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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시가전지(대전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늦추다)

도입

2007년 6월, 대전광역시 중구 사정동 보문산자연공원 사정지구에 ‘대전보훈공원’이 만들어짐으로써 6·25 전쟁 당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들의 높은 뜻을 기리게 되었다. 이곳 「영렬탑 건립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영렬탑 건립기

나라가 발전하고 번영하려면 끊임없는 애국의 맥이 고동쳐야 한다 작은 나라가 번영하고 큰 나라가 망하는 이치가 또한 여기 있다

대전에서 전몰군경에 대한 추모탑은 1942년 일본군의 충혼탑(忠魂塔) 건립공사가 있었다 그러나 기단 부분 공사 중 패망하면서 중단되었고 한국전쟁 때는 피난민들의 거처가 되기도 했다 중구 선화동 산 15번지 지역은 당시에는 산으로서 용두산 꼬리 부분이었다 한국전쟁은 호국영령들에 대한 급박한 문제가 제기된다 1956년 도민의 성금을 모아 기단의 상부에 4명의 군경이 배치된 영렬탑(英烈塔)이 비로소 완성되었다 대전과 충남 출신의 전몰군경 위패를 모시었고 추계제향과 매월 초하루의 참배가 이어져 왔다 그러나 도시가 발전하면서 주거지역으로 변하였으며 이전 요구의 민원이 되었다 대전광역시에서는 관련 기관들과의 협의를 거쳐 보문산으로의 이전을 확정하고 100여억원의 예산을 투입 5년만에 준공을 보기에 이르렀다

전몰군경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확대하고자 새로이 조성한 것이 여기 보훈공원이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국립대전현충원이 있고 보문산이 모정의 품속처럼 아늑하게 감싸 안은 곳이다 영렬탑은 현대적 감각과 애국정신을 수직으로 한 위용을 자랑한다 영렬들의 승천을 두 손에 담아 모았고 뽀족한 상단은 조국애의 불꽃을 상징한다 30m 높이의 영렬탑은 국토를 지킨 한 자루의 총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에 엄숙한 참배공간과 조형물이 호국영렬의 신전으로 거듭나게 된 내력을 밝히고 임의 영전에 분향 경배하며 추모의 뜻을 표한다

2007년 6월

대전광역시장

 

이처럼 영렬탑은 본래 대전광역시 중구 선화동에 있었는데, 이는 1942년 일본군이 충혼탑(忠魂塔)을 세우려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까닭에 탑을 완공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간 것을, 6·25 전쟁 당시 순국한 호국영렬들을 모시기 위해 1956년 충청남도민들이 성금을 모아 영렬탑으로 완성한 것이다. 이 영렬탑에는 1,676명의 위패를 모셔 참배해 왔는데, 시대가 흘러 영렬탑이 있던 곳까지 집들이 들어서고, 일본군이 세우려던 탑을 고쳐 우리 호국영령을 모신 것 등이 문제가 되어 보문산자연공원에 보훈공원을 만들면서 이곳에 영렬탑을 새로 세우게 되었다.

영렬탑이 있던 대전광역시 중구 선화동 산15번지 주변은 서대전 사거리에서 가까운 곳이다. 이곳은 1950년 7월 20일 남쪽으로 밀고 내려와 대전 갑천(甲川) 방어선을 넘어선 북한군에 대항하여 미 제24사단과 국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 북한군은 유성으로 이어지는 도로(유성가도)와 논산으로 이어지는 도로(논산가도)를 통해 대전 시내로 밀려왔다. 그래서 두 길이 만나는 서대전 사거리는 물론, 미군 연대지휘소가 있었던 대전시청(현 대전광역시 중구청) 주변에서는 북한군의 남하(南下: 남쪽으로 내려감)를 막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대전지역에서의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는 영렬탑 이외에도 대전광역시 중구 대사동 산3-45 보문산공원 안에 세워진 ‘대전지구전적비’(1981년 건립), ‘대전지구전승비’(다른 말로 UN탑, 1975년 건립) 등이 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대전광역시 중구 대흥동 499-1 일대(도로명 주소: 대전광역시 중구 중앙로 100 일대 (대흥동))
현재 상태 변형 / 시가지가 새롭게 정비되어 주변 지형 등 당시 모습을 찾기 어렵다.

1950년 6·25 전쟁을 일으킨 북한군은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을 점령, 7월 3일에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물밀 듯이 내려왔다. 한강 방어선이 무너진 후 후퇴하는 과정에서 유엔군의 일원으로 미8군 제24사단이 처음으로 파병되었으며, 윌리엄 에프 딘(William F. Dean) 소장은 7월 3일 대전 유성에 있는 비행장에 내려 중부전선 방어를 준비하였다. 국군과 미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지연전(遲延戰: 시간을 얻기 위하여, 승부를 결정짓는 싸움을 피하면서 적의 전진을 늦추는 전투)을 펼치며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대체로 미군은 경부선을 중심으로 서부전선을 담당하고, 국군은 중부전선과 동부전선을 담당하였다.

서부전선에서는 국군이 한강 방어선에서 물러난 후 다시 수원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후퇴하는 동안에, 스미스부대(Task Force Smith)를 시작으로 한국에 상륙(7월 1일 부산 상륙)한 미 제24사단이 경부국도(국도 3호선)에서 국군과 교대하는 형식으로 그 일대에 배치되면서 그 후 자연스럽게 서부전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군 역시 1개 사단 병력으로는 막강한 북한군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적의 남하를 늦추면서 시간을 확보해 최대한 빨리 전투력을 회복하거나 증가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국군과 유엔군은 우선 단계적으로 몇 개의 방어선을 선정해 새로 투입된 병력을 배치하고 북한군의 공격 속도를 늦추려 하였다.

미 제24사단을 지휘하는 딘 소장은 대전에 작전지휘소를 설치하고 미 제8군의 주력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키기 위하여 먼저 평택·안성을 방어하다가 여의치 못하면 천안 부근에 있는 차령산맥에서 적을 막아내고자 하였다. 그래도 여의치 못하면 금강에서 지연작전을 펴기로 하였다.

서부전선을 담당한 미 제24사단은 평택과 안성을 연결하는 선을 최초의 저지선으로 정하고, 가장 앞쪽 오산 북쪽에 스미스부대를 배치하였다. 그러나 스미스부대만으로는 북한군의 거센 공격을 맞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스미스부대가 무너지고, 이어서 천안 일대의 미 제24사단 방어진지(陣地: 적과 싸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곳)마저 쉽게 무너졌다.

이에 따라 미 제24사단은 금강 방어선을 다음 저지선으로 결정, 북한군의 남하를 최대한 늦추려 하였다. 그러나 금강 방어선 또한 후방을 막고 있는 북한군 게릴라의 활동과 전차를 앞세워 정면으로 밀고 들어오는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내기 어려웠다. 이미 죽미령(竹美嶺: 오산 북방에 있는 고개)에서 미 제24사단의 스미스부대를 물리친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우고 성난 파도처럼 밀려와 7월 16일에는 금강 방어선마저 무너뜨렸다.

금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미 제24사단은 대전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아 적을 물리칠 준비를 하였다. 북한군은 “대전만 점령하면 한국군과 유엔군은 붕괴된다.”라고 큰소리치면서 잘 훈련된 부대와 제105전차사단을 앞세우고 보병 제3사단과 제4사단으로 대전을 북쪽·동쪽·서쪽 삼면에서 포위하여 공격해 왔다. 이렇게 대전 시내로 밀려드는 북한군을 맞아 미군이 있는 힘을 다해 싸웠음에도 7월 20일 대전마저 함락되었다.

한편 7월 5일, 미 제24사단이 작전에 투입된 후부터 국군은 전선의 중부와 동부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그 중 수도사단 및 제1사단과 제2사단은 중부전선의 서부지역을 담당하고, 제6사단과 제8사단은 중부전선의 동부지역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동해안은 제3사단이 담당하였다.

국군의 작전은 서부전선의 미군과 함께 적의 남하 속도를 최대한 늦추는 데 중점을 두었다. 만일 중부지역에서 북한군을 막아내지 못할 경우, 가깝게는 대전을 포함한 경부선의 동쪽이 뚫리게 되고, 멀게는 부산을 향해 공격할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어떻게 해서는 중부전선을 지켜야 했다. 유엔 공군의 후방 폭격이 증가함에 따라 보급 사정이 나빠진 북한군은, 공중에서 쉽게 눈에 띄는 길보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산악지역을, 낮에 이동하는 것보다 밤에 이동하는 일이 더 늘어났다. 그 결과 서부전선보다 산악지역이 많은 중동부전선의 작전 비중이 더욱 높아지게 되었으며, 중동부전선을 담당한 국군과 이곳을 노리는 북한군의 충돌 횟수는 더욱 많아졌다.

또한, 동해안 쪽에서는 국군 제3사단이 미 해군의 함포 사격과 함재기(艦載機: 항공모함이나 기타 함선에 실려 다니는 항공기)의 지원 폭격 아래 북한군 제5사단의 남하를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적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영덕을 빼앗기게 되었다.

이와 같은 중·동부전선에서의 전투 결과 7월 25일에는 (충북)영동-(경북)상주-함창-예천-안동-영덕 남쪽으로 이어지는 전선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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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미 제24사단은 제105전차사단이 늘어난 북한군 2개 사단(제3사단과 제4사단)에 맞서 금강 방어선으로부터 대전 시내에 이르는 길을 중심으로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미 제24사단은 대전비행장(현 대전광역시 서구 탄방동 보라매공원 일대)에 사단지휘소를 설치하고 대평리(현 세종특별자치시 대평동)와 공주 지역에 각각 1개 연대의 병력을 배치하여 금강을 따라 방어진지를 쌓았다.

7월 16일 금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미 제24사단 사단장 딘 소장은 제34연대를 대전 갑천을 중심으로, 제21연대를 마달령(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증약리에서 대전광역시 동구로 넘어가는 고개로, 머들령이라고도 부른다)에, 제19연대를 영동에 배치하여 지연전을 펼치기로 하였다. 이는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이 앞으로 추진할 작전을 위해 지연작전을 펼치라는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원래 딘 소장은 금강 방어선이 무너진 이후 유성가도와 논산가도를 중심으로 한 갑천을 자연 방어선으로 삼고, 대전을 방어하면서 북한군의 남하를 최대한 막은 다음 7월 19일 영동으로 철수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미 제24사단 34연대를 유성가도를 주 방어선으로 삼아 배치하고, 논산가도에는 제3대대 L중대의 1개 소대만 배치하였다. 하지만 워커 미8군 사령관은 미 제1기병연대의 영동 진입을 위해 24시간 철수 연기를 명령하면서 논산가도 방어를 위해 제19연대 2대대를 추가로 배치할 것을 지시하였던 것이다.

금강 방어선을 무너뜨린 북한군은 미 제24사단(사단장 딘 소장)을 압박하면서 대전을 포위 공격하기 위해 북한군 제3사단은 정면(대평리-유성방면)에서, 제4사단은 대전 서쪽인 논산방면에서 대전을 포위해 공격하려 하였다. 또한 제3사단과 제4사단의 일부 병력으로 경부가도와 금산가도를 막아 미 제24사단을 완전히 무너뜨릴 계획을 세웠다. 북한군은 대전 전투를 위하여 제2사단을 추가로 투입하려 하였으나, 국군 수도사단의 강력한 저항으로 불가능하였다. 이에 북한군 제3사단은 논산가도와 유성가도를 통해 대전을 포위하여 쳐들어오기 시작하였으며, 제4사단 일부는 7월 18일부터 논산에서 대전 남쪽으로 돌아 쳐들어와 미군이 철수할 길을 막으려 하였다.

논산가도에서는 추가로 보내기로 한 제19연대 병력이 도착하기 전인 7월 19일 오전 북한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미 제24사단 수색중대가 가수원교를 지나 논산 방향으로 수색하던 중 북한군의 공격을 알게 된 제34연대장 보챔프 대령은 L중대를 가수원교 주변에 배치하였다. 하지만, 북한군에 밀려 진지 일부가 북한군에 빼앗기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 7월 19일 낮 12시경 제19연대 2대대가 대전역에 도착하였고, 즉시 논산가도에 배치되었다. 제19연대 2대대는 유등천(柳等川. 다른 말로 유천, 버드내) 유천교(柳川橋)에서부터 갑천 방향으로 길게 방어선을 펼치며 북한군을 공격하여 방어진지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의 공격은 밤이 되어서도 계속되었고, 7월 20일 새벽을 지나면서 갑천을 중심으로 싸우던 미군은 더는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게다가 유성가도와 논산가도가 만나는 곳에 북한군 전차가 자리를 잡아 막고 있다는 잘못된 연락과 함께 연대와의 통신마저 끊기면서 제2대대는 철수를 결정하였다. 제2대대는 중대 간의 통신도 끊기면서 결국 오후 1시경 모든 병력이 보문산으로 철수하였고, 논산가도는 북한군에게 완전히 점령되었다.

유성가도에서는 7월 19일 아침 북한군 야크기(Yak機: 소련의 프로펠러 추진식 전투기)가 미 제34연대 1대대가 방어하고 있던 유성 주변의 진지와 대전비행장에 설치된 연대지휘소 등을 폭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제34연대는 지휘소를 대전시청으로 옮기고, 유성에 있던 병력을 갑천 건너로 철수시켰다.

7월 20일 새벽 3시, 북한군은 유성가도를 통해 대전 시내로 진출을 시작하였다. 북한군 병력은 어두운 새벽을 틈타 갑천을 건너 도로의 남북 쪽으로 진출하고, 전차는 대전 시내로 통하는 유성가도를 따라 깊이 들어와 후방을 어지럽혔다. 북한군 병력과 전차가 갑천을 건너 미군 진지를 지나 대전비행장을 향하자 미 제34연대 1대대는 통신까지 끊긴 상태에서 남쪽의 논산가도로 곧바로 가지 않고 멀리 돌아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논산가도에도 북한군이 들어오면서 한꺼번에 철수하지 못하고 흩어져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직접 지프(Jeep)를 타고 나선 제34연대장은 유성가도와 논산가도가 만나는 서대전 사거리를 지나 유성방향으로 가다가 시내로 돌진 중인 인민군 전차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탱크의 기관총 공격을 피해 지프에서 뛰어내린 그는 서대전 사거리에 있던 3.5인치 로켓포조에게 탱크를 격파하도록 명령하였다. 미군이 먼저 공격을 한 로켓포탄이 북한군 탱크에 명중되어 적 탱크는 화염에 휩싸였는데, 이는 6·25 전쟁에서 3.5인치 로켓포가 최초로 북한군 탱크를 부숴버린 역사적인 순간이기도 하였다.

  • 질문1 금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미군은 대전을 방어하면서 지연전을 전개하였는데, 대전의 어느 하천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삼았는지 써봅시다.
  • 질문2 북한군은 대전을 점령하기 위해 어느 방향(어느 가도)에서 포위하여 공격해 들어왔는지 대표적인 두 가도의 이름을 써봅시다.

읽기자료 2

북한군의 본격적인 대전 총공격은 7월 19일 새벽 전투기의 폭격으로 시작하여 오전 내내 대대적인 포격전이 전개되었다. 사방에서 공격해 들어온 북한군은 7월 20일이 되기 전에 완전히 미 제24사단을 포위하였다. 딘 사단장은 7월 20일 포위된 상황을 파악하고 밤을 이용하여 철수하기로 하고 낮에는 대전 시가전을 펼쳤다.

유성으로 이어지는 도로로 갑천 방어선을 넘어선 북한군 병력은 7월 20일 오전 10시경 대전비행장을 점령하였다. 이 과정에서 북한군은 전면 공격을 하지 않고 포병 사격과 전차 단독 공격 등을 통해 시가지를 혼란에 빠지게 하는 작전을 실시하였다. 이는 미군이 철수하는 길을 차단하기 위한 후방 침투부대가 금산으로 이어지는 도로(금산가도)와 경부선 철도를 점령할 때까지 보조를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대전 시가지에서는 7월 20일 아침 6시 30분을 전후하여 북한군 전차 3대가 보병을 태우고 들어와 닥치는 대로 총과 포탄을 퍼부으며 시내를 어지럽혔다. 3대의 북한군 전차들은 충청남도청(옛 충청남도청, 현재 충청남도청은 내포 신도시로 옮김) 맞은편에 있던 연대지휘소(옛 대전시청, 현 대전광역시 중구청)를 지나 대전역 쪽으로 진격하였다. 미 제24사단 수색중대는 즉시 3.3인치 로켓포로 공격하였다. 로켓포 공격으로 첫 번째 탱크의 측면을 명중시키고, 두 번째 탱크의 철갑을 부수었으며, 세 번째 탱크의 대포를 둘러싼 두꺼운 강철을 명중시켰다. 첫 번째 전차는 멈칫하더니 그대로 역 광장으로 사격하며 진행하다가 캐터필러(Caterpillar: 여러 개의 철판 조각을 벨트처럼 연결하여 차바퀴로 사용하는 것으로, 무한궤도라고도 한다)가 끊어져 정지하였으며, 두 번째 전차는 그 자리에서 불타버렸고, 세 번째 전차는 덜컹거리며 도망갔다. 이렇게 전차 두 대를 대전역 부근에서 완전히 파괴하고, 정오경에는 나머지 한 대도 파괴하였으며, 이후 오후에 들어온 북한군 전차들도 모두 이 로켓포로 파괴하였다. 3.3인치 로켓포는 대전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처음 사용하였던 것이었는데, 딘 사단장이 직접 적의 전차를 향해 이 3.5인치 로켓포를 쏘아 전차 1대를 파괴함으로써 그동안 북한군에게 밀리기만 하면서 떨어져 있던 아군(我軍: 우리 편의 군대)의 사기를 올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전차와 함께 들어온 북한군 사격병과 편의대(便衣隊, Plain-Clothes Corps: 그 지역의 환경에 맞도록 농민, 약초 채취꾼, 행상, 나무꾼 등으로 가장하여 주민과 같은 행동을 하는 임시 특별부대)는 주요 지역에서 맹렬히 사격을 해왔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과 또한 북한군이 금산가도에서부터 북쪽으로 올라옴에 따라 사단장 딘 소장은 밤을 이용해 철수하기로 했던 계획을 바꾸어 7월 20일 오후부터 사단을 영동지역으로 철수하도록 명령, 곧 시가전을 중단하고 오후 5시 30분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철수 과정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들려오는 전투 소식은 아군이 후퇴할 길을 북한군이 미리 막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 소식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논산으로 이어지는 도로에서도 북한군 병력이 나타나 결국 대전을 방어하던 병력은 다함께 철수하지 못하고 여럿으로 흩어져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 질문1 북한군을 맞아 대전 시가전을 전개한 부대는 어느 부대(어느 나라 군대 몇 사단)인지 써봅시다.
  • 질문2 대전 시내로 들어온 북한군의 전차를 파괴하는 데 사용하였던 무기는 무엇인지 써봅시다.

읽기자료 3

미 제24사단 34연대 등 대전 방어병력은 사단장 딘 소장의 명령에 따라 1950년 7월 20일 오후부터 철수를 시작하였다. 대전에서 옥천으로 넘어가는 마달령에는 이미 미 제21연대가 옥천가도의 증약터널 부근에 진지를 만들어놓고 있었다. 철수를 쉽게 하기 위해서는 경부철도가 지나는 세천터널을 점령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미군이 철수할 길은 7월 19일부터 이미 북한군에게 점령되기 시작하였으며, 북한군은 금산가도를 지나 7월 20일 마달령 부근에 이르러 세천터널을 점령하였다. 북한군을 발견한 찰스 보챔프 제34연대장은 증약터널에 있던 제21연대 1대대 경전차 소대의 지원을 받아 선발대원들과 함께 세천터널로 돌아가 북한군과 전투를 펼치며 터널을 점령하려 하였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세천터널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상태에서 제24사단장 딘 소장은 제34연대의 마지막 소대와 함께 50여 대의 차량을 이용하여 대전 시내를 빠져나가는 도중 숨어있던 북한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딘 소장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딘 소장을 구출하고 대전에 남겨둔 군수물자가 실린 화물차를 끌어오고자 대전기관사무소 소속 기관사 김재현과 기관조사 황남호, 보조조사 현재영 등이 급수용 기관차에 미군 결사대 30명을 태우고 이원역에서 출발하여 대전역으로 향하였다. 대전역으로 가는 도중 세천터널을 지나면서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 김재현 기관사와 함께 급수용 기관차에 탔던 사람들 대부분이 죽고, 황남호 기관조사만 살아남아 간신히 기관차를 끌고 옥천으로 돌아왔다.

이처럼 연대 본부를 비롯한 대전 철수 병력은 경부선 방향의 옥천가도와 전라도 방향의 금산가도를 점령한 북한군의 공격을 받으면서 흩어져 철수할 수밖에 없었는데, 딘 소장의 실종(失踪: 간 곳이나 생사를 알 수 없게 됨)은 물론 많은 병력의 손실과 함께 1개 사단이 사용할 정도의 장비를 잃어버리는 등 손해가 적지 않았다(딘 소장은 한 달이 훨씬 지나 전라북도 진안에서 누가 몰래 한 신고로 북한군에게 체포되었다).

대전이 함락되자 워커 장군은 중동부전선에 투입했던 미 제25사단을 화령장-상주 일대로 빠르게 배치하였으며, 상륙작전부대로 활용하려 했던 미 제1기병사단을 영동-김천전선에 보내 경부국도를 따라 내려오는 북한군을 막게 하였다. 서부전선에서 대전을 빼앗기고, 중부와 동부전선에서마저 전세를 회복하지 못한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선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 질문1 대전에서의 철수가 쉽지 않았던 이유는 미군이 철수할 길을 북한군이 미리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북한군이 미리 장악하고 있었던 길은 어느 방향(어느 가도)인지 대표적인 두 가도의 이름을 써봅시다.
  • 질문2 북한군의 남하를 막으려던 대전지역 전투에 직접 참여하여 포로로 붙잡히기까지 했던 미 제24사단장은 누구인지 그 이름을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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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북한군을 공격하고 있는 아군의 모습이다.

  • 질문1 사용된 무기의 이름은 무엇인지 말해 봅시다.
  • 질문2 이 무기는 대전 시가전에서도 사용하였는데, 어떤 것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하였는지 말해 봅시다.
  • 질문3 이 사진이 대전 시가전의 모습이라고 할 때, 이들 병사가 국군일지, 미군일지 말해 봅시다.

시각자료 2

1950년 7월 17일부터 7월 20일까지 벌어진 대전 방어전투 당시의 작전 상황이다.

  • 질문1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표시된 군대는 각각 어느 군대를 나타내는지 써봅시다.
  • 질문2 군대는 대략 ‘군단-사단-여단-연대-대대-중대-소대-분대’로 구성된다. 대전지역 방어의 임무를 주로 맡았던 미군 부대는 제 몇 사단인지 찾아 써봅시다.
  • 질문3 대전지역으로 밀고 들어온 북한군 부대는 105전차사단으로 늘어난 두 개 사단이었다. 북한군 제 몇 사단과 몇 사단인지 찾아 써봅시다.

시각자료 3

대전광역시 선화동에 세워진 영렬탑과 대전보훈공원에 새로 세워진 영렬탑의 모습이다.

  • 질문1 이들은 모두 무엇을 기념하거나 추모하기 위해 세운 탑인지 말해 봅시다.
  • 질문2 어느 영렬탑이 선화동에 세워진 것이고, 보훈공원에 세워진 것인지 구분해 봅시다.
  • 질문3 두 영렬탑 가운데 하나는 현재 철거 논란에 휩싸여 있기도 합니다. 어느 영렬탑이 그런지 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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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1956년 대전광역시 중구 선화동 산15번지에 세워진 영렬탑이 2007년 보문산자연공원 사정지구 보훈공원에 새로 세워졌다. 그리고 선화동에 남아있는 영렬탑은 2012년 2월 28일 원인 모를 화재에 전소돼 지금까지 방치되고 있다. 다행히 군인·경찰 전몰장병의 위패는 2009년 보훈공원으로 모두 옮겨 피해는 없었지만, 방치된 채 남아있는 선화동 영렬탑을 철거하여 이곳에 근린공원으로 조성하자는 의견과 함께 영렬탑을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학생들을 영렬탑 ‘철거’와 ‘보존’ 두 모둠으로 나눠 서로의 견해를 주장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대전보훈공원 이외에 대전광역시 중구 대사동 산3-45 보문산공원 안에는 대전지구전적비와 대전지구전승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것들은 각각 무엇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碑)인지 조사·비교·정리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세워진 호국영렬들을 추모하는 추모탑이나 기념탑, 또는 6·25전적지를 찾아가 그들의 활동상을 정리하고, 보고 느낀 점을 보고서로 제출해 봅시다.
모둠활동 4
자신이 사는 주변에 6·25 전쟁에 참여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6·25 전쟁에 참전한 분을 찾아가 그들의 경험담을 듣고 그 내용을 녹음하여 주변 친구들과 공유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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