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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신 활동지, 샘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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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수원역에서 수인선을 타고 인천 쪽으로 오십 리쯤 달리면 일리(一里)라는 시골의 촌정거장에 내릴 수 있었다. 여기서 한 5리쯤 걸어 들어가면 작은 언덕아래 20여 가구가 모여 있는 가난한 마을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샘골(泉谷)이었다. 근방 여러 마을들 중 이곳 샘골은 가장 가난한 마을이었다. 1930년대 샘골은 어촌에 가까운 마을이었다. 샘골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일리역(지금의 한대역)에서 남쪽으로 50여 미터 지점에 다리가 있었는데, 1920년대 말까지는 그 곳에 배가 들어왔었다고 한다. 
1930년 샘골교회에서는 수원구역 선교사 밀러(L. A. Miller)에 의해 단기야학으로 샘골학원이 개교하였다. 그러나 밀러는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는 몸이었고, 단기강습소만으로는 선교에 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23살이었던 최용신은 일본 유학 기간인 6개월을 빼고 1935년 1월까지 2년 9개월 간 샘골에서 교육운동을 펼쳤다. 최용신은 일제의 감시를 받는 속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등 농촌계몽운동에 전념하였으나, 1935년 장중첩증으로 사망하였다. 이러한 최용신의 이야기는 심훈의 소설『상록수』를 통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현재 상태

일제의 한국 식민통치의 주목적은 경제 수탈에 있었으며, 가장 큰 피해자는 농민이었다. 1910-1918년에 걸친 대대적인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대다수 농민들의 토지점유권이 박탈된 반면 동양척식회사와 같은 대토지를 소유한 일인 농장회사가 설립되어 농민수탈의 본산이 되었다. 토지조사사업으로 수백만 농민은 토지점유권을 박탈 당하고 소작농민으로 재편성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1920년 529호이던 자작농은 1925년 525호로 다소 감소되고, 겸소작농은 1,016호에서 895호로 감소되고 순소작농은 1,082호에서 1,193호로 증가하였다. 이는 조선 농민의 계급적 몰락을 의미하였다.
1920년대 중반에 이르면 농촌의 피폐화 현상은 실로 심각하였다. 고율의 소작료로 인하여 농가부채가 증가하고 춘궁, 추궁기의 곤핍한 생활은 실로 비참하였다. 그 위에 학교 교육 등 문화적 수혜가 전무한 상황이어서 대다수 농민들은 문맹자들이었고 위생상태가 열악하였다.
1930년 10월 1일 시행된 국세조사 결과에 의하면 문맹자수가 전 인구의 77.7%이며, 남녀별로 남자는 63.9%, 여자는 92%가 문맹이었다. 농촌의 경제적 궁핍을 이겨내는 일은 먼저 문맹을 타파하고 그들이 새로운 지식을 왕성하게 수용하여 국력으로서의 민중관을 철저하게 갖지 않고는 식민지적 모순에 의한 궁핍상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었다. 
3·1운동 이후 사회운동·문화운동은 다분히 도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1920년대까지만 해도 도시 거주인구는 전체 인구의 15%에 지나지 않고 85%는 농민이었다. 이에 1925년을 전후하여 뜻있는 사람들이 농촌문제에 눈을 돌리면서 농촌운동이 일기 시작하였다.
농촌운동은 뜻있는 농촌에 사는 청년이 중심이 되어 추진하는 경우와 도시 신지식인들이 계몽적 입장에서 추진하는 경우가 있었다. 후자의 경우 천도교계와 기독교계에서 비슷한 시기에 농촌운동을 시작하였다. 
천도교청년당의 주도하에 농민운동에 관심이 있는 사회 각계 인사가 참여하고, 사회적 관심과 격려 속에서 1925년 10월에 설립 출발된 조선농민사는 1920년대 농촌운동의 대표적 단체였다. 초대 중앙이사장에 이성환이 선출되었다. 서울에 본부를 두고 지방에 지부와 사우회를 조직하였고, 같은 해 12월에는 『조선농민』이라는 월간 잡지를 간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각종 강연회와 농촌지도자 양성 교육 등을 통하여 농촌운동의 방향, 방법을 제시 지도하고 농민들의 의식을 계발시켜 갔다. 특히 「농민독본」, 「한글독본」, 「대중산술」, 「비료제조 및 사용법」,「대중독본」 등을 잡지에 연재하여 농민야학 운동을 촉진하였다.
한편 도시중심의 기독교청년운동을 하던 YMCA도 우리 국민의 대다수가 사는 농촌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는 새로운 자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3년 겨울 YMCA의 총무 신흥우는 서울 근교 농촌에서 3개월 간 농민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농촌사정을 조사하였다. 신흥우는 1924년 미국에 가서 Y 국제위원회 총무 등과 논의하여 한국 YMCA 운동을 농촌중심으로 할 것에 합의하였다. 이 합의에 따라 1926년 4월 5~9일에 걸쳐 한국 YMCA의 농촌사업을 연구 추진하기 위한 세미나를 열었다. 이 세미나에서 “농촌사업의 기본 목적은 농민들의 정신적, 문화적, 경제적 향상에 있다. … 그들에게 글을 가르쳐서 문맹자가 없게 하며 농사의 개량과 협동정신을 키워줌으로써 그들의 경제 상태를 향상시켜야 한다. 농촌운동에 관심이 있는 도시청년회와 학생청년회가 필요한 재정과 자원지도자들을 조달해야 한다”는 등의 기본방향을 제시하였다. 
한국 YMCA의 농촌운동은 처음부터 Y 국제위원회의 면밀한 협조 아래 진행되었다. 국제위원회에서는 1925-29년에 걸쳐 쌀 전문가, 농촌교육전문가, 축산, 과수, 양계전문가, 농업행정전무가 등을 파견하여 조직적이고 과학적인 농촌운동을 추진케 했다. 또한 덴마크의 농촌사업을 연구하고 돌아온(1927-28년) 신흥우와 홍병선이 농촌지도자 강습을 위하여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강연을 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리하여 1927년 이후 기독교 청년들에 의한 농촌운동이 활발해졌다.
한국 기독교 여성운동을 전개하던 YWCA도 1927년에 농촌여성 등에게 상식을 보급하는데 주력하였다. 1928년 8월에 개최된 YMCA와 조선남녀학생기독교청년연합회 하령회(夏令會)에서 농촌에 대한 문제의식과 대책을 숙의하고 모범농촌 실시에 대한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토론회를 가졌다. 당시 YWCA는 1928년도 예산에 상당한 비중의 농촌사업비가 책정 지출되었고, 농촌운동의 중요성을 기구에 반영하여 1929년에 농촌부를 설치하고 황에스더와 홍은경을 위원으로 위촉하였다. 
YWCA가 실행한 농촌사업은 농촌보건위생, 농민협동, 농민교육, 농촌부업 장려 등을 통하여 농촌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것이었다. 종교계 청년들과 사회지도층에 의한 농촌운동은 1925년 이후 민족중흥의 일대 과제가 되어 이에 관심을 갖는 농촌지도자가 다수 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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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최용신은 1909년 8월에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에서 개화의식이 높은 기독교 가정에서 2남 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아들도 아니고 둘째딸인 점과 집안이 말할 수 없는 가난으로 쪼들렸던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부지런하고 억척스러움이 몸에 배었다. 헐벗고 쪼들린 어린 시절의 가난은 여학교 시절에 벌써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생각을 하게 하였고 “이 겨레의 살길은 농촌의 계몽에 있다”라는 굳은 신념을 싹트게 하였다. 
최용신이 10살이 되는 1918년 봄, 두남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다니다가 선교사가 운영하는 원산읍의 루씨여자보통학교로 전학하여 과정을 마친 뒤 중등학교인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 1928년 봄 최우등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최용신은 학창시절 내내 10여 리 길을 걸어 통학하였고, 고등보통학교 시절에는 집안이 극도로 빈곤해져서 학비에 곤란을 받았다. 하지만 극심한 빈곤은 최용신을 굳세게 만들었고 농촌계몽에 대한 사명을 더욱 확고히 다지게 하였다.
최용신은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목 전희균으로부터 민족사상에 입각한 성경을 배웠으며 민족사상과 신앙·생활자세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졸업에 임박하면서 민족에 대한 열정이 더욱 불붙어 갔던 최용신은 한때 자기 일신을 어디서 어떻게 태워볼까 하는 문제로 고민하다 일생을 ‘믿음의 주초위에 농촌문화 건설’에 바치고자 결심하였다.
최용신은 1929년 서울에 있는 협성여자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에 입학하였다. 최용신은 이 학교에서 황에스더(1892~1971) 교수를 만났다. 최용신은 그의 지도로 2차에 걸쳐 농촌실습을 떠났는데, 1929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황해도 수안군 천곡면 용현리로 1차 실습을 나갔다.
수안은 주변 30리에 학교도 교회도 없는 두메산골이었다. 용현리에는 40여 호의 마을로 신막역에서 내려 40여 리를 걸어가야 하는 곳이다. 생활용수인 우물길도 아주 멀었다. 생활의 불편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여기에 동리 사람들의 냉랭함과 비아냥거림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참고 노력한 끝에 가르칠 집을 마련하고 낮에는 아이들을 밤에는 청년들을 가르쳤다. 아이들에게 국어와 산술 그리고 노래, 무용 등을 가르쳤고, 청년들에게는 수확을 높이는 새로운 농사법을 가르쳤다. 3개월간의 용현리에서의 생활을 마치면서 학예회를 열었다. 30리 밖에서 학부형과 구경꾼들이 몰려오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1차 실습의 경험을 통하여 최용신은 앞으로 농촌운동의 방향을 깨닫게 되었다. 즉 단기적인 강습회로 끝나는 운동이 아닌 직접 농촌에 장기적으로 상주하며 그들의 생활과 인습·무지를 계몽하여 농촌을 개혁하고 아동과 여성교육을 시작으로 농촌사회 전체를 각성시켜야 함을 알았다. 1930년 최용신은 두 번째로 강원도 포항읍 옥마동으로 농촌실습을 가게 되었는데 그 기간은 짧았으나 농민들의 신임을 얻어 상당한 성과를 이루었다. 아울러 옥마동 경험으로 농촌사업에 몸 바치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건히 하게 되었다.

  • 질문1 최용신이 1928년 최우등 성적으로 졸업한 학교 이름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최용신이 협성여자신학교를 다니면서 농촌실습을 나갔던 두 곳은 어디 어디인가요?
  • 질문3 최용신이 생각한 농촌계몽운동의 방향은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2

최용신은 3학년 1931년 4월 중순 교내에서 학생데모 사건을 겪게 되었다. 사건의 주동자였던 최용신은 징계를 받아 학업을 그만두게 되었다. 마침 수원구역 여선교사 밀러(L. A. Miller, 1870~?)의 샘골강습소 인수요청에 따라 YWCA 농촌사업부에서 적임자를 찾던 중, 최용신을 YWCA 최초의 농촌사업운동 교사로 파견하였다. 밀러는 1929년 샘골예배당에 야학을 열어 장명덕 전도사로 하여금 글 모르는 아이들을 가르쳐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밀러는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사역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사업이 뜻과 같이 진행되지 않아 초조하던 차에 최용신이 적임 교사로 파견되었던 것이다. 
최초의 샘골강습소는 예배당을 빌려 운영하는 단기강습소였으나 최용신이 본격적인 교사로 파견되면서 활기를 띠게 되었다. 1931년 10월 11일 최용신은 샘골예배당에서 계몽운동의 첫 일을 시작하였다. 한글·산수·재봉·수예·가사·노래공부·성경공부 등을 가르쳤는데 열심히 해나가는 동안 지망인원이 많아져 예배당에 한꺼번에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오전반·오후반·야간반의 3부로 조직하여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활동을 계속하였다. 학생들의 범위도 날로 늘어 처음에는 어린이들이었으나 야간반에는 아주머니들·총각들·할머니들도 모여들게 되었다. 또한 틈있는 시간마다 가정순회 지도를 하고 돌아다니며 부엌·농사·위생 등 생활개선을 지도하였다. 
농촌 운동이란 마을 사람들의 협조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샘골의 최용신도 마을 사람들의 믿음을 얻기까지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무지한 남자들은 노름판에서 돈을 잃으면 얼굴 얽은 계집이(최용신은 어려서 천연두를 앓았다.) 밤중에 남의 동네에 와 떠들어 끗발이 안선다고 시비를 걸러 왔다가 최용신의 인격과 열성에 감복하여 주저앉아 글을 배우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의 뛰어난 지도력과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겸손한 행동은 농민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최용신은 1932년 5월 중순에 학원 인가를 받고 8월에는 학원 건축발기회를 조직하고 그 곳 유지 및 학부형들과 YWCA의 보조로 학원을 설립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모두 어렵게 되고 말았다. 특히 샘골 계몽운동의 경비 일체를 지원하던 YWCA가 미국 Y의 보조비 삭감으로 샘골학원까지 돌볼 겨를이 없게 되어 건축비 지원을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용신의 열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 최용신은 학부형들이 학원건축의 필요성을 스스로 느끼게 하고자 추석놀이 학예회를 열심히 준비하였다. 추석날 저녁, “어린이 놀이 학부형 위로회”에서 공작새처럼 현란하게 차린 어린이들이 나비처럼 납신납신 춤을 추고 손에 손을 맞잡고 천진스럽게 부르는 노래는 마치 천상의 선녀들이 날아온 것 같았다. 이날 준비 개최된 연극, 노래, 무용과 웅변 등 다채로운 행사는 한평생을 호미와 지게와 오줌동이 밖에 모르고 살아온 농민들에게는 경이적인 환희였다. 위로회에 참석한 마을사람들은 생전 처음으로 구경한 학예회를 통하여 교육이 인간의 천부적 능력을 계발한다는 새로운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자녀들도 원래 무지한 농군이 아니라 교육을 받으면 사람이 된다는 신념을 얻게 되었다.
최용신은 위로학예회를 마치면서 이어 학원 설립계획을 마을사람들 앞에서 발표하였다. 제일 먼저 부인친목계가 자진하여 수년간 저축한 계금 300여 원을 희사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 중 150원만 받고 이것을 기초로 하여 매일 산길을 넘어 가가호호 방문하여 기금을 모금하였다. 어떤 부호는 그녀를 위협하기까지 했으나 조금도 굽히지 않고 “조선을 위하는데 죄가 무슨 죄냐!”라는 신념으로 모금을 계속하였다. 이렇게 하여 700원의 기금을 모은 최용신은 10월 중순부터 팔을 걷고 버선을 벗어 던지고 학원 집터를 손수 닦기 시작하였다.
최용신은 남자들이 멍하니 서서 구경하는 앞에서 지게를 지고 무거운 돌을 나르고 흙을 날랐다. 스스로 담을 쌓고 토역과 대패질까지 하였다. 최용신의 이러한 끊임없는 노력은 점차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구경만 하던 그들이 이제는 공사의 주역이 되어 발 벗고 나서게 되었다. 샘골학원은 기공한 지 2개월여 만인 1933인 1월 15일에 낙성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샘골학원은 문을 열고 학생을 모집하는 당일에 60여 명이 모였다. 최용신은 교재를 만들고 학생들의 가정환경, 성격, 취미까지 꼼꼼히 지도하였다. 또 밤에는 부녀들을 모아 부녀야학을 하여 샘골 부근 부녀들 중에는 문맹이 거의 없게 되었다.
최용신은 농촌부인운동에도 앞장을 섰다. 농촌부인들은 주로 부엌 생활만 할 뿐 농업생산 일은 하지 않았던 까닭에 농촌경제의 중심에 서지 못하였고 이것이 여성 비하의 원인이 되었다. 농촌부인들이 직접 농사일에 참여하면 남자와 동등한 생산인이 되는 것이며 농가의 수입도 올리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었다. 최용신은 일요일이면 직접 벗고 나서서 논과 밭 일을 하였다. 그 결과 샘골 부인들도 농사일에 직접 참여하여 남자와 동등한 농업생산자가 되었다. 

  • 질문1 최용신이 샘골강습소 건물을 짓기로 결심한 까닭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최용신이 강습소 건물을 짓기 위해 벌인 활동 내용을 써봅시다.
  • 질문3 최용신이 샘골강습소를 중심으로 전개한 농촌계몽운동의 활동 내용을 써봅시다.

읽기자료 3

최용신은 1934년 봄 새로운 농촌운동의 전개를 해 일본 고배여자신학교 사회사업과에 청강생 자격으로 1년 예정의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평소에도 몸이 약했던 최용신은 건너간 지 석달 만에 각기병에 걸려 학업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샘골주민들의 성화에 다시 샘골로 돌아온 최용신은 병을 치료하면서도 쉬지 않고 교단에 서다 결국 장중첩증으로 1935년 1월 23일 25세를 일기로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최용신의 농촌계몽운동은 심훈에 의해 『상록수』라는 소설로 각색되어 1935년 9월 10일부터 1936년 2월 15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아래 내용은 『상록수』에서 주인공 채용신의 농촌계몽운동을 묘사한 내용이다.

아이들은 한꺼번에 대여섯 명, 어떤 때는 여남은 명씩 부쩍부쩍 는다. 보통학교가 사오리 밖이나 되는 곳에 있고, 간이 학교라고 새로 생긴 것도 장터까지 가서야 있으니, 배웅에 목마른 아이들은, 등잔불로 날려드는 나비처럼 청석골로만 모여들 수밖에 없는 형세다. 요새 들어온 아이들까지 합하면, 거의 1백30여 명이나 된다.
그러나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한 아이도 더 수용할 수 없다고, 오는 아이를 쫓을 수는 없다.
……… (중략) ………
가뜩이나 후락한 예배당 안은 콩나물을 기르는 것처럼 아이들로 빡빡하다. 선생이 부비고 드나들 틈이 없을 만치 꼭꼭 찼다. 아랫반에서
『「가」자에 ㄱ하면 「각」하고』
『「나」자에 ㄴ하면 「난」하고』
하면서 다리도 못 뻗고 들어앉은 아이들은, 고개를 반짝 들고 칠판을 쳐다보면서, 제비 주둥이 같은 입을 일제히 벌렸다 오므렸다한다. 그러면 윗반에서는 『농민독본』을 펴놓고
『잠자는자 잠을 깨고
  눈먼자 눈을 떠라.
  부지런히 일을 하여
  살 길을 닦아보세』
하며 목청이 찢어져라고 선생의 입내를 낸다. 그 소리를 가까이 들으면 귀가 따갑도록 시끄럽지만, 멀리 축동 밖에서 들을 때
『아아, 너희들이 인제야 눈을 떠가는구나!』
하며 영신은 어깨춤이 저절로 났다.

추석날은 ……… (중략) ……… 청석골의 남녀노소가 모두 예배당으로 모여들었다. 몇 십리 밖에서 단체를 지어 온 사람도 수십 명이나 된다. ……… (중략) ……… 그네들은 사철 동이를 이고 논 귀퉁이의 샘으로 물을 길러 다니고, 이웃집에 마실을 다녀본 것 밖에 소위 명절날이라고 구경을 나서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 (중략) ………
올 해 일곱 살 밖에 안 된 간난이라는 계집애가 반은 선생에게 떠다 밀려서 무대 한복판으로 나왔다. 커다란 리본을 단 머리를 숙여 나비처럼 곱다랗게 예를 하고는, 딱 기착을 하고 서서 두 눈을 깜박깜박하더니, 은방울을 굴리는 듯 한 목소리로 
……… (중략) ………
『우리들이 살기는 구차하지만, 열심히 배우면 이렇게 창가도 하고 유희도 할 줄 안답니다.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우리 강습소를 도와주시고, 하루바삐 새 집을 커다랗게 짓고 내년에는 그 집에서 축석놀이를 썩 잘하게 해 주십시오』
하고는 다시 예를 납신하고 아장아장 걸어 들어간다.
앵무새처럼 선생의 입내를 내는 것이, 어찌나 귀여운지
『아이, 고것 앙증스러워, 저게 사봉이 딸년이지?』
하고 어떤 마누라는, 한번 안아나 주려고 무대 뒤로 쫓아 들어간다.
……… (중략) ………
【일금 이백칠십원, 청석동부인친목계원 일동】
이 종이쪽을 보고 놀란 것은 비단 학부형뿐이 아니다. 이때까지 여러 사람 앞에 나타나지 않던 영신이도, 무대 뒤에서 제 눈을 의심할 만치 놀라서
『저게 웬일이에요?』
하고 한달음에 원재어머니의 곁으로 갔다.
『아까 회원들이 다 모인 김에, 우리가 이때까지 저금한 걸 새집 짖는데 죄다 내놓기로 했어요.』
한다. 영신은 감격에 겨워, 눈을 딱 감고는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섰다. 영신의 덕택으로, 호미와 절구공이와 오줌동이 밖에 모르고 지내던 자기네부터 글눈을 떴거니와, 오늘 저녁에 자기네가 금지옥엽같이 기르는 자녀들이, 그처럼 신통하게 재주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평생 처음으로 크나큰 감동을 받은 그들은
『오냐, 우리네 자녀도 가르치면 된다. 남부럽지 않게 개화를 한다.』
하는 신념을 얻었다. 그래서 원재어머니의 발설로 몇몇 해를 두고 별별 고생을 다해가며 푼푼이 모은 저금을, 한사람의 반대도 없이 송두리째 학원을 짓는데 기부를 하게 된 것이다.

집터는 온 동리가 내려다보이는, 예배당 맞은편 언덕에다 잡았다. ……… (중략) ……… 집터를 닦는 날은 ……… (중략) ……… 한창 벼를 베고 한편으로는 타작을 하기 사직한 때라, 장정은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영신은 청년회원들과 아이들까지 총동원을 시켰다.
(체면이고 뭐고 다 볼 때가 아니다!)
하고 그는 다리를 걷고 버선까지 벗어 던지고 덤벼들었다. 주춧돌을 메고 목도질을 해오려면, 어께의 뼈가 으스러지는 듯이 아팠다. 키동갑이나 되는 큰 톱을 달아주고 껍데기도 아니 벗긴 물 먹은 기둥나무를 이리저리 옮기고 하느라고, 해 뜰 때부터 어둑어둑할 때까지 봉죽을 들어주고 나면, 허리가 참나무 장작이나 된 것처럼 꼬꼿하고, 뼈끝마다 쏙쏙 쑤셔서 그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었다.
『저러다 큰 병이나 나면 어떻게 하시려고?』
하고 부인네들을 쫓아다니며 한사코 말리건만, 영신이 시진부터 그런 일까지 나서서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은 어정버정하고 일들을 아니한다. 또는 모군꾼 한사람의 품삯이라도 절약을 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달밤을 이용해서 영신은 모래를 날랐다. 들것을 만들어 가지고 청년들과 마주잡이를 해서, 시냇가에 모래와 자갈을 밤늦도록 나르기를 여러 날이나 하였다.
……… (중략) ………
이때까지 구경만 하던 동네 사람들도, 영신이가 진종일 매달려서 일을 하는 것을 보고, 매우 감동을 받아
『우리가 사내 명색을 하고, 그대로 볼 수는 없네』
하고 타작이 끝나자, 와짝 모여들어서, 청솔가지를 꺾어다가 두툼하게 시리 물매를 잡아 새를 올리며, 일변 초벽까지 끝이 났다.

  • 질문1 최용신을 모델로 심훈이 당시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던 소설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읽기자료 2)에서 나타난 최용신의 활동과 읽기자료 3)의『상록수』에서 묘사된 채용신의 활동을 비교하여 공통된 활동내용과 다른 활동 내용을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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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 질문1 벽보를 붙이고 있는 사람과 벽보를 보고 있는 사람들의 직업을 각각 유추하여 봅시다.
  • 질문2 벽보에 씌어져 있는 ‘브나로드 운동’의 의미를 써봅시다.
  • 질문3 ‘브나로드 운동’으로 대표되는 1930년대의 농촌계몽운동의 내용과 역사적 의의를 써봅시다.

시각자료 2

  • 질문1 사진은 샘골강습소 낙성식 사진으로 알려져 있는 사진이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지붕의 이엉이 잠도 자지 않은 것으로 보아 강습소를 짓고 낙성식을 한 1933년 1월 15일 직후인 듯하다. 아래 그림과 대조하여 최용신을 찾아봅시다.
  • 질문2 이날 낙성식에 참여한 샘골 주민들은 최용신과 그의 농촌계몽운동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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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몇 개 모둠으로 나누어 최용신의 입장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농촌 사람들의 삶을 발전시킬지 토론하여 모둠별로 발표하여 봅시다.

모둠활동 2

심훈의 상록수와 함께 당시 농촌계몽운동을 다룬 대표적인 소설이었던 이광수의 을 찾아서 읽고 농촌계몽운동에 대해 두 소설의 공통적인 내용과 다른 내용을 비교, 정리하여 봅시다.

모둠활동 3

읽기자료 2)3)을 다시 읽어보고 샘골강습소 낙성식에 참가한 마을 남자의 입장에서 축사를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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