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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구소작쟁의 터(옥구 농민, 소작쟁의로 일제의 경제 침략에 저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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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구농민의 소작쟁의는 군옥지방의 3·1운동의 연장이요 집단적인 항일운동은 일제에 대한 한민족의 도전이요 조직적인 항쟁은 독립운동이다."

위의 글은 옥구 농민 항일 항쟁사에서 발췌한 옥구농민항일항쟁기념비 안내문의 내용이다. 옥구의 이엽사농장은 일본의 니이가다현 출신의 지주들이 설립한 종합 공동농장이었다. 이 농장은 서수 근처 일대의 비옥한 땅을 차지하고 오랫동안 착취와 폭압을 일삼았다. 1927년 11월 전국 평균 소작료가 46.7%~42.4%였던데 반해 75%의 높은 소작료의 납입을 요구하였다. 이런 횡포에 맞서 소작인 단체인 옥구 농민조합 서수면 지부 교섭위원회가 소작료를 45%로 낮추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묵살당하자 옥구농민조합회원들과 서수청년회가 단합하여 불납 운동을 펼치면서 소작쟁의가 시작되었다.

이에 농장측의 신고를 받은 군산경찰은 농민대표조합장인 장태성을 체포하였고, 이를 본 소작인들이 격분해 군산경찰서로 압송해 가려는 장태성을 임피역전에서 구출하고 서수주재소까지 습격하기에 이른다.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전반까지 전북에서는 17건의 크고 작은 소작 쟁의가 있었지만 옥구농민항쟁이 가장 큰 규모의 소작쟁의로 기록되고 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전라북도 군산시 서수면 서수리 1085-1 일대
현재 상태 멸실 / 이엽사농장 사무실은 임피중학교 정문 안쪽에 있었으며 사무실 앞 시위장소에는 현재 옥구농민항일항쟁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은 8할 이상이 농민이었고, 또 그 가운데 8할이 소작 농민이었다. 지주들은 대부분 도시에 거주하는 부재지주들이었으며, 그들은 마름이라 하여 친척이나 측근들을 중간에 내세워 소작인의 감독, 소작료의 결정, 징수, 보관, 수송 등의 사무를 맡아 보게 하였다. 실질적인 소작료는 최소 39% 에서 최고 90% 에 달하였으며, 그 외에 비료대, 수세, 운반비, 지세 등을 소작인이 부담하였으므로 농민들은 생계를 위협 받고 있었다.

따라서 농민들은 일본 만주 등지로 이주하거나 혹은 도시에 들어가 빈민으로 살거나, 산에 들어가 화전민이 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일제강점기 농민은 생존권과 관련하여 악덕 지주들을 상대로 항쟁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항쟁은 지주에 대한 소작쟁의라는 형식으로 표출되게 된다.

일제하 소작쟁의는 1919년 11월 13일 황해도 흑교농장(黑橋農場)의 쟁의에서 시작되었다. 특히 1930년을 전후해서 소작쟁의는 최고조에 달한다. 일제하 농민들은 일제의 침략과 수탈 과정에 항쟁하면서 농민의식과 민족의식의 성장을 보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소작쟁의는 일제에 대한 일종의 항일운동이었다 할 수 있겠다. 즉 농민에게 있어 소작쟁의는 농민의 생존권을 찾으려는 항쟁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일인 지주에 대해 표출되어졌을 때에는 일제에 항거하는 항일 운동인 동시에 독립운동의 성격을 동반하게 마련이었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 의 소작농민들은 자신의 조직을 갖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우선 소작인조합의 결성과 농민문제 선언 등을 통해 농민의 단결과 조직화를 강조했던 노동공제회는 초기 농민을 조직하는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1921년 3개 밖에 없었던 농민관련 단체는 1922년에 23개, 1923년에는 107개로 급증하였고, 1925년에는 126개로 증가하였다. 이들 농민조직의 중심은 소작인조합이었고, 당시 농민운동은 이 조직에 의해 전개되었다.

특히 이 시기,곡창지역이라 할 수 있는 전북지방에는 옥구의 농민조합을 비롯하여 각 지역에 소작인단체가 집중적으로 조직되고 있었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1920년대 중반부터는 운동의 연대성과 통일성을 높이려는 노력이 확대되면서, 각 지방 및 전국 차원에서 노동, 농민운동의 연합 조직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초창기 지주들에 대한 농민들의 투쟁방식은 수십 명 내지 수백 명이 무리를 이루어 군청, 면사무소로 몰려가 소작 문제 해결을 촉구하거나 진정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청에 대한 진정이 아무런 효력이 없자, 농민들은 소작인 단체를 결성하고 요구 조건을 정식화 하면서 직접 지주와 접촉하여 대결하는 방식으로 변모시켰다. 이러한 운동방식이 그다지 효과가 없음을 인식하면서부터는 소작 농민의 경제적인 공동 이해에 기반한 소작 조건 개선 투쟁이 소작인 단체의 조직 운동과 결합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1920년대 소작쟁의는 시기가 지남 에 따라 점차 치열한 방식으로 변화되었다.

1920년대 소작쟁의는 전라북도 지방을 중심축으로 하여 삼남지방에서 급속히 발전해 갔다. 이시기 전라북도에서는 1920년에 2건, 21년에 7건의 소작쟁의가 발생했다. 그 후 1923년 6건,1927년 33건 등이었으며, 1928년에는 무려 1,381건으로 이는 그 해 전국 소작쟁의의 87%에 달하는 숫자였다. 이처럼 1920년대 후반기에 들면서 소작쟁의는 빈도가 높았을 뿐만 아니라 쟁의의 완강성, 투쟁성, 그리고 조직화 부분 에서도 그 결과가 눈에 띠게 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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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제국주의 식민지의 경제 착취는 토지수탈이 가장 선결 요건이었다. 한반도를 식민지화하기 위한 일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북 군산지역 부근의 예를 보면 1901년경 이미 일본인에 의한 토지 매수면적은 4천여 정보에 달해있었다. 일제는 군산·옥구지역(이하 군·옥지역)을 거점으로 정읍, 김제, 익산 등에 농토를 점수 수탈하는 기지를 만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즉 일본인의 토지 매수에 의한 토지수탈이 어느 지역보다도 군·옥지역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조선 총독부는 토지 조사 사업 후 국유화된 토지를 저가로 일본인에게 매각하여 일본인 대지주를 양산하였는데, 그 중심지는 전라북도의 경우 군산, 옥구, 김제, 만경, 정읍, 전주, 익산 등이었다.

일제하 군옥지방, 특히 옥구지역은 일본인 농장주들이 호남평야에 대한 지배체계를 수립하는데 주요수단으로 삼았던 수리조합 설립에 있어서도 선발 지역이었다. 일본인 농장주들은 일찍부터 옥구지방을 수리 관개 사업의 주된 추진 거점으로 이용했다. 즉 호남평야에는 1908년에서 1911년 사이에 5개의 수리조합이 설립되었는데, 우선 1908년 2월에 설립된 옥구서부수리조합은 전라북도는 물론 조선 최초의 수리조합이었다. 이 수리조합의 구역은 당시 옥구군의 미면과 옥구면 지역이었다.

1909년 2월에는 만여 정보의 임옥수리조합이 설립된다. 그 배경을 살펴보면, 1904년에 옥구와 익산에 농장을 설치했던 후지이 히로신타로[藤井寬太郞]가 1907년 봄에 당시 조선 정부의 재정고문이었던 메가타 타네다로[目賀田種太郞]을 면담하여 수리조합 설립을 강조하여 탁지부로 하여금 수리조합령을 발포토록 했다. 그리고 이 조령에 의거하여 정부 예비비에서 45,000엔을 편성하였고, 2명의 조사원을 익산군 황등의 저수지 유적지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옥구군은 1908년에서 1911년에 이르는 사이에 4개의 수리조합 구역에 편입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전북의 다른 어느 지방보다도 옥구지역이 일본인 농장주의 농지 점유율이 높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특히 1920년에는 익옥수리조합이 설립되는데, 이는 후지이 히로신타로[藤井寬太郞]가 임익수리조합과 임익남부수리조합을 합병하여 만든 몽리면적 만여 정보에 이르는 대형 수리조합이었다. 이 수리조합의 출현으로 옥구지방에 대한 수리조합의 지배력은 더욱 거세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처럼 옥구군의 전역이 수리조합 안에 편입되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이 모조리 일본인 농장의 지배권 안에 포섭되었음을 의미한 것이기도 하다. 이를 반영하여 당시 전라북도 각 지역의 일본인 농장 분포를 보면, 익산 9, 김제 8, 정읍 3, 전주 2개 소였으나, 옥구군에는 20개소의 일본인 농장이 있었다.

1920년대 후반에 50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 하고 있었던 일본인 농장은 군산 지역 1, 옥구지역 13개소로 나타났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1920년대 후반 군옥지역에는 다수의 일본인 대지주들이 농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토지는 적게는 50여 정보에서 많게는 3,000여 정보에 이르는 대규모였다. 게다가 이들 일인농장의 농장주들은 당시 군옥지역에서 사회경제적 위치는 말할 것도 없이, 기타 역내외의 외곽 장치까지 장악해 나가면서 지역 지배를 완성해 가고 있었다.

한편 이 같은 상황에서 조선인 대지주는 어떠한 존재양상을 보이고 있었을까. 당시 군옥지역의 대표적인 조선인 대지주는 장영규(騙榮奎), 문종구(文鍾龜), 이동석(李東錫), 이완식(李完植), 강영태(康泳郞) 등이었다. 이 가운데 장영규는 옥구는 물론 익산, 김제, 전주 등지에 680여 정보의 토지를 가지고 있어 당시 이 지역 최대의 조선인 대지주였다. 그는 이른바 ‘만석군’이라 일컬어지고 있었다. 특히 이들의 거주지를 보면 옥산면에 거주하고 있었던 문종구를 제외하면 모두 임피면에 있었다.

  • 질문1 옥구 지역에 전국에서 처음으로 수리조합이 조성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전라북도에서 가장 많은 수리조합이 만들어진 지역은 어느 지역인가요?
  • 질문3 1920년대 후반 군산과 옥구 지역에 50여 정보 이상의 농지를 소유한 일본인 농장은 몇 개소였나요?

읽기자료 2

1904년에 내한했던 가와사키 소타로[川崎藤太郞]는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인 마하라 슈이치[媽原秀一]의 지시로 옥구군 서수면에 900여 두락의 토지를 매입하여 농장을 설치하였다. 가와사키 소타로는 서수면을 자기 고향인 일본 니이가다현[新瀉縣] 기타캉보라쿵[北蒲原郡]의 모형에 따라 다섯 가지 측면에서 일본화 할 계획을 추진시켰다. 니이가다현은 일본의 전형적인 쌀농사 지대인데, 이 가운데서도 기타캉보라쿵은 지주들이 은행업이나 상공업을 겸하여 경영하는 다각적인 지주 경영 방식의 발상지였다.

첫째, 카타기리[片桐], 시부카쿠[澁各] 등은 고향 출신 지주들을 서수면에 불러들여 농장을 설치토록 하였다. 특히 카타기리 카즈미[片桐和三]는 가와사키 소타로의 안내를 받아 1908년에 서수면 뿐 아니라 익산의 황등과 김제에 농장을 설치하였으며, 임익수리조합의 설립과 운영에도 진력하여 2대째 조합장에 취임하였다.

둘째, 카타기리 카즈미 등은 고향에서 일본인 농부 10명을 불러들여 조선인 소작인들을 부리는 감독자의 역할을 하도록 하고, 보수로 12정보의 농지에 대한 자작권을 주었다.

셋째, 농장내의 6개 동리에 거주하는 조선인 소작인들의 영농방식을 강제적인 협동체제로 실시토록 하기 위하여 공동묘전과 20정보의 감독전을 설치하였다. 또한 2년 농력(農曆)을 제작하여 연중행사의 세세한 규범을 제시하였다.

넷째, 가와사키 농장[川崎農場]을 설치한 후 바로 실천회(實踐會)라는 경비대를 편성시켰고, 1910년에는 소작인을 대상으로 금융업을 경영하려고 서수식산조합을 설립하였다.

끝으로, 1909년 봄에 가와사키 소타로는 자기 고향의 향토신(鄕土神)까지 옮겨 와서 이른바 ‘서수신사’를 세우고, 서수면을 일본 니이가다현[新瀉縣] 기타캉보라 화(北蒲原化)하려는 일종의 정신 통제 수단으로 삼았다.

가와사키 소타로는 1926년에 사망했다. 이후 카타기리 카즈미를 비롯하여 가와사키[川崎]농장의 농감으로 있다가 1914년에 독립하여 광천(廣川) 농장을 설치했던 히로가와 키분사쿠[廣川己文作], 가와사키[川崎]농장의 주임으로 있다가 1924년에 독립하여 농장을 설치했던 전용태랑 등 니이가다현[新瀉縣] 출신의 농장주들은 니이가다현에 뿌리박고 있는 일본인 지주들의 자본을 도입하여 주식회사 형태의 이엽사(二葉社) 농장을 설치하고 전주에 그 본점을 두었던 것이다. 이엽사 농장의 지주들은 상공업을 겸영하는 전문경영인들로써 오직 이윤추구만을 도모하는 전제적인 경영방식을 추구하는 자들이었다.

이 농장의 총지배인으로 니이가다현 출신의 사이토 신이치[齊藤信一]이 취임하였다. 사이토 신이치는 니이가다현의 지주들이 발휘하였던 자본주의적 위압관으로 이엽사 농장을 운영하면서 한국인 소작인을 통제하였다. 그는 이엽사 농장에 소속된 삼례농장, 황등농장, 서수농장을 순찰할 때는 꼭 말을 타고 승마복에 권총을 차고 말채찍을 들고 다녔다. 겁에 질린 노인과 부녀자, 아이들은 놀라서 숨어야 했고, 남자들은 고개를 숙여서 맞이하여야 하였다. 그러나 사이토 신이치는 고개하나 끄덕이는 법이 없었다. 마치 봉건 시대의 영주나 다름없는 오만불손한 태도 바로 그것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일본인 농장주들이 한국인 소작인들을 억압적이고 봉건주의적 주종 관계로 천시하는 방식은 결국 농장에서 걷는 이익을 극대화하는 기본 수단이었다. 1,700여명이나 되는 이엽사(二葉社) 농장의 한국인 소작인들은 이러한 통치방식에 시달려야 했고, 소작을 통한 기본 생존권을 위해서는 그 농장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1920년대 20여개에 이르는 군·옥지역의 일본인농장 가운데 특히 이엽사 농장에서 옥구소작쟁의와 같은 장기에 걸친 그리고 대규모에 이르는 소작쟁의가 일어났던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 질문1 옥구의 이엽사 농장을 설립한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 질문2 봉건 시대의 영주나 다름없이 오만 불손한 자세로 소작농을 대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누구인가요?
  • 질문3 이엽사 농장에서 장기적이고 대규모의 소작쟁의가 일어났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3

옥구군 서수면 서수리에 있는 이엽사 농장은 추수가 끝난 1927년 11월 20일경에 조선인 소작인들에게 75%의 소작료를 현물로 납부하라는 통고를 내린다. 하지만 전년도인 1926년도에 조선 전역에 걸쳐서 납부되었던 평균 소작료는 48%였으며, 전라북도 지역만을 한정해 보더라도 42.4~46.7%였다. 따라서 이 통고를 받은 옥구농민조합의 서수지부 위원장인 장공욱(張公郁)을 비롯한 간부들은 수차에 걸쳐 농장 사무소를 방문하여 소작료를 45%로 감면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엽사측은 이를 거부하였다. 1927년 11월 24일 소작인들은 하는 수 없이 감면이 있을 때까지 소작료를 납부하지 않겠다는 뜻을 통고했다.

이처럼 소작인들이 강경한 태도로 나오자 서수면 경찰관주재소는 다음날 새벽에 옥구농민조합 서수면지부의 지부장인 장태성(張台成)을 검거했다. 이 소식을 접한 면지부의 김행규(金杏圭),장공욱, 박상호(朴相浩) 등 36명의 간부들은 서수면 경찰관주재소에 몰려가 지부장의 석방을 요구했다.

한편 개항과 더불어 옥구군까지를 관할하며 일본인 농장의 보호에 주력하고 있었던 군산경찰서는 고등계 형사대를 총동원하여 지부장의 석방을 요구하는 간부 36명을 모조리 검거했다. 지부장과 36명의 농민조합 간부들이 모조리 검거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된 500여명의 소작인들은 11월 25일 밤에 그들이 수감되어 있는 서수면 주재소에 300여명, 임피면 주재소에 200여명이 몰려가 주재소를 습격하여 구금자 전원을 구출하였다.

이에 군산경찰서는 구금자 전원을 다시 검거하여 군산경찰서로 이송하였다. 이에 농장 소작인들은 노동자, 학생들과 합세하여 군산경찰서를 상대로 조합간부들의 석방 투쟁에 나섰다. 서수지부 조합원들은 군산에 진출하여 조합간부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고, 이에 동조한 노동자, 학생들이 합류하였다. 소작쟁의가 농민, 노동자, 학생 등의 연대투쟁으로 격화되어가자, 군산경찰서에서는 인근 경찰서의 지원은 물론 소방대까지 동원하여 쟁의를 탄압하였다. 중간 조정의 입장에 서야 했던 군산경찰서는 이엽사 농장에 대해 경비태세를 강화했을 뿐 아니라, 구금자의 석방을 거듭 요구하는 소작인 가운데 80여명을 추가로 검거하기까지 하였다.

군산경찰서는 1927년 12월 8일 총검거자 가운데 51명을 소요 및 구금자 탈환죄로 군산검사국에 송치하였고, 그 가운데 34명이 기소되었다. 그들에 대한 공판이 1928년 2월 1일 오전 10시에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개정되었다. 그들에 대한 재판 광경을 지켜보려고 서수면 사람들 뿐 아니라 전주와 이리 등지에서 수백 명의 방청자들이 모여 들었다. 피고인 가족의 얼굴에는 굶주림이 역력했으며 추운 겨울인데도 떨어진 누더기를 입고 있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을 자아내게 했다. 재판은 밤 10시에 이르기까지 12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판사가 농민조합을 조직한 목적을 따지자, 장태성 피고인은 ‘지식의 향상과 경제의 해방을 달성하는 자위적 수단’으로 조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재판부나 검찰측은 소작료 감면 요구를 사상운동으로 몰아붙이려 했기 때문에 그날 재판은 최장 12시간이라는 기록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날 오후 6시까지도 사실심의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끝나자 김병노 변호사는 과중한 소작료의 감면을 요구하는 조합원들을 사상범이나 정치범으로 몰아붙이려는 경찰이야말로 오히려 범죄를 조작한 사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단정하였다. 김변호사의 변론이 계속되는 동안 방청석을 메우고 있었던 소작인들은 ‘잘한다. 잘한다’라고 고성을 지르면서 간접적인 시위를 했다.

이후 1928년 2월 29일 정오에 옥구소작쟁의의 선고공판이 개정되었다. 34명의 피고에게 최고 1년에서 최하 4개월의 유죄판결이 선고되었다. 유죄판결을 받은 34명 가운데, 신문관(申文官, 41세) 등 5명에게는 1년, 10개월이 9명, 8개월이 1명, 6개월이 7명, 4개월이 13명이었다.

  • 질문1 이엽사 농장에서 소작쟁의가 일어났던 직접적인 요인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옥구 소작쟁의로 검거된 사람과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각각 몇 명인가요?
  • 질문3 옥구 소작쟁의와 관련된 재판이 오래 걸렸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4

군·옥지역의 합법적 농민조합 운동은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의 소작쟁의가 대표적인데, 옥구농민조합은 1926년 2월에 창립되어 초기부터 해산명령 등 경찰의 강력한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김행규[미면, 전농(全農) 소속], 장공욱(서수면) 등의 활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소작관계 개선 투쟁 등을 활발히 전개했다.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가 장기간에 걸쳐 소작쟁의를 전개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당시 서수지역에 청년운동이 활발했다는 점이다. 서수청년회는 1927년 8월 초에 창립되었다. 또한 1927년에는 대야청년회가 조직되었으며, 1927년 11월 10일에는 옥구청년동맹 창립준비회가 서수에서 열리기도 했다. 11월 9일에는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에서 임시총회가 열려 소작료 인하, 소작료 납기일 문제 등을 결의하고 조합원 수백명이 이엽사 농장 앞으로 행진하며 시위하였다.

특히 옥구농민조합은 이엽사 소작쟁의사건으로 간부진이 검거되자, 서수주재소를 습격 하여 간부들을 일시적으로 구출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자 옥구 경찰은 해산명령을 하는 등 탄압을 노골화하였다.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는 장공욱(지부위원장) 등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는데, 그러한 면에서 이엽사 소작쟁의도 바로 서수지부가 주도한 투쟁이었다. 하지만 위의 동지탈환투쟁으로 말미암아 51명이 검거되어 34명이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이후 집회도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이와 같이 군·옥지역의 농민운동은 1920년대에는 주로 조직 결성으로 나타났으며 이것은 야학과도 결합하여 대중 속에서 성장하였다. 특히 1920년대 후반의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의 소작쟁의는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 지역의 대표적인 농민항쟁이었다.

군·옥 지역에서는 이 시기 외에도 끊임없이 다양한 농민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예컨대 1927년 10월에는 옥구군 임피면 내 10개 마을 농민들이 임피농민연합을 조직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창립취지서 문제’로 인하여 간부진이 검거되자 흐지부지 되었다. 또한 1930년대 초반에는 미면 어청도에서 비밀 결사조직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처럼 군·옥지역에는 당시 옥구소작쟁의 이외에도 크고 작은 소작쟁의 및 각종 형태의 농민운동이 끊임없이 전개되고 있었다.

  • 질문1 1920년대 옥구지역에서 소작쟁의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던 원인을 설명해보시오.
  • 질문2 옥구소작쟁의를 주도했던 농민 단체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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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아래 비석은 일제강점기 이엽사 농장 사무소 터에 세워진 ‘농민항일항쟁기념비’이다.

  • 질문1 이 비석을 건립한 사람들은 누구인지 조사하여 써봅시다.
  • 질문2 일제강점기 이엽사 농장 사무소 앞에서 시위를 벌였던 농민들의 심정을 글로 정리해봅시다.

시각자료 2

다음은 주재소를 습격하여 검거된 조합 간부들을 구출한 내용에 대한 1927년 11월 29일자 『동아일보』 기사이다.

  • 질문1 위험을 무릅쓰고 검거되었던 농민조합 간부들을 구출했을 때 소작인들이 가졌던 느낌이 어떠했을지 말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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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일제강점기 각 지역에서 일어난 소작쟁의의 사례를 찾아서 그 내용과 성격을 발표해봅시다.

모둠활동 2
옥구 소작쟁의에서 검거된 피고인들을 변호하는 변론문을 만들어 발표해봅시다.
모둠활동 3
현재 농촌 현실과 농민 문제를 조사하여 농민운동단체가 어떤 활동을 해야 하는지 토론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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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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