등 각종 사회단체와 청년단체들이 즉각적으로 관심을 표명하였다. 각 사회운동 단체들은 요원을 광주에 파견하여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협의하였다.

광주에서의 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방법을 논의하던 장재성은 각 학교의 독서회 조직을 점검하고 광주고보와 광주사범학교 학생들을 만나 12일을 거사일로 잡아 광주시내의 모든 중등학교가 궐기할 것을 결정하였다. 12일 시내로 나온 300여 명의 광주고보생들은 구호를 외치며 중심가를 누볐다. 11월 3일의 1차 시위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시민들이 호응하였다. 광주여고보 여학생들도 일제히 교실을 벗어나 호응하였다. 이날 시위에 참여한 학생수가 500여 명이었는데 과반수 가까이 검거되었다. 구속자 취조 과정에서 각 학교의 비밀 결사가 탄로나 성진회, 독서회, 소녀회 등에 관련된 학생들이 추가로 검거되었다. 이 가운데 구속된 학생이 200여 명이었는데 이는 광주지역 중등학교 학생수의 1/5에 가까운 것이었다.

  • 질문1 나주역에서 한국 학생들과 일본 학생들이 충돌하게 된 발단은 무엇인가?
  • 질문2 일본인 남학생들에게 희롱 당했던 박기옥의 4촌 동생은 누구인가요?
  • 질문3 일본인 신문인 광주일보는 광주고보생과 광주중학생 사이의 패싸움을 어떻게 보도했나요?
  • 질문4 광주에서의 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방법을 모색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누구인가요?
  • 질문5 광주학생항일운동이 확산되는 데 관여했던 비밀 결사들을 말해보시오.

읽기자료 2

광주지역의 여학생 조직은 이 지역 근대 여성의 독특한 활동상을 잘 보여준다. 경성을 비롯한 다른 지역의 여성들은 대부분 근대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졸업 후 부녀자 모임을 통해 여성운동을 하였지만, 광주지역의 여학생은 학생신분으로서 이미 조직적인 활동을 펼쳤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광주지역의 여학생들은 소모임의 이름으로 조직적인 운동을 펼쳤다. 이들의 활동상이 전국 규모의 언론에 소개될 정 도로 당시의 한국 사회의 여학생 조직은 전무한 것이었다. 또한 이들 조직들에서 주된 활동을 펼쳤던 주모자들이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 옥고를 겪었다는 점에서 사회적 파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광주지역 여학생이 조직적인 활동을 펼친 예로는 소녀회, 백청단, 백지동맹을 들 수 있다.

읽기자료 3

소녀회는 1927년 11월 초순에 광주여고보의 장매성(張梅性)이 주동이 되어 같은 학교의 박옥련(朴玉蓮), 고순례(高順禮), 장경례(張慶禮), 암성금자(岩城錫子), 남협협(南俠俠) 등이 뜻을 같이하여 만든 비밀 결사 조직이다. 주동자인 장매성은 광주의 남학생조직인 성진회의 주동인 장재성의 친동생으로 평소 오빠의 감화를 받아 민족의식과 여성의 지위 향상 의식이 남달리 높았다고 한다. 박옥련(朴玉蓮) 등 친구들이 장매성의 높은 비판의식에서 영향을 받아 소녀회를 조직하였다. 소녀회 회원들은 월 1회씩 모여 토론 연구회를 가졌다.

소녀회는 1928년 5월 중에 장매성의 집에 박계남(朴繼男), 박채희(朴采熙), 박현숙(朴賢淑), 김금연(金錦燕) 및 김귀선(金貴先)을 회원에 가입시켰으며, 조직 구성원은 모두 12명까지 확대되었다. 이들은 “여성을 남성의 압박에서, 조선인을 일본의 압박에서, 무산대중을 자본계급의 압박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구체적이고 본질적인 주제를 내세웠던 것으로 보아 여성 해방과 제국주의 침략과 지배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소녀회는 남학생들의 독서회와도 긴밀한 연락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소녀회 여학생들은 붕대와 약을 가지고 뛰어나가 부상학생을 보살피는 한편 한 손에 물주전자를 두 개씩 들고 쫓아다니면서 남학생들의 타는 목을 축여 주었다.

소녀회는 광주학생운동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 정체가 드러나 장매성 이하 관련 여학생이 모두 검거되었다. 그리고 검거한지 9개월 만에 치안유지법 위반이 라는 죄명으로 이들 모두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소녀회 사건은 1930년 9월 29일 광주지방법원 제1호 법정에서 공판이 개정되었으나 개정 5분 후에 방청이 금지되어 비공개 재판으로 진행 되었다. 일심 공판에서 장매성에게는 징역 2년을, 나머지 10명의 여학생에게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이 선고되었다.

주요 언론에서는 소녀회 사건을 구속, 재판과정, 판결과 판결문, 구속자들의 출감까지 세세히 다루었다. 언론에서는 소녀회의 결성 시기, 모임장소, 모임내용, 판결내용 등이 상세히 보도하였다.

  • 질문1 소녀회를 주도한 인물과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말해보시오.
  • 질문2 광주학생항일운동 당시 소녀회 여학생들은 어떤 활동을 했는가요?
  • 질문3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했던 소녀회 여학생들은 어떤 처벌을 받았는가요?

읽기자료 4

백청단은 1930년 경 수피아 여학생들이 조직한 백의인(白衣人), 즉 백의민족의 청년들이라는 뜻의 비밀 결사 모임이다. 일본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백청단 단원들은 안쪽에 암호를 새겨 넣은 은가락지를 끼게 하여 서로가 한 단원임을 표시하였으며, 연락사항도 1대1로만 하였다. 그것은 생명을 걸고 하는 단체이기 때문에 단원을 넣는데도 매우 신중했던 까닭이다. 초기의 회원으로는 조아라, 김수진, 염인숙, 김나열, 최풍호, 최기례, 서복금 등 8명으로 알려져 있다. 회원 수는 2년 만에 18명이 되었다. 이들은 매달 20전씩의 회비와 의연금 모금으로 기금을 모으는데 힘썼으며, 단원들은 항상 태극기를 몸에 지니고 다니다가 장소나 시간에 관계없이 동네 여인들이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글을 가르치고 태극기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조선 독립을 위해서는 문맹퇴치와 아동 교육에 힘써야 한다는 뜻을 모아 방학이나 휴일에는 나주, 곡성, 제주 등 고향마을에서 글을 가르치고 애국심을 심어주었으며, 우수한 학생인데도 가난하여 취학하지 못한 아동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또 단원들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과 직접 편지를 주고받으며 수피아에도 백청단이 있음을 알렸다. 은밀하지만 활발하게 활동을 벌이던 백청단은 1932년 12월 경 단원 중의 한 학생이 사상혐의로 가택수색을 당하게 되고, 일기장이 발각되어 이듬해 1월 9일 18명의 회원들이 검거되어 기소유예를 당하게 되었으며 학교는 무기휴학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백청단의 주동자로는 조아라가 지목되었다. 조아라는 백청단 발각 당시 이미 수피아 여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이일학교의 교사로 있었다가 급작스레 경찰에 구속되고 교사직을 박탈당하게 된다. 주요 언론에서는 백청단의 활동내용을 계몽과 문맹퇴치, 장학금 모금 등 세부적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단원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아서 검거된 18명의 명단은 지금까지도 파악할 수 없다.

  • 질문1 백청단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말해보시오.
  • 질문2 백청단 여학생들이 활동했던 주요 내용을 말해보시오.
  • 질문3 일본 경찰에 의해 지목된 백청단의 주동자는 누구였나요?

읽기자료 5

백지동맹은 모임이 규칙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활동상이 여학생들의 현실인식을 반영하고 있었으며, 다수가 참여하였고, 조직적인 성격을 띠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백지동맹은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고 많은 학생들이 구속되자 구속된 학우들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기 위해 중간고사 백지로 제출할 것을 결의한 조직이다. 이 모임은 광주 전지역 학교 대표들의 모의에 의해 전단을 공동으로 작성하고 각 학교에 퍼트린 조직적인 활동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최순덕은 중간고사 하루 전인 11월 10일 광주서중의 이경채로부터 비밀리에 연락을 받고 구적십자병원(현 서남대부속병원) 근방의 한 학생의 하숙집에서 광주지역 학생대표 몇몇과 만나게 되었다. 이때 백지동맹 실시계획과 전단지에 들어갈 문구를 의논했다.

박지라는 친구 집에 숨어들어가서 밤새워 전교생에게 나눠줄 전단지를 작성한 최순덕은 동이 트자 곧장 인력거를 타고 학교로 갔다. 박지 아버지의 눈에 띄지 않아야 했고, 경찰과 교사들의 눈에 띄지 않게 남보다 빨리 학교에 도착해야만 했다.

1929년 11월 11일 아침 중간고사 시험이 시작되기 전, 최순덕은 1·2·3학년 교실을 뛰어다니며, 교단에 올라가 백지동맹 실시 계획을 칠판에 쓰고 일본에 항거하는 뜻에서 이번 중간고사 시험에서 백지동맹에 전교생이 한사람도 빠짐없이 참여하여 줄 것을 애절하게 호소하면서 직접 쓴 호소문을 배포하였다.

당시 전단지를 보고도 답안지를 써 내려가는 몇몇 학생들을 보고 3학년 이광춘이 일어서서 모두 운동장으로 나가자고 하자, 일본인 학생을 제외한 조선인 학생들 거의가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최순덕과 이광춘을 비롯한 전교생 모두가 운동장에서 ‘구속된 조선 학생 들이 모두 석방될 때까지 시험을 거부하자’며 농성을 벌였고, 일주일 동안 교실 입실을 거부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최순덕이 11월 17일에 무기정학을 당한 것에 이어 십여 명이 무기정학을 당하였다. 이들은 다음 해 퇴학 처분을 받았으며, 휴학을 권고 받은 학생도 여러 명에 달했다. 이 여학생들은 백지동맹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광주학생 항일운동의 뜻을 세상에 알리고 나아가 이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게 한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백지동맹이 비단 전남여고보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당시 광주지역과 전국으로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대한 지지가 확대되면서 광범한 동맹휴학과 백지동맹으로 이어졌다.

  • 질문1 백지동맹이 결성되었던 계기는 무엇인가요?
  • 질문2 1929년 11월 중간고사 때 전남여고보 전교생에게 백지동맹에 참여해줄 것을 호소했던 여학생은 누구인가요?
  • 질문3 백지동맹에 참여할 학생들이 학교로부터 받은 처벌은 어떤 것이었나요?

읽기자료 6

광주에서의 항일 시위에 호응하여 제일 먼저 시위가 일어난 학교는 목포상업학교였다. 목포상업학교 학생들의 투쟁은 11월 19일 시작되어 22일에도 계속되었는데 한국인 학생 모두가 학교를 나와 잡혀간 학생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목포에 이어 나주에서도 11월 27일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나주에서의 시위 준비는 학생측과 나주지역의 사회, 청년단체의 연대 속에서 이루어졌다. 나아가 시위운동은 학생뿐만 아니라 사회, 청년 운동가들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는데, 함평청년동맹 위원장 이현일과 청년 동맹원 3명이 격문을 등사하다 발각되어 검거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지역적 확산뿐만 아니라 참여층의 확산, 조직력의 확산, 운동이념의 확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전남지방의 여학교 학생들은 광주여고보를 필두로 광주 수피아여학교와 목포 정명여학교에서도 똑같은 열정으로 참여하였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전남지역을 거쳐 점차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1월 7일 청년단체인 중앙청년동맹에서는 부건(夫健)을,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서는 권유근(權遺根)과 박일(朴日)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신간회와 광주청년동맹의 간부들과 만나 학생들의 석방과 광주에서의 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방법에 대해 논의하였다.

12월 2일 오후부터 3일 새벽 사이에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서울시내 각 중등학교에 격문이 뿌려졌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총궐기를 촉구하는 격문들이 각 학교에 뿌려지자 일제 당국은 일대 사찰을 단행하여 12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월 6일에는 중동학교 학생들이, 7일에는 경성제일고보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이어 12월 9일에는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었다. 경신학교, 보성고보, 휘문고보, 제일여고보, 협성실업학교 등의 학생들이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1,200여 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는 기록적인 일이 벌어졌다.

학생시위와 동맹휴학투쟁의 형태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에는 조선 청년 총동맹과 중앙청년동맹 등의 청년단체, 조선학생전위동맹과 조선 학생과학연구회로 이어지는 학생단체뿐만 아니라 신간회, 근우회 등 사회단체의 역할이 컸다.

한편, 1930년 1월 서울학생독립시위운동에는 여학생들이 총궐기했다. 여학생들의 항일 시위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은 이화여고보 4년생 최복순(崔福順)이었다. 그녀는 근우회 간부들의 지도를 받으며 격문을 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송계월(宋桂月) 등과 진명, 숙명, 실천, 근화, 미술, 여상, 정신, 배화, 동덕, 경성여고보, 이화등 각 여학교 대표들을 모이게 하고 1월 15일 동시궐기를 결의하였다. 이날 시위에는 근화여학교, 동덕여학교, 이화여학교, 배화여학교, 실천여학교, 정신여학교, 경성보육, 여자미술학교 학생들이 참여하였고, 16일에는 경성여상, 진명여학교, 숙명여학교 등 1,200여 명이 참석하였다.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의 여학교에서도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만세 시위 또는 동맹투쟁을 전개하였다. 이것은 이 시기에 우리나라 여성들의 민족적 자각과 사회적 지위가 그만큼 향상되었음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 질문1 광주에서의 항일시위운동에 호응하여 제일 먼저 시위가 일어난 학교는 어디인가요?
  • 질문2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던 단체들을 말해보시오.
  • 질문3 1930년 서울에서 여학생들의 항일시위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은 누구인가요?
  • 질문4 여학생들이 항일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배경을 구체적으로 설명해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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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박준채, 김광춘과 박기옥

 

다음은 광주학생운동의 발단과 관련된 인물들이다.

  • 질문1 사촌 누나가 일본인 남학생들에게 희롱당하는 모습을 목격한 박준채의 마음을 추정하여 말해봅시다.
  • 질문2 조선 학생과 일본 학생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을 때 일제가 이들에 대하여 어떤 차별을 했는지 조사해봅시다.

시각자료 2

다음은 전남 여자 고등학교에 세워진 ‘광주학생항일운동 여학도기념비’이다.

  • 질문1 전남여고보 학생들이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이유를 정리해봅시다.
  • 질문2 광주지역 여학생 비밀결사의 활동을 정리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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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시위에 참여를 유도하는 유인물을 작성하여 발표해봅시다.

모둠활동 2
우리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부당한 사회적 현상을 찾아보고 이를 고치는데 학생으로서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지 모둠별로 토론하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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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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