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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철교(서부 전선의 중요 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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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철교


임진강 철교의 손상은 우리 분단의 역사 속에
그 대표일 것이다.
8·15해방이 되면서 분단되어 6·25전쟁으로
동강이 난 것이다.
그 휴전선과 비무장지대 그리고 남북의 분단의
상징으로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 다리는 영 ‘돌아오지 않는 다리’로 우리의 슬픈
역사의 상징이었다.



그 다리가 다시 복원되어 그 기차가 신의주, 만주,
시베리아로 달리는 그 평화의 날이
어서 오기를 기대한다.
임진강 철교여 통일이여.


- 김수경 시집 『휴전선의 봄』-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1325-1 번지(도로명 주소: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임진각로 177 (임진각관광지))
현재 상태 훼손, 임진철교는 민간인 통제구역 안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 교각만 남아있다. 폭파 이후 모습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전쟁 초기 북한군은 제1사단과 6사단을 제203전차연대와 함께 개성-문산 방면으로 남하시켰다. 이들과 정면으로 맞서게 된 국군 제1사단은 북한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아 개성을 빼앗긴 뒤 임진강 남안으로 철수하여 남진을 저지하고자 했다.

1950년 6월 25일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제11·12·13연대를 임진강 주력 저항선 상에 배치하고, 북한군의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임진철교를 폭파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제11연대장 최경록 대령은 임진철교 남쪽에 주력 저항선을 편성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동안 사단 공병대대장은 공병장교 정극서 대위에게 철교폭파 임무를 부여했다.

정 대위는 제11연대장과 철교폭파에 대하여 협조한 다음 철교에 폭약을 장전하고 점화하였으나 불발되면서 폭파에 실패하였다. 정대위는 급히 폭파병들과 다시 한 번 폭파장치 연결을 시도하였지만 강 건너에서 북한군이 폭파작업을 방해하는 교란사격을 집중함으로써 끝내 철교를 폭파하지 못하고 말았다. 결국 북한군은 임진철교를 통하여 남진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고, 국군 제1사단은 서둘러 남쪽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임진철교는 6월 27일 김두만 중위가 T-6 연습기로 다시 폭파를 시도하였지만 불발되었고, 이후 유엔군에 의해 폭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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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읽기자료 1

개성, 문산 지역의 방어는 국군 제1사단이 맡고 있었다. 국군 제1사단 작전 지역 내에는 고려조 500년의 도읍지인 개성, 임진왜란 때의 대첩지인 행주산성과 벽제관의 전적지,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산성과 봉수대가 산재하여 있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북쪽 오랑캐의 주된 침공로였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왜적의 주요 공격로였다. 따라서 이곳은 고대로부터 전략·전술적으로 중요시되고 있는 군사상의 요충지가 많은 지역이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연백군과 개풍군(현재 휴전선 이북) 및 파주, 고양군과 연천, 양주군의 일부 지역이 각각 포함되어 있다.

사단 작전지역은 대체로 임진강을 중심으로 하여 남북으로 분리되며, 북쪽인 38선 분계선 일대는 예성강을 중심으로 다시 서쪽과 동쪽지역으로 세분된다. 지역 내의 지형은 38도선을 잇는 북쪽이 그 주변 지세의 영향으로 구릉 및 고지군이 형성된 반면에 그 이남은 백천과 청단평야를 비롯하여 임진강과 예성강 등 저지대를 형성하고, 파평산이 임진강 남쪽에서 강류를 따라 남서로 능선을 이뤄 강과 더불어 뻗쳐있으며 기타 지역은 구릉 내지는 평지이다. 임진강이 사단의 주진지 전방에서 남서로 흐르며, 예성강이 사단의 중앙지대를 북에서 남으로 흘러 서해에 이르고 있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개성지역과 예성강 서쪽의 연백, 청단 지역이 북쪽을 제외한 3면의 바다와 강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반도가 되고 있다.

지역 내에는 예성강, 사천, 사미천, 임진강, 문산천, 곡릉천 등 여러 하천이 있으며, 임진강과 문산천, 곡릉천은 동에서 서로 흘러내려 방어 작전에 유리하며 전술적 가치가 높았다. 또한 청단 남단의 도서지역은 조수 간만의 차이가 심하여 청룡 반도로부터 용매도에 이르는 해상 7km는 하루 두 차례씩의 간조 때에는 갯벌을 통하여 사람과 말의 통행이 가능하였다. 날씨는 하계 특유의 고온다습한 날씨에 비가 내리는 날이 많았다.

개성 및 그 동쪽 일대는 개성 동편 9km 지역에서 남북으로 흐르는 하천과 임진강으로 인하여 작전상 적지 않은 제한을 받게 되어 있었다. 특히 방어지역 우측의 장파리-적성(구읍리) 간의 38도선 경계지대는 임진강이 그 지대 남쪽 2~5km 지점을 동서로 흐르기 때문에 철수 작전에 적지 않은 지장이 초래될 것으로 판단되었다.

예로부터 이 지역의 교통망은 대단히 발달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금천(개성 북쪽 22km)-개성-문산-서울 축선 상에는 경의도로 및 경의선 철로가 가설된 교량 중 예성강 철교 및 임진강 철교(경의선 철도)는 이를 폭파하였을 경우 피아작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지형지물이었다.

개성과 임진강 하류 일대에는 1950년 6월 19일부터 25일까지 비가 내렸으나 작전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작전 기간 중 기온은 평균 섭씨 20도 내외였으며 바람은 서남풍이 대체로 7m로 불었다.

  • 질문1 국군 제 1사단의 맡고 있는 개성과 문산지역의 국방유적을 써 봅시다.
  • 질문2 국군 제 1사단 작전 지역을 구분하는 두 강의 이름을 써 봅시다.
  • 질문3 38도선 이남 지역의 지형적 특징은 무엇인가요?
  • 질문4 임진강의 전술적 가치는 무엇인가요?
  • 질문5 임진강이 장파리-적성(구읍리) 간의 38도선 경계지대의 작전 수행에 미치는 영향을 써 봅시다.

읽기자료 2

국군 제1사단은 개전 당시 94km 정면의 38도선 상의 제13연대, 제12연대 두 연대를 배치하고 사단예비인 제11연대는 수색에서 교육 훈련 중이었다. 사단은 자연 장애물인 임진강의 남안을 주요진지로 정하고 예성강 철교와 임진교 방어 및 파괴계획을 미리 수립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제1사단이 6월 25일 오전 4시~4시 30분 제13연대 정면에, 북한군 제6사단이 좌측 연백지구의 제12연대 정면에서 각각 전면 공격하였다. 사단은 예비대인 제11연대를 수색으로부터 급히 문산 지구로 진출시켜 당일 11시까지 임진교를 중심으로 한 문산 돌출부 일대에 위 아래로 배치하여 일대 격전을 전개하였다.

적은 26일 소수의 병력으로 임진교 동북쪽 41km 지점에서 급속 도하를 시도하면 서 문산 돌출부 일대에 주력을 투입하였고, 국군 제I사단은 26일 정오를 기하여 제11연대로 하여금 이를 반격하게 하여 이날 오후에 주요진지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적 주력이 우측 제13연대 정면에 압력을 가하면서 고랑포-적성 간의 도하지점으로 기갑부대를 도하하게 하여 문산으로 공격하고 보병의 일부는 연대 후방까지 깊이 침투하기에 이르렀다. 26일 야간 이후 북한군 제1사단 주력이 문산 돌출부를 다시 공격하고 북한군 전차부대가 경의가도와 제13연대 지역의 파평산 남단으로 공격하였다. 이에 사단은 적에게 많은 타격을 주면서 주력을 봉일천 최후 저항선으로 이동시켰다.

27일의 봉일천의 배치는 제13연대와 증원된 제15연대를 전방에, 제11연대를 예비로 하는 도합 8개 대대로써 문산-서울 간의 국도를 중심으로 하는 겹겹이 배치했다. 사단장은 이곳이 서울로부터 불과 20km인 최후의 보루임으로 28일 조기에 주요진지 회복을 위한 반격 작전을 계획하였다. 아군 장병들은 적을 격파하면서 일부는 임진강 하안까지 진출하였으나 이날 아침 적이 미아리에서 서울 시내로 진출하였다는 급보를 접하자 사단은 전선의 재정비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 질문1 개성, 문산 지역을 공격한 북한군 부대의 명칭을 써 봅시다.
  • 질문2 6월 26일 정오에 문산 돌출부를 회복한 연대 명칭은 무엇인가요.
  • 질문3 6월 26일 야간에 이루어진 적의 공격으로 아군이 최후의 저항선으로 삼은 곳은 어디인가요?
  • 질문4 6월 27일 봉일천의 배치에 투입된 대대는 몇 개 대대인가요?
  • 질문5 6월 28일 국군 제1사단이 전선의 재정비에 들어간 이유를 써 봅시다.

읽기자료 3

장병들은 6월 19일, 북한의 여현 역에서 요인 교환 제의와 24일 육군 본부에서 휴가, 외박, 외출 실시에 대한 지시가 하달되면서부터 경계심이 상당히 풀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사단에서는 6월 24일 보직병력의 1/3이 휴가를 떠나고 나머지 병력은 1/3 범위 내에서 외출, 외박이 실시되었다. 38선 경계 임무를 수행 중이던 제12연대의 경우, 총병력 2,600여 명 중, 휴가, 외출, 외박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병력이 1,460명이었으며, 그들 중 거의 80km에 달하는 연대 방어 정면의 경계초소 및 거점에 배치된 병력은 고작 800여 명에 불과하였다.

장비면에 있어서도, 제1사단 보유차량의 대부분이 육군본부의 차량정비 계획에 따라 기지창으로 후송되었다. 심지어는 제11연대의 경우,81mm 박격포와 60mm 박격포를 비롯한 모든 공용화기가 육군본부 지시에 따라 부평에 있는 병기대대에 후송되어 있었다.

또한 제1사단장은 6월 14일 보병학교 고급지휘관 과정에 입교 중이었으므로, 선임 연대장인 제11연대장 최경록 대령이 사단장 대리로 임명되어 있었다. 또한 24일 밤에 용산에 세워진 육군회관 낙성식에 많은 고급지휘관이 초대되었는데 사단장 대리로 있던 최경록 대령도 이에 참석키 위하여 잠시 부대를 비우게 되었으며, 제13연대장 김익렬 대령도 외출 중에 있었다. 이러던 중에 그 이튿날인 25일 미명 북한군의 전면 기습 남침공격이 시작되었다.

  • 질문1 국군의 경계심이 풀어진 이유를 써 봅시다.
  • 질문2 6월 24일 국군 제1사단의 병력운용 현황에 대해 써 봅시다.
  • 질문3 국군 제1사단의 장비 현황에 대해 써 봅시다.
  • 질문4 국군 제1사단의 지휘관 동향에 대해 써 봅시다.

읽기자료 4

사단 공병대대는 사단장의 철교폭파에 대한 준비명령이 내려지자 대대장이 대대 작전과장 정극서 대위로 하여금 기존 폭파계획을 시행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정대위는 폭파책임부대인 제3중대의 주둔지인 봉루리(문산 남쪽 1km)까지 3/4톤 트럭으로 직행하여 중대장 김동일 대위를 찾았다. 그러나 그의 행방이 묘연하자 중대장을 대신하여 자신이 직접 결행하기로 하여 폭파조를 싣고 정오 무렵 현장에 진출하였다.

정대위는 교각에 폭약을 장전하고 대기하였는데 얼마 후 대대장 장치은 소령이 폭약장전을 점검하더니 “비겁하게 왜 이 쪽에 장전하였는가! 즉시 저 쪽에 재장전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정대위 등 폭파조는 다시 대안 쪽 3번 교각에다가 장전을 마친 다음 본대로부터의 명령을 기다렸다. 그러나 병력이 계속 후퇴하였기 때문에 저녁이 되어도 사단이나 대대로부터의 폭파 명령이 하달되지 않았다.

정대위는 교량의 폭파 시기가 제12연대의 철수 직후에 시행하도록 된 대대 작전 계획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대기하였다. 얼마 후 연대의 주력이 통과한 다음 건너편에 움직이는 적의 징후를 발견하였다. 이에 정대위는 교량 폭파의 시기가 왔다고 믿고 이를 독단으로 결행하기로 결심하여 폭파조로 하여금 양측 철교 중 먼저 남쪽 철교인 경의선 철교부터 폭파하도록 명령하였다.

즉각 남쪽 교량을 폭파한데 이어 북쪽 교량을 폭파하려고 하였는데 이때 배선이 끊어진 듯 실패하였다. 이에 정대위는 즉시 폭파병 2명에게 지시하여 다시 연결하여 폭파하게 하였다. 그러나 강 건너 북한군의 방해로 정대위 일행은 교량 폭파의 상황을 확인도 하지 못한 채 철수하였다.

당시 교량의 파괴 상태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없으나 적의 전차와 병력이 이날 밤 파괴되지 않은 철교를 이용하여 문산 지역을 점령한 것으로 보아 완파되지는 못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에 대하여 공병대대 작전과장 정극서 대위는 “임진강 교량은 2개인데 남쪽은 철도이고 북쪽은 인도교이다. 나는 남쪽부터 폭파하고 다음에 인도교를 폭파하였던 바 1차 폭파는 실패하고 2차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때 적으로부터 사격을 받아 철수하였으므로 파괴 상대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분명 폭파는 된 것이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그 후 임진철교는 6월 27일 김두만 중위가 T-6 연습기로 15kg의 폭약을 싣고 다시 폭파를 시도하였지만 불발되었고, 이후 유엔군에 의해 폭파되었다.

  • 질문1 임진철교의 폭파를 결행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 질문2 폭약 장전 후 바로 임진철교 폭파 명령이 내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정극서 대위가 독단적으로 임진철교 폭파를 명령한 이유를 써 봅시다.
  • 질문4 정극서 대위가 임진철교 완파하지 못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는 근거를 써 봅시다.
  • 질문5 임진철교는 최종적으로 누구에 의해 폭파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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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폭파된 임진철교 복구 장면이다.

  • 질문1 폭파된 임진철교를 복구한 이유를 써 봅시다.

시각자료 2

사진은 복구된 임진철교의 장면입니다.

  • 질문1 사진 좌측 철교는 현재 사용되고 있다. 이 다리를 북쪽으로 건너서 도착하는 역 이름을 써 봅시다.
  • 질문2 사진 좌측 철교와 관련된 선로 이름을 써 봅시다.
  • 질문3 사진 아래는 ‘자유의 다리’이다. 다리의 이름을 ‘자유의 다리’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시각자료 3

1972년에 세워진 임진각 전경이다.

  • 질문1 임진각 주변의 안보·국방 유적을 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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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모둠별로 임진철교를 비롯한 임진각 주변의 안보·국방 유적을 답사하기 위한 답사 계획서와 답사 자료집을 작성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모둠별로 임진철교 폭파 당시의 상황을 재연하기 위한 시나리오를 작성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모둠별로 자기 지역 6·25전적지를 답사하고 그들의 활동상과 보고 느낀 점을 보고서로 제출해 봅시다.

모둠활동 4
모둠별로 자기 지역의 6·25 전쟁 참전 용사를 방문하여 경험담을 구술 받아 정리해서 발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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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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