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영역

본문영역

  • 도입
  • 역사적 배경
  • 읽기
  • 시각자료
  • 모둠활동

주요사적지 배움터

모곡학교(애국정신 일깨운 무궁화 사랑의 터전)

도입

"무궁화 동산

1절

우리의 웃음은 따뜻한 봄바람
춘풍을 만난 무궁화 동산
우리의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
또다시 소생하는 우리 이천만
빛나거라 삼천리 무궁화 동산
잘살아라 이천만의 고려족

2절

백화가 만발한 무궁화 동산에
미묘히 노래하는 동무야
백천만 화초가 웃는 것 같이
즐거워라 우리 이천만
빛나거라 삼천리 무궁화 동산
잘 살아라 이천만의 고려족"

일제강점기 남궁억은 「무궁화 동산」이라는 노래를 모곡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만들었다. 「무궁화 동산」은 아이들이 고무줄놀이를 할 때나 운동시합을 할 때, 그리고 행진을 할 때 즐겨 부르는 노래가 되었으며, 주일학교에서 성적이 최고인 반에 우승기를 수여할 때 부르는 우승가였다. 「무궁화 동산」은 남궁억의 무궁화 정신이 노래된 것이다. 남궁억은 무궁화 정신에서 민족의 존재 이유를 찾고 무궁화를 기르고 보급하여 애국정신을 함양하다 일제에게 희생되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 386
현재 상태 복원 / 2004년 6월에 남궁억기념관이 건립되었고, 학교의 일부 건물과 예배당이 복원되어 있다.

배화학당의 교사와 상동청년학원 원장을 겸하면서 독립사상 고취, 애국가사 보급, 한글서체 창안 및 보급에 힘쓰던 남궁억은 1918년 건강이 악화되자 친지들의 권유를 따라 배화학당의 교사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강원도 홍천으로 낙향하였다. 남궁억은 1919년 9월에 사재를 털어 대지를 매입하고 남감리교 선교부의 도움으로 건평 30평에 8칸짜리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모곡리 부근에 학교가 없는 것을 알고 교회 건물에 모곡학교라는 간판을 걸고 학생들을 모아 4년제 보통학교 정도의 신교육을 실시하여 1923년 3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 뒤 주변의 청년학생들이 모여들어 계속적으로 학생이 증가하자 지역 유지들의 기부금을 모아 1923년 9월에 100평의 새 교사와 기숙사를 건립하고, 1925년 3월 보통학교의 허가를 취득하여 정식 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때 각 지방에서 모여든 학생들은 7,8세에서부터 30대 중반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으로 구성되었으며 서울에서도 찾아왔다.

남궁억은 국어교육과 국사교육을 중시하여 자신이 직접 우리말 교과서인 『조선어보충』, 역사교과서 『동사략』을 간행하고 사화집인 『조선이야기』를 저술하는 등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의 고취에 힘을 기울였다. 또 실업교육을 중요시하여 학생들이 등하교 시간을 이용하여 나무와 거름을 한 짐씩 하는 습관을 몸에 배도록 하였으며, 여러 가지 노작교육을 통해 건전한 근로정신의 함양에도 주력하였다. 학교의 실습지에는 무궁화 묘목을 심고 가꾸어 전국 각 지방의 사립학교와 교회 및 사회단체에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에 대한 인쇄물과 함께 묘목을 기증하기도 하였다.

1933년 무궁화 및 한국역사 사건으로 일제 경찰이 학교·교회와 청년들의 집을 급습, 남궁억과 교사 그리고 마을 청년 등 28명을 홍천경찰서로 끌고 갔다. 학교 재산은 몰수되고 학교는 폐쇄되어 일본인이 운영하는 공립공민학교로 전환되었다. 남궁억은 1934년 3월 12명의 청년과 함께 1년 복역, 3년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7월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모곡에서 안정을 취하다가 1939년 4월 5일 모곡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읽기

읽기자료 1

남궁억은 1883년 통역관 양성소인 동문학에 들어가 영어를 배우고 뮐렌도르프의 사무실에서 일하다 1886년 고종의 어전통역을 맡았고, 이어 4년간 고종의 시종을 맡아 총애를 받았다. 이 후 칠곡부사와 내부 토목국장 등의 순탄한 관직의 길을 걷다가 1897년 관직에서 물러나면서 독립협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896년 독립협회가 창립될 때부터 남궁억은 수석총무와 사법위원을 겸하였으며, 1898년 독립협회가 탄압받을 때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자 황성신문사 사장이 되었다. 1905년 다시 관직을 맡아 성주목사와 양양군수를 지내기도 했으며 대한 협회와 관동 학회의 회장을 지내며 애국 계몽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0년 국권 피탈 이후에는 서울에 머물면서 배화학당과 청년학원에서 영어와 국사를 가르치며 한동안 교육계에 몸담고 있던 남궁억은 1918년 강원도 홍천 모곡으로 내려와 남감리회 선교부의 후원으로 모곡학교를 세우고 교장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조선 역사를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우리들은 현재 일본에 병합되어 일본의 노예가 되어있지만 너희들 청년이 용감력을 양성하여 어떤 간난신고(지독한 어려움과 힘겨운 고통)를 겪더라도 그것을 배제할 정신과 용기만 있으면 조선 독립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므로 너희들은 우선 용감한 정신을 양성해야 한다.”과 강조하며 독립 의지를 함양하였다.

남궁억은 일생동안 열정적으로 몸 바쳐 우리의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한 무궁화 사랑 보급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나라사랑과 겨레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무궁화 보급을 통한 민족교육을 위하여 모곡학교 뒤뜰에 무궁화 묘포 밭을 일궈 묘목을 길러 전국의 학교와 교회에 보급하였는데, 무려 30만주에 달하였다.

  • 질문1 탄탄한 관직 생활을 하던 남궁억이 관직을 버리고 교육계에 헌신하여 국어와 국사 교육에 주력한 이유는 무엇일까?
  • 질문2 배화학당 교사로 활동하던 남궁억은 왜 교직을 버리고 고향인 강원도 홍천으로 내려가 모곡학교를 세우게 되었을까?

읽기자료 2

1918년 강원도 홍천의 보리울(모곡) 마을로 내려간 남궁억은 교회와 모곡학교를 세우고 어린 무궁화를 심어 전국에 무궁화 나무를 보급하는데 힘썼다. 또 「무궁화 동산」이라는 노래를 지어 학생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일제가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일장기와 벚꽃을 보급하고 강제적인 장려정책을 펴고 있을 때 남궁억 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민족정신 고양을 위해 ‘무궁화 심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고 무궁화 묘목장을 만들어 전국으로 묘목을 보급하였다.

1933년 출판사 직원을 사칭한 홍천경찰서의 신현규가 남궁억을 찾아와 잡지를 팔며 무궁화 묘목을 사러 왔다고 말하자 남궁억은 그를 무궁화 묘포로 데려갔다. 그리고 무궁화가 우리나라 국화라는 것을 설명하며 사쿠라(벚꽃)는 활짝 피었다가 곧 지지만 무궁화는 연이어 피는 것처럼, 한국 역사고 그렇게 면면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이를 계기로 무궁화 노래와 무궁화 나무가 민족정신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아차린 일본 경찰은 모곡학교를 수색하고 무궁화 묘목 8만주를 불태워 버리며 남궁억을 구속하고 모곡학교는 강제로 공립학교로 편입시켰는데 이를 무궁화 동산 사건이라 부른다. 이 무궁화 동산 사건 취조 중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비밀결사 십자당(十字黨)이 발각됨으로써 사건이 확대되고 수많은 인사들이 구속되었다. 십자당은 기독교의 진리·박애정신에 입각하여 이상적인 농촌을 건설하려는 것으로 남궁억이 주동이 되어 조직한 단체였다

당시 『동아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가 보도되었다.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사사키 검사의 손에서 취조를 받다가 낙착(문제가 되던 일이 결말이 맺어짐)되어 6명은 기소되고 6명은 면소를 보게 되었는데 남궁억 노인만은 보안법 위반이고 다른 5명은 모두 치안유지법의 죄명으로 기소되었다는데 남궁억 노인은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된 내용을 듣건대, 모곡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조선 역사와 지리를 가르치고, 무궁화를 학교에 수만 주나 심고, 학생들에게 무궁화 시를 읊어 주고 가르치며, 여교원으로 하여금 무궁화 창가를 가르치게 하여 민족주의 사상을 학생들에게 전할 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여러 가지 직분을 가진 관계로 종교적 집회나 접촉에서 늘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하였다는 것인데, 당국으로부터 재삼 강직한 사상을 완화시키도록 권고 받았으나 이를 듣지 않고 묘목 광고(선전문)에 쓴 글 문구가 불온하였다는 것이라고 한다.

  • 질문1 남궁억이 무궁화 묘목을 길러 전국에 널리 보급하고자 한 이유는 무엇일까?
  • 질문2 남궁억은 우리나라의 무궁화와 일본의 국화인 벚꽃을 어떻게 비교하여 설명하였는가?

읽기자료 3

애국가에는 우리나라를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으로 표현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나라꽃은 무궁화이다. 우리나라의 훈장 가운데 최고의 훈장은 ‘무궁화 대훈장’으로 대통령과 배우자, 또는 우방국의 국가 원수에게 수여될 수 있다. 우리나라 국가 원수인 대통령을 상징하는 문장도 무궁화이다. 무궁화는 그만큼 한국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무궁화는 추위에 강하며 꽃이 피는 기간이 길은데, 여름부터 가을까지 분홍, 다홍, 보라, 자주, 순백 등 여러 가지 빛깔로 대개 100여 일 동안 피고 진다고 한다. 여느 꽃에 비하여 계절에 구애됨이 없이 계속 피는 꽃으로 산과 들 어떤 곳도 가리지 않고 잘 자라기에 우리의 민족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근역(槿域)’ 즉 ‘무궁화 나라’라고 불릴 만큼 무궁화가 만발했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인 『산해경』에는 우리나라를 ‘무궁화가 많은 나라’라 썼으며, 그밖에 여러 기록에서도 우리나라를 ‘근역(槿域)’ 즉 ‘무궁화의 나라’로 표시하고 있다. 신라의 명문장가인 최치원이 당나라에 보낸 국서에도 우리나라를 ‘근화향(槿化鄕)’ 즉 ‘무궁화 나라’라 적고 있으며, 고려 시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는 근화를 두고 꽃이 끊임없이 피기 때문에 무궁화라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 시대에 훈민정음이 편찬되면서 ‘무궁화’라는 한글 명칭이 사용되게 되었다.

이홍직의 『국어대사전』에 "무궁화는 구한말부터 우리나라 국화로 되었는데 국가나 일개인이 정한 것이 아니라 국민 대다수에 의하여 자연발생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를 예부터 '근역' 또는 '무궁화 삼천리'라 한 것으로 보아 선인들도 무궁화를 몹시 사랑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다. 1928년 발행된 『별건곤』 에 게재된 「조선산 화초와 동물」편에는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무궁화는 꽃으로 개화기가 무궁하며 그 꽃의 형상이 엄연하고 미려하고 정조 있고 결백함은 실로 민족성을 그리여 내었다. 한국을 막론하고 각 민족을 대표하는 꽃이 있지만 우리를 대표하는 무궁화 같이 형으로나 질으로나 적합한 것은 볼 수 없다"고 실려 있다. 이는 우리 민족이 많이 심고 가꾸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민족성을 나타내는 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국인 신부 리처드 러트가 쓴 『풍류한국』에 보면 프랑스, 영국, 중국 등 세계의 모든 나라꽃이 그들의 황실이나 귀족의 상징이 전체 국민의 꽃으로 만들어졌으나 우리의 무궁화만은 유일하게도 황실의 이화가 아닌 백성의 꽃 무궁화가 국화로 정해졌고 무궁화는 평민의 꽃이며 민주전통의 부분이라 쓰고 있다.

1896년 독립문을 세울 때 주춧돌을 놓은 의식을 하며 부른 애국가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내용이 담겨질 만큼 무궁화는 은연중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무궁화 꽃의 종류는 수십 종이 있지만 나라꽃으로 정해진 것은 빛깔과 모양을 고려해서 정부에서 엄격히 심사기준을 정했는데, 홑꽃에 안쪽은 붉고 꽃잎의 끝 쪽 대부분은 분홍색이어야 하며 희석되어 자주색이 있어야 한다.

일제강점기 여학생들은 우리나라 지도에 무궁화를 그려 넣는 무궁화자수를 즐겨 하였으며, 언론 신문사의 상징이나 학생들의 교복과 모자에도 우리나라의 상징인 나라 꽃 무궁화를 많이 이용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우리나라 꽃 무궁화를 모두 불태워 우리의 민족의식을 말살하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무궁화는 보기만 하여도 눈에 핏발이 서게 하는 ‘눈에피꽃’이라거나 몸에 닿기만 하여도 부스럼이 생기는 ‘부스럼꽃’이라는 터무니없는 말로 무궁화를 비하하기도 하였다.

  • 질문1 무궁화는 언제 누구에 의해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꽃으로 정해졌을까?
  • 질문2 무궁화는 분홍, 다홍, 보라, 자주, 순백 등 여러 가지 빛깔로 종류가 다양하다. 다양한 무궁화 빛깔 중에서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꽃으로 정해진 무궁화의 빛깔은 무엇일까?
  • 질문3 일제강점기 일제가 무궁화를 ‘눈에피꽃’이나 ‘부스럼꽃’등의 이름으로 비하한 이유는 무엇일까?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시각자료

시각자료 1

남궁억은 공직자와(어전통역, 해관서기, 별군직, 칠곡군수, 내부토목궁장, 성주목사, 양양군수) 언론인(독립신문, 황성신문), 그리고 교육자(현산학교, 모곡학교, 흥화학교, 배화학당, 청년학원) 등 다양한 경력을 갖고 활동했다.

  • 질문1 남궁억이 언론인으로서 독립신문과 황성신문에서 활동한 내용을 조사해 봅시다.
  • 질문2 남궁억은 교육자로 영어, 역사, 국어를 가르치며 직접 역사서를 저술하여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남궁억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저술한 역사책이 무엇인지 조사해 봅시다.

시각자료 2

남궁억은 배화학당 교사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와 1919년 10칸짜리 예배당을 설립하였다. 다음은 1998년에 복원된 모곡교회의 모습이다.

  • 질문1 남궁억이 고향으로 내려와 예배당을 세운 까닭은 무엇일까?
  • 질문2 일제강점기 많은 교회들이 민족 운동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시각자료 3

다음은 남궁억의 묘지에 있는 신도비로 비문은 ‘민족혼의 등대 한서 남궁 선생’이라 시작되고 있다. 남궁억은 “내가 죽거든 과일나무 밑에 묻어 거름이 되게 하라”, “나는 독립을 보지 못하나 너희는 반드시 볼 것이니 독립 후의 일을 위하여 준비하라” 라는 유언을 남겼다.

  • 질문1 이 비문에서 남궁억을 ‘민족혼의 등대’라고 쓴 이유를 남궁억의 생애 및 업적과 관련하여 간단히 정리해 봅시다.
  • 질문2 남궁억은 왜 ‘죽거든 과일나무 밑에 묻어 거름이 되게 하라.’고 유언을 남기셨을까?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모둠활동

모둠활동 1

남궁억처럼 일제강점기 교육을 통해 민족혼을 길러 독립의 기반을 닦기 위한 노력이 많았습니다. 일제강점기 교육을 통해 민족혼을 기르기 위해 노력한 사례들을 조사해 봅시다.

모둠활동 2

우리나라 꽃인 무궁화를 기념하고 보급하기 위해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사업들에 대해 조사하고 그 개선방안을 세워봅시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하단영역

관련사이트

주소: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천읍 독립기념관로 1 전화: 041-560-0441 팩스 : 041-560-0426 
 Copyright 2014 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