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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동장학당(민족 교육과 군자금 모금으로 일제에 맞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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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동장학당(興東獎學堂)은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양계리 운등산 기슭에 세워졌다. 이 건물은 백관수(白寬洙), 백낙윤(白樂倫) 등 장학계원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낼 독립군자금 모집과 인재 양성 등 항일운동을 위해 지은 것이다.

흥동장학계는 1914년 백관수가 친지 백낙윤 등과 함께 항일 독립 투쟁을 위하여 만든 모임으로 96명의 회원을 모집하였다. 장학계원들이 출자한 자금으로 고창지역 3・1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군자금을 모금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또한 성내보통학교와 고창고등보통학교의 설립을 후원하는 등 민족 교육 진흥과 장학 사업을 펼쳐 반일 독립 사상을 고취하였다.

이처럼 흥동장학당은 흥동장학계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의 거점 및 민족교육의 터전으로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양계리 458-7
현재 상태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3칸이며, 팔작지붕을 얹었다. 장학당 앞에 흥동장학당기념비가 있다.

일제의 식민교육이 지향한 목적은 한국인에 대한 우민화교육을 통한 황국신민화에 있었다. 식민지적 삶에 부합한 생활양식이나 의식구조 등을 창출하여 기형적인 정치·경제 체제를 강화하는 것은 저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의도였다. 따라서 교육정책은 식민지 문화정책 중 가장 중요한 영역이었다.

일제는 통감부(統監府) 시기부터 이와 같은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따라서 일제의 의도에 배치되는 교육활동은 철저하게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의연금이나 기부금에 의존하던 사립학교는 재정난이나 각종 교육법령 시행 등에 의하여 크게 위축되었다.

1910년 일제는 대한 제국을 강제 병합한 후 식민교육의 기반을 닦기 위해 교육제도 전반에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리하여 「조선교육령」(1911), 「사립학교규칙」(1911), 「개정사립학교규칙」(1915), 「교원시험규칙」(1916), 「서당규칙」(1918) 등 수많은 법령과 규칙을 제정하였다. 그래서 1910년대 공립보통학교는 지속적으로 증설된 반면 사립학교 신설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나마 운영되던 상당수 각종학교나 사립학교는 급속하게 폐교되는 상황이었다. 이는 저들의 의도에 부합하는 사립학교를 식민교육체제로 편입·흡수함으로써 식민체제로부터 이탈을 방지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실업학교나 사범학교에도 식민지 교육법령을 그대로 적용하는 등 진전을 가로막았다. 1918년 현재 실업학교 21개교와 간이실업학교 68개교 중 사립학교는 각각 1개교에 불과할 뿐이었다. 사범학교는 동화정책을 수행하는 교사양성과 맞물려 사립사범학교 설립을 전혀 허용하지 않았다. 이것은 식민통치에 비협조적이거나 비판적인 교사는 처음부터 철저하게 배제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식민지정책의 수행 과정에서 교육침략은 필연적이었다. 그러므로 교육 침략 정책은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수행되었다. 따라서 일제는 ‘일본어 교육의 강요’, ‘일본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생활 양식의 강요’, ‘근대적 생산 기술 특히 초보적인 농업 기술의 전수’ 등을 중시하는 교육을 실시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교육침략에 대항하여 전국 각 지역에서 교육 구국운동이 거족적으로 전개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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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흥동장학계(興洞奘學契)는 1910년대 항일운동의 관련 속에서 태동하였다. 일제강점기 고창 지역의 애국지사들이 표면적으로는 교육에 명목을 두고 내면적으로는 항일투쟁과 그 군자금을 지원하기 위한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자 하였다. 이에 근촌 백관수를 중심으로 부안 내소사에서 항일독립투쟁을 위한 기밀조직 발기회를 갖고 홍동장학계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교육을 통하여 일제 식민지를 극복하자는 목적으로 백낙윤(白樂允), 이순열(李舜烈), 황상익(黃尙翼), 백관수(白寬洙), 이휴열(李休烈), 이갑수(李甲洙), 황서구(黃瑞九) 등이 발기하여 성내면을 중심으로 하여 전라북도 내에서 73명의 동지를 규합 전국적으로 96명의 계원을 확보하였다. 계원들은 각자 자금을 출연하여 거대한 기금을 조성하였다. 그 일부를 항일 독립 운동 자금으로 극비리에 임시정부에 지원하면서 또 전답과 임야 등을 구입하여 기본재산을 마련하고 장학 사업을 벌였다. 그러므로 흥동장학계의 주요활동은 항일독립운동의 자금조달과 장학활동이라 할 수 있다.

  • 질문1 흥동장학계가 설립된 목적은 무엇인가?
  • 질문2 흥동학학계의 중심인물들은 누구인가?

읽기자료 2

흥동장학계는 1913년 3월 1일 계칙을 제정하여 이후 1933년 3월 30일 개정을 보게 되었다. 지금까지 전하는 1933의 개정된 규칙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장 총칙

제1조 본 계는 흥동장학계라 칭한다.

제2조 본 계의 위치는 고창군 성내면 양계리에 위치한다.

제3조 본 계는 본타군도(本他郡道)를 물론하고 의기상합(義氣相合)한 인사로서 조직한다.

제4조 본 계는 교육을 목적으로 한다.

제2장 본계의 기관

제5조 본계에 임원을 두되 명예직으로 한다.

계장(契長) 1인
부계장(副契長) 1인
서재무(庶財務) 2인
평의회장(評議會長) 10인

제6조 계장, 부계장은 총회에서 이를 추천하고 기타 임원은 평의회에서 정한다.

제7조 계장은 본계를 대표하여 업무를 총괄한다.

제8조 부계장은 계장을 보좌하고 계장이 사고가 있을 때 이를 대리한다.

제9조 서재무는 계장의 지휘를 받아서 계에 대한 업무를 담당한다.

제10조 본계가 소유한 토지 수입을 관리하기 위하여 사음[四音, 마름] 1인을 둔다

제11조 본계 임원의 임기는 만 3년으로 한다. 서재무는 총회시마다 선정한다.

제12조 본계 원정기일(元定期日)은 매년 4월 말일, 11월 말일로 한다.

제13조 본계에 필요로 인한 사항이 있을 때는 계장이 임시총회를 소집한다.

제3장 결의기관(決議機關)

제14조 본계의 추입급우(追入及又)는 탈퇴에 대하여서는 평의회에서 이를 결정한다. 단 탈퇴원에 대해서는 원출자금(元出資金)을 반환하지 않는다.

제15조 본계의 중요사항은 총회 반수 이상 의결을 통하여 가결한다.

제16조 본계에 중요하지 않고 경미한 사건은 평의회에서 결정하고 다음 총회에 이를 보고한다.

제17조 본계의 중요사항을 결정할 때는 반드시 바둑돌의 흑백으로 집행하되 흰 돌을 가(可)로, 검은 돌을 부(否)로 투표함에 넣은 후 흑백을 계산하여 다수로 가결한다.(단 흑백이 같을 때는 계장이 이를 결정한다.)

제18조 본계 의결사항을 개정할 때는 전(前) 회의록에 폐기의 사유를 갖추어 계장 외 2인 이상 날인하여 비치한다.

제20조 계원이 사망할 때는 조의금 5원을 휴대하고 계원 2인 이상 반드시 조문하고 위로한다.

제21조 본계 계원명부에 있는 계원의 사망 후에는 직계 상속인으로 고쳐서 기입한다.

제22조 계원의 자녀로 보통학교 6학년을 마칠 시에는 오원씩을 준다.

제4장 설비(設備)

제23조 본계에 다음의 장부를 둔다.

1. 계원명부
2. 토지대장, 임야대장
3. 금곡(金穀) 출납부
4. 정조수납부(正租收納簿)
5. 비품대장
6. 기념식수(紀念植樹) 대장
7. 회의록

제24조 본계의 회칙은 총회 통과일부터 시행한다."

  • 질문1 흥동장학계에 가입했던 사람들의 출신 지역과 성향을 말해보시오.
  • 질문2 흥동장학계가 위치한 곳은 어디인가요?
  • 질문3 흥동장학계가 민주적으로 운영되었다는 근거를 말해보시오.

읽기자료 3

흥동장학계는 1931년 성내면 양계리 운등산 기슭에 장학당과 그 부속 건물로 고직사, 창고 등을 건립하였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 국내부 호남지부 본부가 장학당 내에 있게 되었다. 격문(檄文)을 쓸 일이 있으면 성내면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하였으며, 호남 일대의 군자금이 이곳으로 집결되었다. 당시 흥동장학계원을 중심으로 한 정치결사 조직의 명단은 장학당 옆 대한 독립 운동 사적비에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는 감독 노진용, 부감독 오의륜, 재무의원 이휴열, 황종관 그리고 고문으로는 강대직, 이석열, 나홍균, 이종탁, 이강열, 신용수, 이철환, 황종화, 이우철, 이봉헌, 김양편, 백락일, 진신원, 박전동이었다. 당시계원 노진용, 이석열 등이 검찰에 검거되어 신변의 우려가 있어서 군자금 모집과 조달 명세에 관한 문서를 비밀리에 감추어서 해방 후까지 전해졌으나, 6·25 전쟁 중에 분실되었다. 흥동장학계의 기본 재산은 해방 후 농지개혁 등으로 많이 없어졌으나 계원의 자손들에 의해 장학당만은 유지되고 있다.

흥동장학계의 계원 중 나중에 독립운동 유공자로 정부 포상을 받은 자는 노진용(1980년 건국포상 추서), 이석열(1983년 대통령 표상), 이종택(1982년 대통령 표상), 이종수(1986년 대통령 표상) 등이 있다.

장학활동 면에서는 우선 계원의 자녀에 대해 보통학교 6년을 모두 이수할 시 장학금 5원을 지급하고 계원 자녀 외에도 우수하면서도 극빈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였다.

한편 1912년 부안면 오산리에 일본인 기독교 장로 마스토미 야스자에몽[枡富安左衛門]이 ‘흥덕학원’을 창설하여 신교육 활동을 하고 있었다. 1919년는 이 학교를 폐교하고 다시 ‘오산 보통학교’를 설립하여 교육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고창군 성내면 지역의 학생들은 부득이 이 학교까지 통학을 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흥동장학계는 1922년 3월 25일 사립 성내 보통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이순열을 추대하였다. 또한 청년회관도 건립하여 청년들의 심신단련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사립 성내 보통학교는 2년 후인 1924년 3월 19일에 성내 공립 보통학교로 바뀌어 3학급 편성으로 같은 해 4월 21일 개교하였다. 성내 공립 보통학교는 지금의 성내 초등학교이다.

또한 이휴열은 인재들이 상급 학교에 진학하여 학위를 취득할 수 있도록 연구비 지원도 아끼지 않았으며, 개인적으로 지원한 것도 많았다. 특히 서형남 의학박사, 조정만 공학박사는 고창고보 출신으로 일제 말기에 이름 있는 수재들이었다. 조정만은 고창 태생으로 토박이지만, 서형남은 광주 출신으로 평양숭실중학교에서 고창고보에 편입된 학생이었다. 이로 보면 인재를 기르는 데는 고향과 출신을 따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흥동장학계는 항일 합법투쟁의 하나로 대한노총의 서정희를 내세워 조선 농인사(朝鮮農人社)를 조직하여 월간지를 발행하는 한편 구매조합과 판매조합사업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구매조합과 판매조합은 금융조합에 흡수당하고 광주 학생 항일 운동 후에 폐쇄되었다.

  • 질문1 흥동장학계의 주요 활동은 무엇이었나요?
  • 질문2 흥동장학계의 계원 가운데 독립유공자로 정부의 포상을 받은 인물들은 누구일까요?
  • 질문3 흥동장학계에서 설립을 지원하여 성장한 학교는 지금의 어느 학교일까요?
  • 질문4 흥동장학계가 고향과 출신을 따지지 않고 인재들을 지원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읽기자료 4

백관수는 1889년(고종 26)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생근리에서 부친 백도진(白道鎭)과 모친 고씨(高氏) 사이의 3남3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백관수의 가문에서는 여러 명의 열사가 배출되었다. 근촌의 종형(從兄) 백인수(白麟洙)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두 번이나 순절을 도모하였고 끝내 자결의 길을 택하였다. 종질(從姪)인 백낙일(白樂一) 또한 상하이임시정부의 군자금올 조달하는 등 항일운동에 종사하였으며, 같은 집안인 백정기(白貞基)는 일본 국왕을 암살하려다가 성공하지 못하자 중국 톈진[天澤]에서 기선을 폭파하고 일본 병영과 총영사관에 폭탄을 던져 한국인의 기개를 과시하였으며, 나가사끼 형무소에 압송되어 39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러한 가풍 속에서 백관수는 여섯 살 때부터 호남의 대학자인 간재(艮齋) 전우(田愚) 밑에서 공부하였다. 백관수는 열세 살 때에 사서상경(四書三經)에 통달할 만큼 뛰어 났다. 이 시기에 인촌(仁村) 김성수와 함께 공부하였는데, 백관수와 김성수의 부친도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백관수는 18세가 되던 1907년 김성수와 함께 내소사의 청련암에서 함께 공부하면서 송진우(宋鎭禹)를 만나게 되었다. 이후 세 사람은 군산에 있는 금호학교를 졸업하고 김성수와 송진우는 일본 유학을, 백관수는 경성법률전수학교 입학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배움에만 정진할 수 없었다. 나라가 일제의 무력 앞에 치욕을 당하고 민중들은 무지몽매함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백관수를 비롯한 고창의 선각자들은 학문을 크게 깨우쳐 뒤떨어진 문화를 계도하고 조국 독립을 돕고자 장학계(獎學契)을 조직하였다. 1914년 백관수와 백낙윤을 비롯하여 이순열, 이석렬, 황상익 등의 지사(志士)들이 모여 계(契)를 조직하고 계비(契費)를 내어 막대한 기본금을 마련하였다.

1914년 일본에서 귀국한 김성수가 1915년 중앙학교를 인수하자 백관수는 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더 공부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일본 유학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17년 29세의 나이로 메이지 대학 법과에 입학하였다.

1919년 개최된 파리강화회의에 미국의 한국인들이 대표 파견을 결정했고, 미국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에 관한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자극을 받은 일본 유학생들은 ‘조선 청년 독립단’을 조직하여 백관수를 단장으로 추대하였다. 이 단체는 이광수가 독립선언에 대한 문건을 작성하고, 인쇄는 백관수가 맡았다. 2월 8일 도쿄기독청년회관에서 「2·8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는데, 백관수가 독립선언서를, 김도현이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이 사건으로 이미 국내로 들어간 이광수를 제외한 서명자 10명 등 모두 17명이 검거되었고 6월 10일 재판부는 최팔용과 서춘에게 금고 1년,백관수, 김도현, 김철수, 윤창석에게 금고 9개월, 송계백, 이종근, 김상덕에게 금고 7개월 15일을 선고하였다. 출옥 후 1921년 백관수는 메이지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우익 진영 중심으로 추진된 물산 장려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1927년 이후 개최된 ‘범태평양기독청년대회’에 3회 연속 참가하면서 국제정세에 대한 시야를 넓혔다. 이 무렵 국내 민족주의 계열의 인물들은 자치론과 비타협적 투쟁을 강조하는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이처럼 독립운동을 놓고 대립현상이 나타남에 따라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주요 인물들 사이에서 좌우(左右)를 망라한 협동전선(協同戰線)의 구축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목적으로 1925년 ‘조선 사정 연구회(朝鮮事情硏究會)’가 조직되어 백관수, 백남운, 박찬희, 홍성하, 안재홍, 홍명희 등이 참여하였다. 이후 조직된 신간회(新幹會)에서는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가 다시 출판부장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1924년 조선일보에 입사한 백관수는 1928년에 사임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홍문사(弘文社)를 설립하여 월간지 『동방평론』을 창간하여 민중 계몽을 시도하였다. 그러다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송기정 선수의 기사에서 일장기를 지운 사건으로 『동아일보』 사장인 송진우가 물러나면서 1937년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하여 주필과 편집국장까지 겸하였다.

해방 후에는 한민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미군정이 조직한 ‘민주의원’,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등에 참여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과 헌법 기초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되었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지도층이 국민을 버리고 떠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서울에 남아 있다가 납북되었다.

  • 질문1 어린 백관수의 스승은 누구였는가요?
  • 질문2 백관수가 어렸을 때 공부하면서 만나 교류한 주요 인물들을 말해봅시다.
  • 질문3 2·8 독립선언서에 참여한 인물들은 누구일까요?
  • 질문4 2·8 독립선언에서 백관수는 어떤 역할을 담당했나요?
  • 질문5 1920년대 후반 민중 계몽을 위해 백관수가 창간한 월간지는 무엇인가요?(다시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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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은 흥동장학당기적비이다.

  • 질문1 일제 시대 흥동장학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활동에 대해 정리하여봅시다.
  • 질문2 흥동장학계에서 지원하여 사회적 인재로 성장한 인물들을 조사하여 정리하여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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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일제강점기 비밀리에 조직되었던 단체들을 조사하여 그 활동 내용을 발표해봅시다.

모둠활동 2
일제강점기에 전개된 교육 운동의 주요 목적을 모둠별로 정리하여 발표해봅시다.
모둠활동 3
오늘날 여러 가지 사회 문제 가운데 교육을 통해 바꿀 수 있는 것과 그 구체적 방법을 모색하여 서로 이야기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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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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