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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단 결성지(경기지역 민간 유격대의 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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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단 공적비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괴 김일성은 무력 적화통일의 야욕으로 불법 남침을 자행했다. 고양, 파주 일원에서 서울로 통학하던 경의선 열차 통학생을 주축으로 애국 학생 240명은 지하결사대인 태극단을 조직하고 동년 9월 28일 서울 수복 시까지 3개월에 걸쳐 적 치하에서 적의 보급로 차단 의용군 강제소집, 방해 삐라살포, 격문부착, 애국인사 구출 등 저항활동으로 인민군 후방을 교란하였으며 1951년 1월 4일 이후에는 일부 단원이 국방부 정훈국 및 육군 유격대에 편입, 국군과 함께 실전에 참가하여 용맹을 떨치었다.

이곳에는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투쟁하다 학살당한 45위와 유격전에서 전사한 모두 51위의 순국 태극단원이 잠들고 있다.

이에 우리 고양청년회의소 회원들은 거룩한 선배의 애국정신과 불멸의 반공업적을 길이 후세에 전하고자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우나이다.

1986. 10. 10.

고양청년회의소

회장 박성재외 회원 일동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덕이동 산 46-2번지
현재 상태 변형, 태극단 결성지는 북한군에 의해 희생된 희생자 묘소와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태극단은 북한군 치하에서 각 지역별로 자생적으로 형성되어 전체적으로 통합된 반공투쟁단체였다. 이들은 전쟁기간 동안 국군으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했으며 훈련된 간부도 없었지만 최선을 다해 반공투쟁을 전개했다.

태극단은 북한군 남침 직후인 1950년 6월 말부터 시작하여 수색, 금촌, 백마, 청석, 산남, 교하, 능곡, 광탄, 송포 등지에서 지하무장조직으로 결성되어 8월 중순 무렵 거의 조직을 견고히 하였다. 이후 수색을 기점으로 하여 서울, 수색, 능곡, 일산, 금촌, 문산에 이르기까지 경의선을 따라 조직이 일원화 되었으며, 그 후 일산의 이장복 휘하에 통합되었다. 태극단은 고양군 덕이리에서 조직을 꾸리고, 단장 이장복, 총무 안영근 등이 작전활동을 계획하여 다양한 반공유격활동을 전개하였고, 9·28 서울 수복 무렵에는 대원들이 약 40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들 중 일부는 국방부 선무공작대원(전시나 사변으로 군대가 출병하여 적국의 영토를 점령하였을 때, 그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을 군에 협력하도록 하거나 적어도 적대행위를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행하는 선전·원조 등의 활동을 하는 대원)으로 들어가 활동하기도 했는데 1950년 12월 9일 입교하여 동년 12월 23일 졸업한 후 북한군 복장으로 전후방에 투입되어 정보활동을 전개하였다.

태극단의 활동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제한된 지역에서 이루어졌으나, 북한군 치하에서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활동이었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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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북한군의 남침한 지 불과 3일 만에 경기도 고양과 파주지역이 그들의 수중으로 넘어가자,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청년들은 곳곳에서 향토를 지키고 조국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투쟁할 것으로 결의하였다.

1950년 6월 27일 금촌에 살고 있는 경성상공중학교 4학년생 이순창은 동생인 휘문중학교 3학년생 이순호와 함께 금촌역 부근에서 M1 소총 3정을 습득하였다. 국군 제1사단이 한강 이남으로 철수를 완료한 6월 29일 이순창은 경기사범학교 3학년생인 김경규, 경성상공중학교 4학년생인 황상균과 함께 수색에 있는 제1사단 사령부 영내로 잠입하여 배낭 세 개에다 수류탄 10여 발씩을 챙겨 이를 김경규 집에다 숨겨 두었다. M1 소총 3정과 수류탄 30여 발을 획득한 이들 4명의 학생들은 반공 투쟁에 뜻을 모아 태극기에다 혈서로 ‘대한민국 지하 공작대’라고 쓴 다음 반공투쟁에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였다.

7월 1일 백마에서 호국군 출신이었던 강화신, 송태성이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기보다는 고기값이라도 하고 죽자는 맹세”를 하고 박영수(한양공업중학 4학년생), 배정균(백마 초등학교 교사) 등을 포섭하고 무기를 수집했다. 그 후 국군 낙오 장병 이승환 대위, 이학주 중사 등이 가담하였다.

3일 청석에서 윤석만(숭문중 6학년생)은 친구인 황세영(경기공업 6학년생)과 함께 청석지구 비밀결사대를 조직하고 동지를 모았다.

이 무렵 파주군 교하에서도 윤훈용(인천중 5학년생), 박우호(한성중 5학년생) 등이 조국을 위해 결사 투쟁할 것을 결의한 후 대원을 모으던 중 서울에서 피난 온 이기호(태양신문사 사원), 윤영세(농업은행원) 등이 합류해 구국결사대를 조직했다.

7월 5일 경기도 고양군 중면 일산리 삼정부락에서 김복환(21세, 서라벌 예술학교생)과 이장복(26세, 교통부 육운국 근무)을 중심으로 안영근(22세, 교통부 서울 검사사무소), 박정량(21세, 교통부), 홍원식(20세, 경성전기중학교 5학년생), 최희성(20세, 성동공업학교 5학년생), 이승국(19세, 서울공업학교 4학년생) 등이 모여 조국을 위해 신명을 바칠 것을 혈서로 맹세하고 태극단(일명 TK)을 조직하여 반공투쟁에 나섰다. 단장은 이장복, 총무 안영근, 조직 홍원식, 정보 김복환 등 책임부서를 정하고, 김복환을 고양군 민청에 가입시켜 각종 정보를 수집하게 하였다. 당시 신학생이었던 김봉호가 태극단이라고 제안한 이유는 태극기를 지킨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 질문1 각 지역에서 구국결사대를 결성한 배경을 써 봅시다.
  • 질문2 구국결사대가 결성된 지역명을 써 봅시다.
  • 질문3 금촌에서 결성된 구국결사대의 이름을 써 봅시다.
  • 질문4 고양군 삼정부락의 구국결사대의 이름을 ‘태극단’이라고 지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5 태극단에서 김복환을 고양군 민청에 가입시킨 이유를 써 봅시다.

읽기자료 2

이와 같이 여러 지역에서 결사대가 조직되어 각기 조직을 결성했으나, 세력이 미약할 뿐만 아니라 주로 나이 어린 학생들이라 총기를 다룰 줄 모르고 결사대를 이끌어 나갈 역량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므로 8월 초순까지 태극단과 금촌의 이순창이 주동이 되어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단체들이 동일한 목적이라면 통합하는 데에 뜻을 모았고, 한편으로 새로 조직을 확대했다. 마침 각지의 결사대원들이 대부분 경의선 통학생들로 통학하는 동안 차안에서 익힌 친분과 평소의 행동에 나타난 사상 등을 감안해 각 마을마다 조직이 이루어졌으므로 쉽게 통합이 이루어졌다. 지리적으로 경의선 중심에 위치했던 일산에 본부를 두고 수색으로부터 문산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태극단은 경기도 파주군과 고양군내의 금촌, 백마, 청석, 산남, 교하, 지도(능곡), 광탄, 송포 등지의 학생, 공무원, 농민, 상인, 국군 및 경찰 낙오자들을 총망라하여 각 지역별로 지단을 조직했다. 별동대(이순창), 파주군단(이기호), 수색지단(조성구), 송포지단(황인성), 능곡지단(홍순성), 금촌지단(신국범), 광탄지단(이정구), 백마지단(이길환), 산남지단(김봉호) 등이 중심이 되었다. 각 지단별 연락은 파주군단과 송포지단 김병숙, 이아가다 등 여자단원과 홍원식, 능곡지단 이병렬, 금촌지단 이순창, 광탄지단 황규현, 백마지단 김복환 등이 담당하였다.

  • 질문1 각 지역에 결성된 구국결사대를 태극단으로 통합하게 된 이유 세 가지를 써 봅시다.
  • 질문2 태극단이 활약한 지역명을 써 봅시다.
  • 질문3 태극단에 입단한 단원들의 신분 종류를 모두 써 봅시다.

읽기자료 3

단원은 태극표지의 도장이 찍힌 머리띠와 흉장을 만들어 단원들 사이의 식별과 국군이 북진할 때 좌익들과 구별하도록 하였다. 대원들 가운데 공무원, 회사원 등도 있었으나 학생들이 많아서 자신들을 ‘반공학생유격대’라고 인식하기도 하였다.

본부에서는 전단의 원고 작성을 비롯해 각 지단의 조직을 지도했고, 라디오를 듣고 분석해 하부에 통보하였다. 각 지단은 반드시 본부의 지령에만 의하지 않고 조를 만들어 투쟁하기도 했다. 대원의 규모는 9·28 수복 이전까지 240명으로 경기관총 1정을 비롯한 각종 소총 54정, 수류탄 270여 발, 실탄 수천 발을 보유하게 된 큰 결사대로 성장하였다.

1950년 7월초부터 3개월 동안 반공투쟁을 전개해왔던 단원들은 서울 수복 이후인 10월 초순에 무장하고 있던 모든 장비들을 군에 반납하고 군대 입대 연령이 넘는 경우는 귀가하였다. 그 외 이장복 단장 이하 100여 명의 단원이 서울 서대문구 창천초등학교에서 국방부 정훈국의 별동대원으로 대북 선무공작요원 교육을 받았으나 이들이 전부 편성되지는 않았다. 10여 명만 정훈국으로 선발되었고, 이기호 등 40여 명은 방위군으로 입대해 노무사단으로 갔다. 그 외 38명은 청량리에 있는 서울 농업학교에서 2주간 첩보 및 유격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같은 해 12월말에 각 사단 첩보공작대에 파견되었다. 그런데 첩보대에 소속되어 복무했기 때문에 전쟁 시기 행정상 병역기피자로 처리되어 휴전 후 국군으로 재입대했다고 한다.

  • 질문1 태극단의 대원은 주로 어떤 신분이었나요?
  • 질문2 9·28 수복 이전의 태극단 단원수와 무장 규모를 써 봅시다.
  • 질문3 9·28 수복 이후 단원들이 택한 투쟁의 방법 세 가지를 써 봅시다.

읽기자료 4

태극단 본부에서는 포고문, 벽보와 전단 제작 및 살포, 철로 파괴, 북한군의 통신망 절단 등 유격전을 전개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강제 동원된 의용군의 분산 도피 지원, 부역자 명단 작성 등도 결의했다.

이에 따라 1950년 7월말 수색지역에서 의용군으로 강제 징병당한 30여 명을 도피시킨데 이어, 8월초 전화선을 절단하여 북한의 통신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주요 성과로는 지역주민에게 전단 제작 살포, 경의선 철도 탈선 및 보급열차 파괴 등이었다.

  • 질문1 태극단 본부에서 결정한 유격전에는 어떤 방법이 있었나요?

읽기자료 5

전단제작과 살포를 통해 심리전을 수행했다. 이러한 심리전 활동은 북한군 점령 지역아래 있는 주민들에게 희망과 사기를 제고시키는 효과가 컸다. 7월 20일 “적귀들의 침략 하에 비록 있다 하더라도 그대들은 적귀의 앞잡이가 되지 말라! 적귀들의 기관에 관계하고 있는 자들은 금일 중으로 사퇴하고 타 지방으로 도피하라! 불법 남침한 적귀들은 성지(聖地)에서 떠나 만주 이북으로 가라! 본 포고를 준수치 않는 자는 금후 1주일 내에 가족과 더불어 멸살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포고문을 작성하여 와동리 인민위원회 건물 벽과 주요 도로변에 부착하여 공산분자들을 당혹케 하였다.

1950년 8월 10일 청석지단장 황세영(경기공업중학 6년생)이 태극단 본부를 방문했을 때 이장복 단장이 전단 원문을 작성해 제작 살포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황세영이 청석초등학교 교사 김은화에게 뜻을 전달하자 동료 교사인 윤자설, 정태경, 이영무 등이 학교 창고에서 몰래 제작하였다. 전단에 TK 혹은 ‘태극’을 크게 넣었다. 그 내용은,

 

"① 유엔군이 참전하여 곧 전면 반격 수복될 것이다.
② 소위 의용군이나 복구 작업 동원을 기피하라.
③ 북괴는 모든 자유가 없는 생지옥이니 이들의 기만 선전에 속지 말고 모든 협조를 거부할 것이며 반역 행위를 하지 말라.
④ 애국 인사와 반공 인사는 즉시 피신하라.
⑤ 우리 TK단은 여러분의 자유를 위하여 결사 투쟁하겠으며 여러분을 보호할 것이다."

 

등이었다.

이 전단의 살포는 황인갑(문산초등학교 교사)이 임진강 근처에 살아 그곳 지리에 밝았던 관계로 임진강 독개다리 복구 공사장 부근에 살포하였다. 그는 노력 동원에 참가한 주민에게 비행기 출현 시기를 이용하여 비행기가 살포한 것으로 위장해 살포하는 기지를 발휘하였다. 8월 27일과 9월 1일에 윤훈용(인천중학교 5학년)이 전단을 고양과 파주 일대에 살포하였다.

  • 질문1 전단 살포를 통한 심리전 수행은 어떤 효과가 있었는지 써 봅시다.
  • 질문2 7월 20일 포고문을 부착한 지역은 어디였나요?
  • 질문3 임진강 독개다리 복구 공사장 부근에 살포된 전단이 제작된 장소를 써 봅시다.
  • 질문4 윤훈용이 전단을 살포한 지역은 어느 지역이었나요?

읽기자료 6

단원들의 활동지역이 경의선 주변이어서 철로파괴 활동을 전개하였다. 1950년 9월 19일 철도교환원인 류춘화(수색지단)가 철도 전화로 피랍인사를 태운 열차가 수색을 통과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따라 조성구, 민두식이 주위를 감시하고, 정은수 주도 아래 이순창, 김경규는 화전역 북방 800미터 지점에서 약 10m 가량의 철길 개못을 뽑아내고 직결 나사를 풀어놓았다. 그런데 마침 북한에서 탄환을 가득 싣고 남하하는 북한군 탄약 수송 열차 12량을 탈선시켰다. 이에 대한 복구 작업이 끝나기 전에 이를 발견한 유엔 공군기가 폭격을 가해 열차에 적재되어 있던 탄약을 폭파시켰다.

9월 21일 수색지단의 이수만 등이 서울방면의 북한군에게 보급하기 위해 난지도 강변에 착륙시키려는 식량수송선을 발견해 수류탄으로 침몰시켰다. 또한 태극단은 문산역 북쪽 2㎞ 지점에 있는 터널(일명 여우굴) 속에 북한군의 포탄이 저장되어 있는 사실을 탐지하고, 유엔군 항공기가 이 터널을 폭파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전지(全紙) 4배 크기로 인공기를 그려 여우굴 뒷산에다 펴놓았다. 다음날 단원들의 의도대로 경의선 상공을 비행하던 유엔 전폭기 1개 편대가 그 표적에 로켓포 공격을 가하여 터널 속의 포탄을 폭파시켰다.

이러한 성과가 커지자, 조직이 점차 노출되어 북한 내무서원들의 추적을 받아 9월 중순 이후에는 희생자가 많았다. 1950년 9월 15일 이응복은 북한 보안대원에게 발각되어 총살되었고, 20일경 이병렬도 체포된 후 시체로 발견되었다. 특히 파주 지구인 산남지단에서 13명, 청석지단에서 4명, 금촌 지구에서 8명(2명은 도중에 탈출)의 단원이 각각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한 후 고양군 송포면 덕이리에서 학살을 당하였고, 이 과정에서 내무서원들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전사한 단원도 11명에 이르렀다. 9월 20일 내무서를 공격하려다 발각되어 고양시 출신 단원 16명, 파주군 출신 29명이 희생되었다. 이 외에 다른 우익인사 등 50여 명이 학살되었다.

유엔군이 인천 상륙작전을 단행한 이후, 미 해병 제1사단으로부터 탱크를 지원 받아 태극단은 북한군 패잔병 소탕작전을 전개하여 9월 하순 일산을 수복하였다.

  • 질문1 9월 19일 철로파괴 활동의 성과를 써 봅시다.
  • 질문2 9월 21일 난지도에서는 어떤 성과를 거뒀나요?
  • 질문3 문산역 부근 여우굴에 인공기를 제작해 펴놓은 이유를 써 봅시다.
  • 질문4 태극단의 피해가 커지기 시작한 시기는 어느 때부터인가요?
  • 질문5 9월 20일 태극단원이 희생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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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현충탑과 태극단 합동묘지 전경이다.

  • 질문1 이곳에 현충탑과 태극단 합동묘지를 조성한 이유를 써 봅시다.

시각자료 2

사진은 파주 청석초등학교에 세워진 태극단원 교사추모동상이다.

  • 질문1 청석초등학교에 태극단원 교사추모동상이 세워진 이유를 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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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모둠별로 태극단의 활동을 극화하기 위한 시나리오를 작성하여 시연하여 봅시다.
모둠활동 2
모둠별로 태극단원의 입장에서 시민에게 배포할 전문을 작성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모둠별로 자기 지역에 건립된 호국영렬들을 추모하는 추모탑이나 기념탑, 또는 6·25전적지를 답사하고 그들의 활동상과 보고 느낀 점을 보고서로 제출해 봅시다
모둠활동 4
모둠별로 자기 지역의 6·25 전쟁 참전 용사를 방문하여 경험담을 구술 받아 정리해서 발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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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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