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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 집(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의 거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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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일제강점기 한·일·중·소 넘나들며 민족해방에 온몸을 바쳤습니다. 일본에서 신아동맹단을, 국내에서 사회혁명당을, 중국에서 고려공산당을 조직했으며, 상해임시정부를 개조하기 위하여 전 민족적 국민회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조국에 돌아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맡았습니다. 생사 넘나드는 옥고 14년에 맞은 해방의 감격 속에서 민족의 단합된 통일조국을 이루려 헌신하였으나, 국내의 정세에 환멸을 느껴 정계를 은퇴하고 낙향했습니다. 겨울 칼바람과 같은 공안당국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외딴 한 칸 토담집에서 통일의 봄꽃이 필 것이라는 믿음으로 의연하게 이겨냈습니다. 당신은 지조와 청빈으로 평생을 살았고 조국 한반도를 온몸으로 사랑했습니다. 여기 당신의 삶과 뜻을 기리고 민족통일의 열망을 담아 비를 세웁니다."

 

2004년 세워진 지운 김철수 선생 추모비문이다. 일제강점기 공산주의 운동을 이끌며 혁명의 꿈을 꾸었던 지운 김철수는 명백한 독립운동 공적이 있었지만 사회주의자였다는 이유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다가 사후 10년 뒤인 2005년, 광복 60주년을 기념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전북 부안군 백산면 하청리 123-22
현재 상태 원형보존 /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고 비교적 정리가 양호하지만 관리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김철수는 1912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인 1915년 다섯 명의 일본 유학생과 함께 독립운동 비밀결사를 결성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해 갔으며, 1916년에는 조선인, 중국인 20여 명과 함께 반일단체인 신아동맹단을 결성했다. 국내로 돌아온 그는 1920년 서울에서 사회주의단체 사회혁명당 조직에 참가했다. 같은 해 동년 7·8월경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고려공산당 상해파 결성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1922년 6월 고려공산당 임시연합의 간부로 선임되었고, 10월 고려공산당 베르흐네우진스크 연합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 무렵 독립운동계에서는 임시정부의 존재를 놓고 크게 논란이 되었는데, 이때 그는 이동휘·안창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 개조파의 일원으로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했다. 국민대표회의에서 생계위원 및 비서로 활동했으나, 국민대표회의가 유야무야되자 동년 5월 국내로 돌아왔다.

1925년 12월 조선공산당 조직부장이 되었고, 1926년 6·10만세사건을 계기로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이 일어나 간부진이 검거되자, 9월 제3차 조선공산당(일명 ML당)을 결성하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코민테른에 파견할 대표자로 선임되어 1927년 5월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 공산당 제2차 대회 승인을 받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조선 공산당 조직이 와해되는 과정에서 1928년 만주로 망명했다. 1929년 중국 지린성 돈화현에서 조선 공산당 재건설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이 되었으며, 그해 말 귀국하여 국내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활동을 하다가 1930년 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8년 출옥 후에도 활동을 계속하다가 1942년경 다시 체포되었으며, 1944년 징역 4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공주형무소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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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1915년 봄 당시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학부에 유학중이던 김철수는 장덕수 등 7명의 재일유학생들과 함께 다마천에 나가서 함께 목욕하고 손가락을 베어 피를 돌려 마시는 ‘열지동맹’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장차 상하이나 싱가포르, 만주, 시베리아 등지로 흩어져 서로 연락하면서 독립운동에 종사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후 회원 확대를 위해 노력하던 김철수는 그 해 가을 최익준, 하상연 등 새로운 동지들을 만나게 되고, 이들을 통해 중국인 유학생들과 만나 함께 일제에 맞서 민족 해방 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1916년 봄 김철수는 열지동맹 구성원들과 중국인, 그리고 대만인 유학생 40여 명과 함께 “아시아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새 아시아를 세우자”라는 목표를 세우고 비밀결사인 신아동맹당을 조직하였다. 이들이 결성한 신아 동맹당은 조선, 중국, 대만 등 일본의 침략을 받은 나라의 재일 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제국주의 일본 타도’라는 공동한 목표를 가진 민족 해방 운동 단체였으며 나아가 베트남과 인도 유학생들까지 회원으로 가입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실패하자 자신들의 이론과 실천력이 무기력함을 고민하던 지식인들에게 사회주의가 민족 해방의 새로운 이념으로 수용되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약소민족 해방 투쟁을 적극 지원할 것을 천명하고 나선 사회주의는 일본 제국주의 지배체제에 대한 강력한 대항의 이념으로 급속히 확대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김철수와 장덕수를 비롯한 신아 동맹당 구성원들은 1920년 6월 서울에서 비밀리에 개최된 신아 동맹당 제5차 대회를 통해 조직의 명칭을 사회 혁명당으로 변경하고, ‘계급 타파’와 ‘사유제도 타파’, ‘무산계급 전제정치’를 요지로 하는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1920년대 이래 동아시아 각국에는 사회주의가 당국의 탄압 속에서도 광범하게 유포되었다. 1922년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잡지 '신생활'은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러시아혁명 기념 특집을 게재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다가 이듬해 총독부에 의해 폐간되었다. 동아일보는 1925년 레닌 1주기 추도식을 수십 차례 보도했으며 조선일보는 1924년부터 1933년까지는 사회주의 신문으로서의 논조를 유지했다. 심지어 기독교 교회 안에도 사회주의가 파급되었다.

이제 각국에서는 사회주의를 신봉하고 사회 혁명을 논하지 않는다면 지식인 축에도 들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회주의는 젊은 식자층 사이에 급속하게 파급되어갔다. 마치 유행병처럼 확산된 사회주의는 일종의 '처세의 상식'이라는 치장용 지식으로 전락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혁명의 사상과 운동이 식민지 약소민족으로서 독립을 열망하는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하나의 커다란 희망의 등불이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 질문1 김철수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신아 동맹당에 중국, 대만 유학생들이 함께 참여하여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목표로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 질문2 1920년대 우리나라는 물론 동아시아 각국에서 사회주의가 급속히 확대된 배경은 무엇일까?

읽기자료 2

김철수는 1921년 5월 8인의 사회 혁명당 대표 및 이동휘·박진순 등과 상하이에서 고려혁명당을 결성하였다. 이때 이르쿠츠크파와 대립하는 상해파가 형성되었는데, 김철수는 양 파의 통일을 위해 1922년 11월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된 베르흐네우딘스크 연합대회에 합동간부로 참가하고 12월 상하이로 왔다. 그러나 1923년 국민 대표 회의에서 파벌간의 대립이 계속되자 실망하여 귀국하였다.

귀국 후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가 검거되어 1923년에 1년간의 거주 제한령을 받기도 하였으며 1925년 조선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5년 조선공산당을 이끌던 김재봉과 박헌영이 공산당의 조직을 확대하기 위해 몇몇 청년 당원들을 모스크바로 파견하여 체계적으로 교육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하다가 발각되어 일제 경찰에 박헌영 등 조직의 핵심 인물들이 대거 검거되고 조선 공산당이 해체되었는데 이를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이라 한다.

제1차 조선공산당이 해체된 이후에도 사회주의자들은 꾸준히 재건을 시도하여 1925년 12월에 서울에서 제2차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다. 제2차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는 강달영이었으며 김철수는 조직부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2차 조선공산당은 민족주의 세력과 연합하여 순종 황제의 국장일에 맞춰 3·1운동과 같은 대규모의 만세운동인 6·10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6·10만세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직이 발각되어 강달영, 권오설 등 주요 간부들이 대거 체포되면서 와해되었는데 이를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이라 한다.

1·2차 조선공산당에 모두 참여하였으나 다행히 일제의 검거를 피하고 남아있던 김철수는 1926년 9월 사회주의 세력들을 규합하여 제3차 조선공산당을 결성하고 초대 책임비서가 되었다. 이 때 조선공산당은 단일의 민족 혁명 전선 조직 방침아래 민족주의 진영과 연합하여 신간회를 결성하고 민족 유일당 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그러나 3차 조선공산당 역시 1928년 간부와 당원들이 대거 체포되면서 결국 와해되고 말았는데 이를 3차 조선공산당 사건이라 한다.

이 때 체포를 면한 차금봉 등이 중심이 되어 4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였으나 이들도 1929년 6월 제4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으로 다시 와해되자 김철수는 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만주 지린성 둔화현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설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김철수는 12월 국내로 잠입하여 공산당 재건을 위해 활동하다가 검거되었고, 조선공산당은 일제의 계속된 탄압으로 해방될 때까지 재건되지 못하였다.

검거된 김철수는 이듬해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1938년 출감하였다. 그러나 사상 전향을 하지 않아 1940년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으로 서대문형무소에 다시 수감되었고, 공주형무소로 옮겨 복역하다 광복 직후인 8월 17일에 석방되었다.

  • 질문1 김철수가 조선 공산당의 책임비서로 활동한 시기는 언제인가?
  • 질문2 김철수가 조선 공산당의 책임비서로 활동하던 시기에 전개된 민족 유일당 운동에 대하여 간단히 정리해 봅시다.

읽기자료 3

해방 이틀 후에 공주 감옥소에서 출옥한 김철수는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서로 통일이 되어야 비로소 완전한 독립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때 이승만이 정당통일을 목적으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하자 김철수는 공산당대표로 참여하여 박헌영과 이승만 사이에서 좌익과 우익의 가교 역할을 자임하였지만 좌우익의 비협조로 실패하고 만다. 김철수는 “원래 좌나 우가 같이 필요하다. 보수도 있고 진보도 있어야 발전하는 것”이라며 당파성을 초월하고자 했으나 그러한 노력은 빛을 보지 못했다. 김철수는 박헌영과 당내 갈등을 빚은 뒤 당으로부터 정권 처분을 받고 별도의 사회노동당 창당에 나섰지만 1947년 2월 이승만에 의해 사회노동당이 해체되자 ‘그만 죽고 싶은 심정’이라 토로하고 정치은퇴를 선언하고 부안 백산으로 낙향하였다.

고향으로 내려온 김철수는 손수 지은 토담집을 ‘이 정도면 편안하다’ 뜻의 ‘이안실(易安室)’이라 이름 짓고 살았다. 그러나 그의 삶은 그다지 편안하지는 못하였다. 명백한 독립운동 공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자였다는 이유로 1급 감시대상으로 분류돼 한평생 공안당국의 감시를 받아야 했고, 또 사회주의자이면서도 민족적이고 유교적인 성향 때문에 북한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한, 남북 분단의 현실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2005년 광복 60돌을 맞이하며 정부는 사회주의 계열을 포함한 모든 분야에서 독립운동을 한 유공자를 포상한다는 새로운 포상 기준을 만들어 그동안 소외되었던 좌파 독립운동가들을 재평가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포상 기준에 의하여 그동안 포상이 보류 되었던 2만 6천여 명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으며, 김철수에게 건국훈장이 수여되는 등 늦게나마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 유공자들의 공적을 기릴 수 있게 되었다.

  • 질문1 해방 이후 김철수가 정치 은퇴를 선언하고 낙향한 이유는 무엇인가?
  • 질문2 명백한 독립운동 공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철수가 오랫동안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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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은 김철수가 일본 유학시절에 찍은 사진이다. 앞줄 왼쪽부터 최두선(최남선의 동생), 남길두, 장덕수, 김철수, 윤홍섭, 최익준, 정상형, 양원모, 중간 줄 왼쪽부터 김영수, 춘원 이광수, 김성녀, 송계백, 백남훈, 서상호, 노준영, 신익희 뒷줄 왼쪽부터 김명식, 김양수, 이병도, 김종필, 한상윤, 고지명, 이현규이다.

  • 질문1 사진 아래쪽에 보면 단기 4247년이라는 연도 표기가 보인다. 단기 4247년을 서기로 환산하면 몇 년인가?
  • 질문2 사진에 보이는 인물들 가운데에서 역사교과서에 그 이름이 실려 있는 사람들을 찾아 주요 활동을 간단히 정리해 봅시다.

시각자료 2

다음은 동아일보 1931년 2월 1일자 기사로 부흥 조선 공산당 관련하여 김철수 등 공산운동 정예분자 23명을 공판에 회부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 질문1 김철수가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된 이유는 무엇일까?
  • 질문2 당시 재판에 회부된 김철수는 어떤 판결을 받았을까? 그리고 유죄 판결을 근거가 된 법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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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1931년 김철수는 조선공산당 재건 사건으로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재판부가 김철수에게 선고하였을 판결문을 치안유지법의 성격을 바탕으로 추정하여 만들어 봅시다.

모둠활동 2
김철수의 경우처럼 명백한 독립운동 공적이 있었지만 사회주의자였다는 이유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다가 사후에 재평가가 이루어진 사례를 조사해 정리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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