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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경찰관 합동묘지(강경에서 경찰관 합동으로 적을 막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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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국군은 물론 경찰, 민간인까지 전투에 참여하여 나라를 구하는 일이 적지 않게 있었다. 이런 전몰군경이나 호국영령의 높은 뜻을 기리고 추모하는 일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외침이 적지 않았던 우리나라에는 전몰군경이나 호국영령을 추모하고 이들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한 시설이 적지 않게 세워져 있는데, 충남 논산시 강경읍에서 논산시내로 들어서는 옛 도로 옆 야산 기슭(논산시 등화동 산 177-3)에 ‘순국경찰관 합동묘지’가 만들어져 있다.

논산 순국경찰관 합동묘지는 1950년 7월 17일과 7월 18일에 벌어진 북한군과의 전투에서 순국한 강경경찰서(현 논산경찰서, 1996년 6월 29일 논산시 승격에 따라 강경경찰서에서 논산경찰서로 바뀜) 소속 경찰관을 합동으로 모신 묘지이다. 강경경찰서 정성봉 경찰서장 등 83명의 경찰관은 전북 이리(현 익산시), 전주 쪽으로 남하(南下: 남쪽으로 내려감)하려는 북한군을 막기 위해 충남 채운지역과 강경지역에서 7월 15일부터 7월 18일 새벽까지 3일간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 전사자(戰死者)가 늘어나고 중무장한 북한군 주력부대가 투입되면서 경찰 병력은 강경경찰서로 후퇴하였다. 이들은 경찰서를 포위한 북한군과 맞서 전투를 벌였으나, 경찰관 전원이 전사하고 말았다.

이렇게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83명 경찰관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1953년 이들의 유해(遺骸: 죽은 사람의 몸이나 뼈)를 합장하여 묘지를 만들었으며, 1970년 10월에는 묘지 입구에 ‘충혼탑’(忠魂塔)을 세웠다. 1983년에는 이곳을 성역화(聖域化: 신성한 지역으로 만듬)하여 호국영령들의 높으신 뜻을 드높이고 후세에 잇도록 하였다. 매년 7월 17일 논산경찰서 주관으로 경찰관은 물론 지역 주민과 유가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제를 지내고 있으며, 나라 사랑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현재의 충혼탑은 2008년에 세운 것으로, 1970년에 세운 충혼탑이 오랜 풍화로 색이 바래고 갈라져 터지자 논산시에서 원형을 살려 현재 규모로 확대하여 새로 세웠다. 합동묘지 앞 왼쪽에 세워져 있는 ‘殉國警察官諸公之墓’(순국경찰관제공지묘)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여기는六二五事變당시死守의決意로써壯烈히散華하신江景警察署所屬警察官八十三位의遺骸가安葬된곳이다嗚呼라六二五南侵을沮止하기위한愛國戰士들의武勇은어디에선들다를바있으리오마는그중에서도江景戰鬪는實로熾烈하였고여기서殉國하신警察官들의武勳과忠節은靑史에永遠히빛날것이다 …(하략)…

[해석] 여기는 6·25사변 당시 죽은 각오로 싸우다 장렬히 목숨을 바친 강경경찰서 소속 경찰관 83명의 유해를 모신 곳이다. 오호라! 6·25남침을 끝내기 위한 애국전사들의 용맹에는 차이가 없으련만 강경전투는 실로 치열하였고, 여기에서 순국하신 경찰관들의 업적과 충절은 역사에 영원히 빛날 것이다.…(이하 생략)…"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충청남도 논산시 등화동 산 177-3
현재 상태 원형보존 / 1953년에 마련한 묘지가 남아 있다. 1983년 성역화 사업으로 새롭게 꾸며졌다.

1950년 6·25 전쟁을 일으킨 북한군은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을 점령, 7월 3일에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물밀 듯이 내려왔다. 한강 방어선이 무너진 후 후퇴하는 과정에서 유엔군 일원으로 미8군 제24사단이 최초로 참전, 윌리엄 에프 딘(William F. Dean) 소장이 7월 3일 대전 유성에 있는 비행장에 내려 중부전선 방어를 준비하였다. 국군과 미군은 북한군 공격에 지연전(遲延戰: 시간을 얻기 위하여, 승부를 결정짓는 싸움을 피하면서 적의 전진을 늦추는 전투)을 펼치면서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대체로 미군은 경부선을 중심으로 서부전선을 담당하고, 국군은 중부전선과 동부전선을 담당하였다.

서부전선에서는 국군이 한강 방어선에서 물러난 후 다시 수원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후퇴하는 동안에, 스미스부대(Task Force Smith)를 시작으로 한국에 상륙(7월 1일 부산 상륙)한 미 제24사단은 경부국도(국도 3호선)에서 국군과 교대하는 형식으로 그 일대에 배치됨으로써 그 후 자연스럽게 서부전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1개 사단이 투입된 미군 역시 병력이 막강한 북한군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따라서 어떻게 하든지 적의 남하를 늦추면서 시간을 확보해 최대한 빨리 전투력을 회복하거나 증가시키는 데 중점을 둘 수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 국군과 유엔군은 우선 단계적으로 몇 개의 방어선을 선정해 새로 투입된 병력을 배치하고 북한군의 공격 속도를 늦추려 하였다.

미 제24사단을 지휘하는 딘 소장은 대전에 작전지휘소를 정하고 미 제8군의 주력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키기 위하여 먼저 평택·안성을 방어하다가 여의치 못하면 천안 부근에 있는 차령산맥에서 적을 막아내고, 그래도 여의치 못하면 금강에서 지연작전을 펴기로 하였다.

그러나 미 제24사단조차 북한군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스미스부대가 무너지고, 이어서 천안 일대의 미 제24사단 방어진지(陣地: 적과 싸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곳)마저 쉽게 무너졌으며, 7월 12일에는 조치원마저 북한군에게 빼앗겼다.

이에 금강 방어선을 다음 저지선으로 정하고, 딘 소장은 대전으로 들어오는 주요 도로와 다리를 폭파하고 탱크 장애물을 설치하면서 북한군의 전진을 최대한 늦추려고 하였다. 그러나 금강 방어선 뒤쪽을 막고 있는 북한군 게릴라의 활동과 전차를 앞세워 정면으로 밀고 들어오는 북한군의 공격에 금강 방어선을 지키기 어려웠다. 결국 7월 16일 금강 방어선마저 무너지고 말았다.

이렇게 오산, 평택-천안, 전의-조치원, 금강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키던 제24사단은 7월 16일 밤부터 7월 17일까지 금강 방어선에서 철수하여 대전으로 집결하였다. 금강 방어선마저 무너지자 북한군 주력은 대전을 공격하는 한편, 후속부대인 제6사단으로 1번 국도를 통해 호남지방으로 진출하려고 하였다. 1번 국도(一番國道)는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평안북도 신의주시에 이르는 일반 국도로, 국도 1호선이라고도 부르는데, 서울 아래로 수원-오산-평택-천안-전의-조치원-세종-대전-계룡-연산-논산-익산-전주-김제-정읍-장성-광주-나주-무안-목포로 연결되는 도로이다. 육군본부는 7월 17일 서해안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했으나 제대로 된 방어계획을 수립하지 못하였고, 국군 제7사단 병력 300여 명과 경찰 700여 명만이 1번 국도를 지키고 있었다.

한편 북한군이 금강 방어선을 넘어 대전을 점령하기 위해 계속 남하하는 가운데 7월 11일 북한군 최고사령부는 북한군 제6사단에 특수임무를 주어 서해안을 따라 은밀히 전진하면서 무방비상태에 있는 호남지역을 빠른 속도로 접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북한군 제6사단은 그 공격 방향을 군산, 익산, 전주로 돌렸으며, 7월 13일 일부 병력으로 공주를 침범하였다. 이미 7월 12일 미8군 제24사단은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금강(철)교를 폭파하고 대전방향으로 철수하였는데, 북한군은 금강다리가 폭파되었음에도 강을 건너 남쪽으로 진출하려 하였다. 7월 14일에는 북한군 제4사단이 107전차연대와 함께 공주를 공격하면서 금강을 건넜으며, 일부는 7월 15일 논산을 점령하고 강경까지 밀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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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호남지역으로 남하하려는 북한군은 7월 14일 공주 금강을 건넜으며, 7월 15일에는 논산까지 점령하고, 강경까지 밀어닥쳤다. 이 지역을 차지하면 익산과 전주는 물론 전라남북도로 쉽게 내려갈 수 있었다. 그러므로 논산과 강경은 꼭 지켜내야만 했다.

중무장한 북한군이 논산과 강경까지 밀어닥치는 상황에서 강경경찰서 경찰관 200여 명은 미군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7월 14일 오후 7시경 정성봉(鄭成鳳) 경찰서장의 지휘 아래 작전상 부득이 전라북도 망성(익산시 망성면), 금마(익산시 금마면), 전주를 거쳐 임실까지 후퇴하였다가 부대를 재정비하여 7월 15일경 전주로 이동하여 이날 밤을 풍남국민학교(현 전주시 완산구 남노송동 풍남초등학교) 교정에서 지냈다. 다음날인 7월 16일 아직 강경에 적의 주력부대가 도착하지 않았다는 연락을 받은 정성봉 서장은 강경으로 되돌아가기로 결정하고 7시간 동안의 전투훈련을 하였다. 그리고 경찰관을 3개 중대로 편성하여 제1중대장에 오연희(吳淵熙) 경감, 제2중대장에 송인석(宋仁錫) 경감, 그리고 제3중대장에 방규혁(方圭赫) 경감을 각각 임명한 후, 7월 17일 자신이 앞장서서 경찰서 인원을 이끌고 전주에서 출발하였다. 그리고 5시간의 강행군 끝에 황등(익산시 황등면), 함열(익산시 함열읍), 용안(익산시 용안면)을 거쳐 강경 읍내에 들어섰다.

연일 거듭된 야간이동으로 전 경찰대원은 피로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자기 지역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굳은 결의에 차 있었다. 읍내에 들어서자마자 정성봉 서장의 명령에 따라 전 경찰대원은 재빨리 중요한 지역과 주변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머지않아 있을 적의 침공을 예상하면서 방어하고자 하였다. 이에 경찰서 자체방어는 제1중대가 담당하고, 적이 접근하기 쉬운 채운산(彩雲山) 일대의 방어는 제2중대가, 봉화고개 일대의 방어는 제3중대가 담당하였다. 그리고 사찰담당 경찰은 북한군과 몰래 연락하는 자들을 찾아내는 일을 맡았다.

그 결과, 읍내를 이리저리 떠돌고 있던 지방 출신 공비(共匪: 공산당 유격대) 5명을 붙잡았다. 그리고 7월 17일 새벽 3시경에는 강경읍 성동교(城東橋)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기를 가진 채 행동이나 차림새가 수상한 사람들을 붙잡아 조사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대한유격대원(大韓遊擊隊員)이라며 유격대원증까지 제시하면서 “우리는 북한군과 싸우다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고 말하며, 경찰과 함께 싸우고자 하였다. 정성봉 서장은 이들의 말을 믿고 ‘위급한 상황에서는 북한군에 대항하여 싸우려는 자는 모두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여 이들을 경찰과 함께 행동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남아있던 청양경찰서 직원과 철도경찰대원 일부와 힘을 합해 부대를 재편성한 뒤 논산을 비롯하여 강경경찰서가 담당하는 모든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나중에 밝혀졌지만, 대한유격대원이라고 하던 이들은 아군의 작전계획 및 암호사용법까지 알고 있을 정도로 훈련된 북한군이었다. 이들은 북한군과 연락하면서 경찰의 연락망을 어지럽히거나 거짓 정보를 줌으로써 우리 편으로 하여금 상황을 잘못 판단하도록 하였다. 당시 논산 북쪽 5㎞ 지점에서 남하하던 1,000명의 북한군 주력부대가 강경을 포위하고 있었음에도 이들은 “그 숫자가 몇몇에 불과하니 다음날 총공격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거짓 정보를 주어 우리 경찰들을 북한군의 포위망 속에 빠지게 하였다.

경찰이 유격대원들과 함께 합동작전을 막 시작하려 할 즈음, 이들 유격대원의 움직임을 수상하게 여긴 사찰담당 경찰관이 조사한 결과 우리 편이 아닌 북한군 전위대(前衛隊: 부대 이동 시 안전하게 전진하기 위하여 맨 앞에서 경계·수색 임무와 아울러 진로를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임무를 맡은 부대)임이 밝혀졌다. 이에 경찰은 계획하였던 합동작전을 즉시 중지하고 강경읍 방어를 위해 강경읍 일대에 부대를 중점 배치하려고 하였지만 때는 늦은 뒤였다. 이미 경찰의 움직임을 모두 파악하고 있던 북한군에 경찰은 포위된 상태였다. 논산천 주변 성동면 제방과 채운산 정상 등에서 중무장하고 모여 있던 북한군 주력부대가 경찰서를 향하여 일제히 집중사격을 해옴으로써 강경 읍내는 시가전이 벌어졌다.

7월 17일 초저녁부터 시작된 전투는 밤이 새도록 계속되었고, 시민들은 총소리와 공포에 휩싸였다. 7월 18일 새벽녘에 이르러 적의 주력부대가 경찰서 앞 대흥교(大興橋)와 강동교(江東橋)까지 다가오면서 밖에 배치되었던 경찰관 가운데 전사자가 발생하였으며, 북한군에게 점차 밀리기 시작하여 낮 11시경에는 경찰서가 완전히 포위되었다. 북한군은 경찰서 동쪽 300m쯤 떨어진 읍사무소 옥상에서 소련제 중기관총으로 집중사격을 퍼붓는 한편 모든 방향에서 공격해 왔다.

정성봉 서장과 경찰관들은 재래식 장총(長銃: 길이가 긴 총)과 카빈총 등 좋지 않은 무기로 중무장한 적의 주력부대를 맞아 죽을 각오로 총격전을 펼쳤다. 정오 무렵에는 총과 탄약마저도 떨어져 육박전(肉薄戰: 적과 직접 맞붙어서 총검으로 치고받는 싸움)으로 맞서 싸웠으나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북한군의 공격을 도저히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결국 83명 경찰관 모두가 전사하고 말았다.

다만, 이 전투로 북한군 주력부대의 전라도지역 진출은 5일 이상 늦춰졌으며, 낙동강도하작전(渡河作戰: 강을 건너는 작전)을 비롯한 북한군이 전개하려던 작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 질문1 북한군은 논산을 통해 어떤 지역으로 진격하려고 했는지 써봅시다.
  • 질문2 강경경찰서 전투를 이끌었던 지휘관은 누구였는지 이름을 써봅시다.
  • 질문3 강경경찰서 경찰관들이 죽을 각오로 싸웠음에도 모두 전사하게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는지 써봅시다.
  • 질문4 강경경찰서 전투의 의의를 말해 봅시다.

읽기자료 2

정부는 강경경찰서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정성봉 총경을 비롯한 66명에게 각 1계급 특진을 추서(追敍:죽은 뒤에 관등을 올리거나 훈장 따위를 줌)하였고, 이에 따라 정성봉 총경은 경무관으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강경경찰서 전투에서 순국한 83명의 경찰관을 기리기 위하여 1953년 강경에서 약 3㎞ 떨어져 있는 논산시의 한 야산 기슭에 유해를 합장하여 합동묘지를 만들었으며, 1970년 10월에는 묘지 앞에 ‘충혼탑’(忠魂塔)을 세웠다.

그 후 합동묘지와 충혼탑이 낡거나 부서져 여러 차례 고치기도 하였으나, 이들이 이룬 공적에 비해 초라한 편이었다. 1950년 당시 강경경찰서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명령을 받고 자리를 떠났던 관계로 살아난 한효동(韓孝東) 총경이 1983년 30여 년 만에 강경경찰서장으로 부임하면서 뜻있는 이들이 힘을 모아 이곳을 성역화 하였다. 묘역을 확장하고 합동묘지 앞에 ‘殉國警察官諸公之墓’ 비석을 다시 세우는(1984년) 등 모습을 새롭게 하였다. 또 이곳은 2006년 7월 13일 논산시 향토유적 제33호로 지정되었으며, 2008년에는 1970년에 세운 충혼탑이 오랜 풍화로 색이 변하고, 갈라지고, 터지지는 등 훼손되자 논산시 예산으로 원형을 살려 현재 규모로 확대하여 새로 세웠다.

매년 7월 17일 이곳에서는 논산경찰서 후배경찰관들의 주관으로 지역주민과 유가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제를 지내고 있으며, 나라 사랑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현재 논산시에서는 매년 6월 6일 현충일 추념식을 논산시 강산동 산81-2에 세워진 충령탑에서 실시한 후, 이곳 순국경찰관 합동묘지로 자리를 옮겨 순국경찰관 83명의 영령 앞에 헌화(獻花)와 분향(焚香)을 하며 나라 사랑의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그리고 1991년 10월 21일, 제46주년 경찰의 날을 맞아 역사의 현장인 논산경찰서 정문 옆에 ‘경찰 6·25격전지’ 비석을 세워 강경경찰서 전투 현장을 안내하는 동시에 강경경찰서 전투의 의미를 드높이고 있다.

  • 질문1 강경경찰서 합동묘지에서 추모제를 지내는 날짜는 몇 월 며칠인지 써봅시다. 그리고 경찰의 날은 언제인지 써봅시다.
  • 질문2 논산시에서는 현충일 추념식 행사를 어떻게 치르는지 순국경찰서 합동묘지와 관련지어 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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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논산 ‘순국경찰관 합동묘지’ 입구에 세워진 기념탑의 모습이다.

  • 질문1 탑 윗부분에 크게 쓰여 있는 글씨를 읽어 봅시다.
  • 질문2 탑 윗부분에 쓰여 있는 글씨로 보아 탑 뒤쪽에는 어떤 시설이 있을지 생각하여 말해 봅시다.
  • 질문3 탑 아랫부분에는 순국한 경찰관 83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북한군이 이들을 포위하여 공격하였을 당시 이들이 가졌을 마음을 생각하여 말해 봅시다.

시각자료 2

논산 순국경찰관 합동묘지 앞 왼쪽에 세워져 있는 비석이다.

  • 질문1 비석 앞쪽에 큰 글씨로 새겨진 글씨를 읽어보고, 무슨 뜻인지 해석해 봅시다.
  • 질문2 비석 옆쪽과 뒤쪽에는 합동묘지에 대한 설명이 새겨져 있다. 그 일부에 “七月十七日초저녁부터시작된戰鬪는밤이새도록계속되었고시민들은총성과공포에싸여있었다七月十八日새벽녘에이르러敵의主力部隊가警察署앞大興橋와江東橋까지肉迫하여오므로外廓에配置되었던警察官가운데戰死者가發生하고我軍은점차밀리기시작하여 낮十一時頃警察署가完全히包圍)되었다”고 쓰여 있는데, 이를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풀어 써봅시다.

시각자료 3

논산시 강경읍 남교리 논산경찰서 입구 옆에 세워져 있는 비석의 모습이다.

  • 질문1 비석 위에 큰 글씨로 쓰여 있는 글씨를 읽어 봅시다.
  • 질문2 비석 밑에는 “여기는 6·25사변이 한창이던 1950년 7월 17일 이 고장을 지키던 강경경찰서 경찰관들이 적과 싸우다 경찰서장 정성봉 등 83인이 장렬하게 산화하신 곳이다.”라고 쓰여 있는데, 순국한 83명의 무덤은 어느 곳에 있는지 찾아보고, 이곳을 무엇이라고 부르고 있는지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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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논산 순국경찰관 합동묘지 입구에 세워진 충혼탑의 뒤쪽과 양옆 쪽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옆) 호국의 높은 뜻을 몸 바쳐 쌓은 공이
복되올 이 나라에 자유평화 심으셨나니
장하도다 그 이름
내 고장의 큰 별들이어라
1970. 10
강경경찰서 행정자문위원 일동

 

(옆) 충의로 살아오다 조국에 바친 목숨
밝아올 이 땅위에 겨레의 불사조여
아! 임들의 그 거룩한 얼
우리의 영원한 별들이어라
1970. 10
강경 경찰서장 ○○○

 

(뒤) 여기 나라와 겨레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이 고이 잠드시니
세월이 흐를수록 님들이 남긴 공은
찬란한 역사의 꽃을 피워
후손이 길이 그를 기리고 따르리니
오! 거룩한 이름은 영원한 빛이오라
1970. 10
충청남도 경찰국장 ○○○"

 

비슷한 내용의 글을 여러 사람 이름으로 새겨놓은 것 같기도 한데, 만약 자신이 이곳 충혼탑에 새길 글을 쓰다면 어떻게 쓸지 써봅시다.

모둠활동 2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세워진 추모탑이나 기념탑, 또는 6·25전적지 가운데 경찰과 관련된 곳을 찾아 그들의 활동상을 정리하고, 보고 느낀 점을 보고서로 제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6·25 전쟁에서 군인은 물론 경찰관도 큰 공을 세웠다. 자신이 사는 주변에 6·25 전쟁에 참전한 경찰관을 찾아 그들의 경험담을 듣고 그 내용을 녹음하여 주변 친구들과 공유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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