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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리고개-애국인사 납북로(한이 서린 애국인사 납북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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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의 미아리 고개


1절

미아리 눈물고개 임이 떠난 이별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사 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고개



대사

여보! 당신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잊을래야 잊을 수 없었던 그때 그날
나는 당신이 떠나시는 모습을 뒤로 한 채
어린 것을 등에 없고 폐허가 된 거리를 헤매이면서
한없이 흐르는 눈물로 어린 것의 두 뺨을 적시곤 했답니다.
여보! 우리는 왜 한 핏줄이요 한 형제이거늘
왜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서로를 증오해야만 한단 말입니까?
우리들의 젊은 날들은 아픔과 고통으로 얼룩진 채
이젠 백발이 되었어요.
여보! 제발 백발이 되었더래도 좋으니 꼭 살아만 계세요.
머지 알아 우리 민족이 서로 만나 한 자리에 모이는 날
우리는 서로를 얼싸 안고 마음껏 자유를 외치면서 행복하게 살날을 다짐하면서
다시는 이 땅 위에 우리와 같은 비극이 없기를
하늘을 우러러 간절히 빌겠어요. 여보!



2절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 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을 하오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 넘던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고개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이해연 노래(1956년)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28 미아리고개 공원 앞
현재 상태 변형, 당시 흔적은 남아 있지 않으나, 표석, 사적비 등이 설치되어 있다.

미아리고개는 북한군이 수많은 애국인사를 북한으로 납치했던 통로였다. 6·25 전쟁 시기 납북자 규모는 최대 1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행히 최근 한국전쟁납북사건 자료원에서 납북자의 이름과 주소, 생사확인 등을 활발하게 조사하고 있다.

국회의원, 교수, 문인, 종교인, 기술자 등은 이미 1950년 6월 하순부터 납북되기 시작했다. 미아리고개는 수많은 납북자들이 철사 줄에 매여 북에 끌려감으로써 ‘단장(매우 슬퍼 창자가 끊어지는 듯함)’의 한이 서린 지역이 되었다. 1956년 반야월은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발표하여 전후 국민들에게 커다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현재 미아리고개 공원 사적비가 세워져 있으며, 2001년 6·25납북인사가족협의회에서 ‘납북길 따라 걷기’ 행사를 개최하였다. 전쟁 초기 미아리고개는 개운산 중턱으로 국군이 진지를 구축하여 북한군과 대항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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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읽기자료 1

서울 돈암동에서 길음동으로 이어지는 ‘미아리 고개’는 우리 역사의 마디마디마다 등장하는 고갯길이다. 그때그때 불리어진 이름에서 고개의 역사가 담겨있다. 예전에는 이 고개를 ‘되너미 고개’라 불렀다. 그 유래는 병자호란 때 되놈[만주족]들이 이 고개를 넘어 침입했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과 고갯길의 경사가 심해 고갯마루에 오르다 보면 다시 밥을 먹어야 된다는 뜻으로, 즉 밥을 ‘되(다시)는 고개’라는 말이 변해 한자음 돈암(敦岩)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18세기 중엽에 발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산금표도』에는 호유현(胡踰峴)으로, 겸재 정선의 ‘도성대지도’, 고산자 김정호의 ‘수선전도’ 등 대부분 지도에는 적유현(狄逾峴)이라는 이름으로 쓰여 있다. 또 돈암현(敦岩峴)도 보인다. 이외에도 ‘되너미’에서 접두어 ‘되’는 ‘일이 힘에 벅차다.’는 뜻을 지닌 순우리말 형용사 ‘되다’에서 온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미아리 고개는 우리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병자호란 때에는 청 태조가 12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와서 이 고개를 넘었다. 또한 병자호란 이후 조선 여자들이 청나라로 잡혀가면서 울던 한(恨)의 고개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삼양로 좌우 야산과 미아 제3·4동 일대에 ‘한국인 전용 공동묘지’가 있었다. 서울시내에서 그 공동묘지로 가는 길은 미아리고개뿐이어서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거나 보내면서 울면서 넘던 고개였다.

6·25 전쟁 때에는 북한군이 미아리 고개를 넘어 서울을 점령하였다. 6·25 전쟁 중에는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사 10만 여 명이 강제로 쇠사슬에 묶여 북한으로 끌려가며 넘던 고개였다. 작사가 반야월의 ‘단장의 미아리고개’의 노랫말은 당시의 아픔을 바탕으로 지어졌다.

‘언덕에서 쉬어 간다.’는 뜻의 미아(彌阿)라는 지명은 구한말 고종(高宗) 초 공식기록에 처음 나타나는데 그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미아리 고개는 예전엔 마차가 다니지 못할 정도로 매우 경사지고 험준한 고개였으나 196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변신을 거듭했다. 고개 정상에 노래비, 미아리고개 유래비, 휴식처를 갖춘 소공원이 탄생하였고, ‘아리랑아트홀’이 자리 잡았다. 또한 도로도 8차선으로 확장되고 육교 대신 구름다리가 들어섰다.


  • 질문1 미아리 고개의 위치를 써 봅시다.
  • 질문2 미아리 고개가 되너미 고개라고 불린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애국인사 납북로였던 미아리 고개를 소재로 한 유행가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2

6월 26일 13시, 의정부가 북한군에게 점령됐다. 전방에서 철수한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은 창동을 중심으로 도봉산-수락산을 연결하는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했다. 그러나 27일 오전, 아군 부대들이 미처 방어진지를 편성하기도 전에 40여 대의 전차와 자주포로 증강된 적의 공격을 받게 되자 방어 부대들은 창동지역을 포기하고 미아리, 태릉 일대로 분산 철수했다.

그 무렵 제5사단장 이응준 소장이 미아리 일대에서 새로운 방어 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부대를 수습한 제7사단은 제5사단과 함께 정릉-미아리-청량리를 잇는 ‘미아리 방어선’을 구축하고, 두 사람이 방어지역을 동서로 나누어 각각 지휘하기로 했다. 그들은 그곳의 지형이 방어에 유리하므로 도로만 차단하면 적 전차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전력을 다해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27일 밤,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적의 공격이 재개됐다. 야간이었지만 전차를 앞세운 적은 미아리 삼거리에 설치해 둔 장애물을 쉽게 밀어제치고 길음교를 통과해 서울 도심으로 진출했다. 적 전차가 시내로 진입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미아리 방어선을 지키고 있던 국군 장병들은 다음날 날이 밝은 후 적의 습격을 받고 분산 철수하기 시작했다.

미아리 방어선의 붕괴는 서울 방어를 위한 최후 방어선의 붕괴였다. 미아리 방어선 붕괴로 적 전차가 시내에 진입함에 따라 서울 시가지는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시내 곳곳에 차량·목책 등으로 긴급히 장애물을 설치하는 방안이 강구되었지만 효과적인 저항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전쟁 때 서울에서 시가전을 실시하는 방안은 원래부터 고려되지 않았다. 따라서 6월 28일 날이 밝으면서부터 서울은 북한군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됐다.


  • 질문1 제7사단이 창동지역 방어를 포기한 이유를 써 봅시다.
  • 질문2 미아리 방어선을 구축한 부대 이름을 써 봅시다.
  • 질문3 미아리 방어선이 붕괴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4 미아리 방어선의 붕괴는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써 봅시다.
  • 질문5 서울이 북한군의 지배하에 놓인 때는 언제인가요?

읽기자료 3

6·25 전쟁 기간 중 발생한 납북자의 전체 규모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6·25 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의 노력으로 94,700여 명의 명단을 정리하여 그 대략을 짐작할 뿐이다.

지금까지 협의회는 모두 5종류의 6·25 전쟁 납북자 명단을 발굴했다. 즉, 2002년 3월 「6·25사변 피납치자 명부」를 찾아낸 후 성명, 성별, 연령, 직업, 소속 및 직위, 납치 연월일, 납치 장소, 주소 등 총 94,700명의 납북자 정보를 수록한 명부를 발간하였다. 이 숫자는 1953년 내무부 『대한민국 통계연감』에서 기록한 민간인 납치자 84,532명을 훨씬 넘어선 것이다. 이후 협의회는 전시 납북자 수를 96,010명으로, 또 96,013명으로 수정 발표한 바 있다.

또 협의회는 2007년 5월 외교통상부 외교정책자료실에 소장된 『남북한 관계 사료집』 12권(국사편찬위원회 간)에서 6·25 전쟁 당시 북한으로 끌려간 사람은 모두 126,325명이라는 통계를 담은 새로운 비밀 외교문서를 찾아내기도 했다. 이 문서는 1949년 초대 주한 미국대사로 부임한 존 무초가 1952년 1월 4일 유엔군사령관에게 보낸 긴급 비밀문서인데, 여기에는 “한국 내무부가 작성한 광범위한 피랍자 명단이 발견됐으며, 그 수는 126,325명”이라는 내용이 있다(다만 여기에는 다수의 월북자가 포함돼 있다는 것이 협의회 측 분석이다).

이처럼 전시 납북자의 수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다만 8만~12만 명으로 추정할 뿐이다.


  • 질문1 6·25 전쟁 기간 중 발생한 납북자의 규모를 파악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단체 이름을 써 봅시다.
  • 질문2 현재 파악된 6·25 전쟁 기간 중 발생한 납북자의 규모는 얼마인가요?
  • 질문3 6·25 전쟁 기간 중 발생한 납북자의 규모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 문서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4

납북의 유형은 위장 납북과 색출 납북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위장 납북은 자수, 관광, 모셔오기 작전, 전출, 소집 등의 명목으로 납북하는 것을 말한다. 북한 군관들이 집에 와서 잠시 물어볼 것이 있다며 데리고 간 후 납북되는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 둘째, 색출 납북은 숨어 있는 대상자를 색출하여 납북하는 것을 말한다.

납북 경로와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크게 보면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 내무서와 정치보위부에서 자술서를 수차례 쓰도록 하는 등 조사를 한 후 형무소에 감금하였다가, 이후 전세가 불리해지자 1950년 9월 중순경 밤에 수갑을 채운 채 전차에 태워 청량리로 이송하여 잠시 동안 대학 예과 강당에 유치한 다음,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후(이튿날 밤부터인 경우가 많다) 포승줄로 묶어 철저한 감시하에 3,000명 이상 집단으로, 또한 도보로 납북시키는 경우다. 이러한 경우는 통상 연천을 거쳐 황해도 시별리를 지나 평양교도소에 수감되었다고 한다. 둘째, 피랍자를 학교 등 공공장소에 연금했다가 바로 납북하거나 또는 의용군이라는 미명하에 전쟁터로 내보내는 경우다. 셋째, 이 밖에 몇몇 유명 정치인들은 7월경 차량 편으로 납북이 시작되었는데, 미군의 폭격 등을 우려하여 어느 순간부터 차량에서 내려 도보로 이동, 산길로 접어들고 걸어서 납북되는 경우가 있다.



  • 질문1 북의 형태 중 위장 납북은 어떠한 방법을 말하나요?
  • 질문2 납북 경로와 형태를 세 가지로 정리해 봅시다.

읽기자료 5

6·25 전쟁 시기 납북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납북이 피랍자의 자택이나 그 근처에서 실행된 경우가 80.3%에 이른다. 또한 전시 납북자들은 시기적으로 볼 때 전쟁 직후인 3개월 안에 88.2%가 납치되었다. 이는 전시 납북이 전쟁 목적과 관련이 있고 사전 계획에 의해 조직적이고도 치밀하게 이루어졌음을 말해 준다. 이와 관련, 『남북한 관계 사료집』 16권에 있는 1950년 10일 11일자 「일본 동경 주재 미국대사관에서 서울 상황에 대해 본국에 보고한 서한」에서는 “점령 마지막 며칠간 공산당은 대한민국에 충성한 음악가, 목사, 공무원, 사업가와 같은 사람들과 무기를 운송할 수 있는 청년들을 북반부로 전출하는 데 몰두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기록은 납북 대상자가 선발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둘째, 납북 당시의 나이가 16세부터 35세까지의 청장년층이 84.6%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성별에서 남자가 98.1%에 이르고 여자의 경우도 간호사와 같이 직업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북한 당국이 사회주의 체제 건설에 필요한 인력을 선별해 끌고 갔음을 알려주고 있다.

셋째, 직업별로 전시 납북자 현황을 보면, 농업이 58,373명으로 제일 많고 무직(5,208명), 상업(4,797명), 노동(3,984명), 행정공무원(2,919명), 기술자(2,836명)의 순으로 나타난다. 전문직 중심으로 나열하면, 행정공무원(2,919명), 경찰(1,613명), 군인·군속(879명), 교수 및 교원 (863명), 의사·약사(526명), 종교인(217명),정치인(국회의원 63명 포함 169명), 언론인(164명), 변호사(100명), 판·검사(90명), 예술인(84명) 순이 된다.

그러나 위의 숫자는 단순 비교하거나 순위를 매기는 것은 부적절한 점이 있다. 예컨대 전체 96,000여 명의 납북자 중 법조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작지만 이를 단순한 수치로 파악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질적으로 따져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기 때문이다. 6·25 전쟁 당시 전체 법조인은 대략 650여 명을 헤아리는데. 납북 법조인의 수가 190명이면,29%를 차지하는 것이고 이로 인해 한국의 법조계는 반신불구가 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시 납북은 1차,2차 및 3차 산업에 종사하는 생산직 근로자를 망라하고 있다. 또, 북한의 행정 인프라 구축에 필요한 공무원이 다수 납치당해 끌려간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북한은 경찰, 군인, 교수 및 교사, 의사·약사, 변호사 및 판· 검사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지식인 계층의 전문직 종사자를 납치해 갔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북한은 일시에 대한민국의 국가 해체를 기도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특히 지식인과 전문직 종사자의 납북은 1946년 7월 31일자 김일성의 「남조선에서 인테리들을 데려올 데 대하여」라는 담화문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김일성은 이 담화문에서 ‘부족한 인테리 문제를 해결하자면 북조선에 있는 인테리들을 찾아내는 한편, 남조선에 있는 인테리들올 데려와야 합니다.’라고 강조했었다. 이에 따라 조선 노동당은 남한에서 데려올 대상자 명단을 작성하였고 전쟁 도발 직후 이 명단에 의해 강제 납북이 실행된 것이다.

  • 질문1 장소와 시기 면에서 6·25 전쟁 시기 납북의 특징을 써 봅시다.
  • 질문2 『남북한 관계 사료집』16권에서 볼 수 있는 6·25 전쟁 시기 납북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 질문3 나이와 성별 면에서 6·25 전쟁 시기 납북의 특징을 써 봅시다.
  • 질문4 직업별로 전시 납북자 중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직업은 무엇인가요?
  • 질문5 생산직 근로자, 행정공무원, 지식인 계층 전문직 종사자를 납치한 목적을 써 봅시다.

읽기자료 6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즉각 활용 가치가 있는 지도층 인사들을 찾기 위한 수색 작전에 착수했다. 인민군온 가택 수색을 통해 공무원, 군경, 국회의원, 법조인, 언론인, 종교인, 교육인 등 사회 지도급 인사들이 체제에 협조하도록 방송과 신문을 통해 선무공작을 벌였다.

인민군은 1950년 7월 정·관계 요인, 공무원, 의료인, 문화예술인, 법조인, 학자, 언론인, 실업가 등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사를 1차로 납북했고 1950년 8월 중순경부터 9월 28일 서울 수복 전까지 서대문형무소 등에 구금하고 있었던 자 등 일반 민간인들을 2차로 납북했다.

이와 관련, 6·25 전쟁 당시 납북된 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총무로 일하다가 1960년대 초에 귀순한 조철은 납북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1950년 7월 하순 공산군은 80여 명의 저명인사들을 서울 시청에 모이게 한 뒤 그날 밤으로 군 트럭에 실어 북으로 끌고 갔다. 이날 시청에 모인 사람들은 남북 협상파로 알려진 정계 지도급 인물인 안재홍, 엄항섭, 조완구, 김규식, 윤기섭, 송호성, 원세훈을 포함, 국회의원 조헌영, 백상규, 구덕환, 최병주, 최석홍, 유기수 등을 비롯하여 남궁혁, 구자옥, 김시창, 이승기 등 관계, 학계, 종교계와 의사 등이었다. 노동당 중앙당 조직부에서 파견 나온 김명천은 이들에게 ‘여러분을 모시고 평양의 건설된 모습을 보여 주려고 이렇게 모이도록 한 것이다.’고 말하고 ‘구경을 한 뒤에는 서울로 다시 모시고 온다.’면서 안심을 시켰다. 갑자기 끌려나온 바람에 아무 준비도 없이 가족에게는 ’잠깐 다녀온다.’는 말밖에는 남기지 못한 채 이날 밤으로 스리쿼터(트럭의 한 종류)와 트럭에 각각 실려 북으로 길을 떠났던 것이다. 정부의 조사에 의하면 개별적으로 납북된 사람도 많았다."

 

북한은 1950년 7월 말부터 8월 말까지 민의원, 정부 최고급 관리, 반동분자로 간주해 국립중앙도서관 지하실, 중앙청 지하실, 각 경찰서 유치장에 감금했던 저명인사들, 언론인, 종교인, 학계 인사, 판·검사, 중견 관리, 청년단 간부 및 45세 이하의 무명 인사들을 개성 방면과 연천 방면 두 갈래로 납북했다.

당시의 상황은 1950년 10월 13일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미 국무장관에게 보낸 북한의 민간인 납북 현황에 관한 보고서에서 잘 나타난다.

 

"서대문형무소와 마포형무소에 수감, 감금 또는 감시를 당한 10,000명 이상 적어도 20,000명 정도의 정치범들이 9월 17일부터 28일 사이에 서울에서 사라졌다. 또한 서대문과 마포형무소에서는 모든 수감자들의 손을 묶은 후 다시 몇 명을 함께 묶었다. 서대문형무소 수감자들은 대부분이 서올 지역 공무원, 경찰, 군인, 청년단원이었고, 그리고 나머지는 공산당에 의해 ’반동분자’ 혹은 '친제국주의자’로 생각되는 사람들이었다. … (중략) … 점령 마지막 며칠간 공산당은 대한민국에 충성한 음악가, 목사, 공무원, 사업가와 같은 사람들과 무기를 운송할 수 있는 청년들을 북반부로 전출하는 데 몰두했다."

 

전시 납북자들은 납북 과정에서 총살 등으로 희생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와 관련, 주한 미국대사관은 “이송 과정에서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낙오자들은 총살됐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고 미 국무장관에게 보고한 바 있다.

종교인들도 피랍 과정에서 사살당하거나 특별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사망하는 등 수난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한국신학대학장을 역임한 송창근은 1950년 8월 23일 보안대원에 의해 연행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북한으로 납북되었다. 그는 1951년 7월 하순경 다른 종교인들과 함께 평양 근처의 대동군 문성리에 있는 산 아래 농가에 수용되어 있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시 납북자들은 강제 부역에 동원되고 청년들은 인민군에 강제 편입되기도 했다. 이와 관련, 조철은 이래와 같이 중언하였다.

 

"피랍 무명 인사들은 해주시를 중심으로 황해도 일대에 약 4만여 명이나 분산 수용되었다. 무명 인사들은 인민군 경비대에서 군사훈련을 받았고 방공호 굴착, 도로교량 수리, 양곡 운반 등 부역을 강요당했고 청년들을 선발해서 인민군에 편입시켰다."

 

전시 납북자들은 피랍과정에서 사살 등 수난을 당했다. 일부는 전쟁 중 폭격을 맞아 죽은 경우도 있다. 또 다른 일부는 인민군에 편입돼 전선에 투입됨으로써 총알받이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전쟁 기간 중 상당수의 납북자들이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 질문1 1차 납북의 시기와 대상을 써 봅시다.
  • 질문2 2차 납북의 시기와 대상을 써 봅시다.
  • 질문3 전시 납북자들이 납북 과정에서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써 봅시다.
  • 질문4 피랍된 무명 인사들은 주로 어떤 일에 동원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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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옛 미아리고개이다.

  • 질문1 6·25 전쟁 시기 미아리 고개와 관련된 사건을 두 가지 써 봅시다.

시각자료 2

‘백만인 서명철 「유엔」에 제출’이라는 제목의 1964년 12월 11일 조선일보 기사이다.

  • 질문1 백만인 서명철을 유엔에 제출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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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모둠별로 납북에 살고 있는 납북인사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모둠별로 ‘미아리 고개’를 소재로 한 영화 시나리오를 작성해 봅시다.
모둠활동 3
모둠별로 납북 인사 송환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작성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4
모둠별로 자기 지역의 납북인사 가족을 방문하여 납북 상황과 가족의 생활에 대해 구술을 받아 발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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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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