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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인도교 폭파지(북한군의 한강 도하 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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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본부 법무감 양정수 육군대령은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수도 서울 격퇴시의 한강철교 폭파에 대한 책임자로서 그간 중앙고등군법회의에 회부 중에 있는 육군본부 공병감 육군 대령 최창식에 대한 적전비행(敵前非行) 피고사건은 9월 15일 중앙 고등 군법 회의 법정에서 재판장 육군 대령 원태섭, 법무사 육군 중령 고원증, 심판관 육군 대령 심언봉, 동 육군 중령 이○의 법관 구성으로 심리를 종료하고 동일 피고인에 대하여 사형의 언도가 있었다.

군법회의 설치 장관의 집행 승인 조치와 집행 명령에 의하여 9월 21일 부산시 교외에서 우총살형(右銃殺刑)이 집행될 것이며 그 범죄 사실은 다음과 같다.”

▹ 범죄사실

피고인 육군 대령 최창식은 일본 육사 공병과를 졸업하고 일본 군경에 복무하다가 해방 후 귀국하여 단기 4281년 12월경 육군 소위로 임하여 공병 단장으로 취임 이래 계속 승진하여 단기 4282년 6월 20일 공병감의 요직에 보임되어 현재에 이른 자로서 금번 6·25 이북 공산군의 불법 남침으로 인하여 수도 사수가 불가능하게 되자 6월 27일 육군본부 참모회의에 출석하였는 바 동 회의에서 괴뢰군 전차가 서울 시내에 침입하면 한강철교 및 인도교를 폭파하기로 결정하고 당시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은 공병감인 피고인에게 이 공사를 실시할 것을 명하였으므로 동일 15시 30분경 그 공사를 완료하고 대기 중 다음날 6월 28일 상오 2시경 아군이 전 전선에서 후퇴하게 되자 피고인은 곧바로 한강교에 도착하여 동일 상오 2시 30분경 철교 3개소를 폭파하고 10분 후에 재차 인도교를 폭파하였는데 이 같은 폭파를 함에 있어서 기술참모인 공병감의 직책으로 있는 피고인으로서는 응당히 부하 공병을 지휘하여 아군 부대가 완전히 한강을 건넜는가 그 실정을 확인하고 통과 중에 있는 인원의 유무를 검토하고 교통을 완전히 차단시킨 후에 폭파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냉정한 판단을 상실한 피고인은 앞에 기술한 제반 상황을 전연 고려하지 못하고 육로 도하하는 부대를 방치하고 다리 위의 교통 차단에 유의치 않고 급급히 폭파한 결과 통과 중에 있던 다수 차량과 인원이 절단된 간격으로 추락되어 수중에 침몰되고 무수한 차량 장비, 군수품 물자도 적에 노획 당하고 수만 장병은 흩어져 도하함으로 인하여 국군의 안전을 위시케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음.
- 『민주신보』, 1950년 9월 22일"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동 304-4 한강대교
현재 상태 변형, 일부 교각만 남아있고, 상판은 새로 건립되었다.

1950년 6월 27일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은 서울 사수가 어려워지자 육군 본부의 서울 철수와 함께 한강의 교량을 폭파하기로 결정했다. 채병덕 총참모장으로부터 한강교 폭파를 명령받은 최창식 공병감은 27일 오후 3시경 폭파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 주력은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완전히 서울시내에 진입하였고, 국군 병력과 장비, 군수품 미쳐 한강 이남으로 철수치 못한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제5사단장 이응준 소장이 미아리에서 육군 본부로 직접 달려와 포병, 차량부대 등이 한강을 건널 때까지 폭파를 연기하도록 요청하였다. 이에 당시 육군 본부에 남아 있던 김백일 참모부장은 한강교 폭파를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폭파하지 말도록 명령하였으나 전달되지 못하고, 28일 새벽 2시 30분 다리가 폭파되고 말았다.

다리가 폭발되자 500~800명에 달하는 피난민들과 일부 군인들이 폭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이 때문에 현장책임자였던 최창식 공병감은 1950년 9월 15일 육본 계엄고등군법회의에서 인도교 위에 인파가 몰려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폭파를 명령한 책임을 물어 사형을 선고받은 후 처형되었다. 이후 1964년 11월 부인 옥정애의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져 육본 보통군법회의는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폭파된 인도교는 서울 수복 후 부교가 가설되어 1950년 11월 중순부터 일반의 통행을 위하여 개방되었으나, 1·4 후퇴 직후에 임시 가설하였던 한강교는 다시 폭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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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6월 28일 새벽 수도 방어를 위한 국군의 마지막 보루였던 미아리 방어선이 무너지자 북한 제1군단(군단장 중장 김웅)은 제105전차여단과 함께 그날 한강 북쪽의 건너가는 지점을 막는 한편 시내 주요 기관을 장악하였다.

북한군은 그들의 제1단계 목표인 이른바 서울 점령을 자축하는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28일 낮은 그대로 보내고 그 뒤부터 한강 도하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부대 전개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북한군 제4사단(사단장 소장 이권무)은 28일 새벽 5시 30분에 동북쪽으로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28일 아침 8시 무렵 제18보병연대가 서울 북쪽 변두리를 점령하였다. 이후 신촌 일대에 자리 잡아 한강대교(인도교)에서 마포-서강에 이르는 여의도의 대안을 점령하여 장차 영등포에서 도하하고자 하였다.

북한군 제3사단(사단장 소장 이영호)은 퇴각하는 국군 부대들의 저항을 극복하면서 서울을 남쪽으로 우회하여 오후 4시 무렵 서울의 남쪽 변두리인 이촌동(현 이촌2동 한강철교와 원효대교 사이)을 점령하였다. 그 후 사단은 용산 일대에서 이촌동-한남동 사이의 강변에 병력을 배치하여 장차 신사동으로 이동하고자 하였다.

북한군 제6사단(사단장 소장 방호산)은 개성 일대를 점령한 후 김포 반도로 진출하여 영등포 및 인천을 점령한 후 이곳에 머물다가 제4사단이 수원을 공격할 때 뒤를 따랐다. 북한군 제1사단(사단장 소장 최광)은 뒤늦게 수색 일대에 입성하였으나 전투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아 제2군단으로 배속이 전환 되었다.

제105전차여단은 28일 05:30부터 서울 북동 및 동쪽으로부터 진입한 후 주로 방송국, 발전소, 우체국, 전신국 및 도시의 여타 행정기관을 점령하였다. 이후 28일 4시 무렵 사단의 주력이 서울 북부와 중심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리하여 다시 한 번 한강선의 돌파에 선두가 된 북한군 제3사단과 제4사단은 각각 관측소를 남산과 와우산(105고지) 및 노고산(104고지)에 두고, 포병연대로 하여금 남산 기슭과 신촌 일대에 포를 쏘도록 하여 화력지원 태세를 갖추게 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북한군 사단장들은 서울에서 퇴각하는 국군을 적극적으로 추격하거나 한강 도선장을 점령하지 않은 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모호하게 행동하였다. 또한 제105전차여단 예하 부대들도 서울을 점령한 후 3일 동안 국군을 추격하지 않은 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음으로써 국군에게 한강의 남쪽 강변을 강화하고 교량을 파괴할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 질문1 북한군의 서울 점령은 최종적으로 아군의 어떤 방어선의 무너졌기 때문인가요?
  • 질문2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 부대 이름을 써 봅시다.
  • 질문3 북한군 제105전차여단이 점령한 서울의 주요 기관은 무엇인가요?
  • 질문4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아군의 한강선 방어에 선두가 된 북한군 부대 이름을 써 봅시다.
  • 질문5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국군에게 한강의 남쪽 강변을 강화하고 교량을 파괴할 여유를 주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2

한강 인도교와 3개의 한강 철교가 폭파된 것은 6월 28일 오전 2시 30분이었다. 이 폭파는 적의 진격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실시된 것이었으나 일찍 폭파를 실시하여 당시 서울 북쪽에 있던 각 부대와 서울에 있는 부대의 퇴로가 차단된 것은 물론 각 정부 기관 및 서울 시민들의 피난길이 막혀 아군의 손실이 극심하였다.

한강교의 폭파는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이 6월 26일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27일 16시에 폭파할 것을 명령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공병감 최대령은 이날 오전 11시에 이미 교육을 통해 한강교 폭파 실습을 한 공병학교 폭파 교관 황원회 중위와 이창복 중위를 불러 한강교 폭파 계획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두 중위는 즉시 한강교 현장을 답사하고 소요되는 폭약의 양과 장약 방법, 절단 위치 등을 결정하였다.

이를 확인한 공병감은 27일 오전 9시 육군본부에서 공병학교장 엄홍섭 중령에게 “적의 전차가 5시간 뒤에 서울 시내에 침입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한강교에 폭약을 장치하려면 몇 시간이 걸리느냐?”고 묻자 엄중령은 “3시간이면 된다.”고 하자 한강교 폭파 준비를 명령하였다. 공병 학교장은 남한강파출소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폭파 준비에 착수하였다. 황원회 중위는 4개의 교량 절단용으로 7,000파운드의 폭약을 부평에 있는 제1공병단에서 인수하기로 하였다.

한편 공병감 최대령은 이날 오전 11시에 개최된 재경 부대장 회의에서 육군 본부의 시흥 철수 및 한강교 폭파가 결정되자 공병 학교장에게 15시까지 폭파 준비를 완료할 것을 지시하였다. 소요 폭약을 준비한 공병 학교장은 한강 인도교 폭파는 황원회 중위, 경부선 복선철도는 이창복 중위, 그 중간에 있는 2개의 단선 철교 2개는 임흥순 중위(제1공병단)에게 폭파 책임을 맡겼다. 이들에게 각각 1개 소대를 배치하여 폭파 준비를 15시까지 완료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아울러 차후 복구 작업이 용이하도록 교각에는 손상을 주지 않도록 폭약을 장치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로써 폭파 준비 작업은 낮 12시부터 시작하여 15시 30분에 마치게 되었다.


  • 질문1 한강교 폭파 명령이 처음 내려진 때는 언제인가요?
  • 질문2 한강교 폭파 명령을 최초로 내린 사람은 누구인가요?
  • 질문3 6월 27일 오전 9시 육군본부에서 공병감으로부터 한강교 폭파 준비 명령을 받은 공병학교장 엄홍섭 중령은 어떤 준비를 했나요?
  • 질문4 경부선 복선철교, 2개의 단선 철교, 한강 인도교 폭파 책임자를 각각 써 봅시다.
  • 질문5 한강교 폭파 준비가 완료된 때는 언제인가요?

읽기자료 3

이 사이에 육군 본부의 시흥 철수 및 서울 복귀가 있었다. 따라서 16시로 예정된 폭파를 중지할 상황에 놓이게 되자 총참모장은 참모부장 김백일 대령에게 한강교 폭파 중지를 명령하게 되었다.

김대령은 15시가 지나서 한강교 폭파 지휘소에서 장교들에게 차후 교량의 절단은 총참모장과 본인, 공병감의 명령이 없이는 폭파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아울러 한강 인도교 폭파 책임자인 황원회 중위에게 폭파 명령이 하달되었을 때 교량이 즉시 절단되지 않거나 또한 명령 이전에 절단되면 엄벌에 처할 것을 경고하였다.

김대령은 16시에 다시 공병감과 함께 한강 인도교에 나와 공병 학교장에게 “육군본부가 서울로 복귀하였으니 철수하는 모든 차량은 제지하여 시내로 돌려보내고 아울러 시내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은 전부 통과시키라.”고 긴급 지시하였다.

이에 공병학교장은 각 폭파 책임 장교에게 명령하여 장치해 두었던 일부의 도화선과 뇌관을 철수시키고 대기하도록 하였다.


  • 질문1 한강교 폭파 중지 명령을 내린 이유를 써 봅시다.
  • 질문2 16시에 김백일 대령이 공병 학교장에게 내린 명령은 무엇인가요?
  • 질문3 명령을 받은 공병학교장은 어떤 조치를 했나요?

읽기자료 4

그러나 6월 27일 17시에 적의 전차가 길음교 전방에서 나타나고, 이어서 다시 시작된 적의 공격으로 서울 방어를 위한 마지막 저지선이 붕괴되자 채 총참모장은 23시 30분 육군 본부의 1차 철수 때와 같이 전방 부대와 재경 부대, 그리고 시민들의 철수를 고려하지 않은 채 한강교 폭파 준비를 명령하였다.

28일 오전 1시 45분에 채 총참모장은 돈암동에서 급히 도착한 강문봉 대령으로부터 적의 전차가 시내에 침입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즉시 공병감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지금 적전차가 시내로 들어와 돈암동을 지나서 동소문으로 향하고 있다. 이미 배치한 전차 공격조는 그대로 두고 즉시 한강으로 가서 한강교를 폭파하라. 나는 이제 시흥을 거쳐 수원으로 간다. 곧 실시하라.” 채 총참모장은 육군 본부를 나와 한강을 건너 영등포로 향하였다.

총참모장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공병감은 한강 폭파 지휘소로 가서 공병 학교장에게 한강교 폭파를 명령하였다. 이때가 28일 오전 2시 20분이었다.

공병 학교장은 한강인도교 북쪽으로 공병을 보내 도강하는 차량과 인파를 제지하게 하고 각 교량 폭파 책임 장교에게 교량 폭파를 명령하였다. 당시 이곳 북한강 파출소에는 헌병들이 배치되어 명령 없이 철수하는 차량들을 제지하고 있었으나 밀어닥치는 차량과 인파로 큰 혼란을 빚고 있었다.

이즈음 이시영 부통령의 도강을 끝으로 차량 통행이 완전 제지하였다. 공병학교장의 폭파 명령은 사전에 정한 칼빈 소총의 연발 사격과 손전등의 수신호로 하달되었다. 이로써 각 교량의 책임 장교가 각각의 도화선에 점화하여 교량이 절단되었다.

그런데 이창복 중위가 담당한 경부선 복선철교의 폭파가 불발이 되자 이 중위는 위험을 무릎 쓰고 현장으로 접근하여 다시 폭약을 장전하고 점화하였으나 한 뭉치의 폭약만이 폭발되어 교량의 완전 절단되지 못했으며 중앙의 단선 철교 1개도 완전하게 절단되지 못했다. 따라서 불발에 그친 이 교량은 미 공군의 B-29기가 출격하여 폭파하였으나 불완전하게 절단된 경부선 복선철교는 적이 7월 3일 이후에 폭파된 부분을 보수하고 전차를 도강시키는 통로가 되었다.

  • 질문1 채 총참모장이 6월 27일 13시 30분 한강교 폭파 준비 명령을 내린 이유를 써 봅시다.
  • 질문2 채 총참모장이 6월 28일 오전 1시 45분 한강교 폭파를 명령한 이유를 써 봅시다.
  • 질문3 한강교 폭파 명령 하달 시각 한강 인도교의 상황을 써 봅시다.
  • 질문4 불완전한 한강교 절단은 적에게 어떤 빌미를 주었나요?

읽기자료 5

채 총참모장이 떠난 직후 미아리 선에서 육군 본부에 도착한 이응준 소장, 유재흥 준장, 이형근 준장 모두가 한강 폭파 명령 하달 소식을 듣고 참모부장 김백일 대령에게 “아직 일선 병력은 철수 명령이 없어 그대로 남아 있으니 병력이 철수한 후 폭파하자.”고 요청하자 김대령이 동의하여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에게 교량 폭파를 중지하도록 명령하였다.

장대령은 즉시 지프차로 한강 폭파 지휘소가 있는 남한강 파출소로 향했으나 도로가 막혀 늦어지고 있었다. 당시 6월 26일부터 이승만 대통령이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서울 시민들의 이동 금지 명령을 하달하였으나 그 명령은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강 북단에는 폭주하는 인파와 차량으로 대혼란이 야기되었고, 군용 차량과 장비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폭파 중지 명령을 하달하기 위해 출발하였던 장대령은 폭파지휘소 부근 언덕에서 일대 폭음을 들었으며, 이때의 시간은 오전 2시 30분경이었다. 광진교는 이보다 1시간 반 뒤에 폭파되었다.


  • 질문1 이응준 소장 등이 한강교 폭파 중지를 요청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장창국 대령이 한강교 폭파 중지 명령을 하달하지 못한 이유를 써 봅시다
  • 질문3 한강교 폭파 시각을 써 봅시다.

읽기자료 6

차량과 피난민들이 인도교 위에 있는 상황에서 교량이 폭파되었으므로 약 500~800여 명으로 추정되는 피난민들이 희생되었다. 역시 북한강 파출소 부근에서는 40~50대의 차량이 크게 파손되어 많은 인원이 손상을 입었다. 적이 교량으로 진출하기 전 철수 병력들 중 일부는 폭파되지 않은 철교로 도하할 수 있었다.

이처럼 한강교의 폭파는 서울 시민의 피난 조치나 전선 부대에 대한 철수 명령 조차 없는 상황에서 단행되었다. 150만 시민, 대부분이 적 치하에 들어가야 했고 국군 주력 병력의 퇴로가 차단되었으며 수개의 사단을 지원할 수 있는 차량, 장비 및 보급품이 한강 이북에 갇혀 적의 수중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 질문1 한강 인도교 폭파로 희생당한 사람은 몇 명 정도일까요?
  • 질문2 한강교 폭파가 북한군 방어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읽기자료 7

한강교 폭파는 시기와 방법의 잘못으로 낙동강 전투 때까지 논란이 분분하였다. 최종 책임을 총참모장이 져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지만 채병덕 총참모장은 7월 29일 하동에서 전사한 뒤였다.

8월 25일과 26일에 후방으로 철수하던 제6사단 제2연대 제3대대장 이운산 중령을 비롯한 50명이 군위에서 아군 공병대가 매설한 지뢰로 인하여 죽거나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에 신성모 국방부장관의 진상 조사 명령을 받은 헌병은 지휘감독 책임을 물어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구속하였다. 최대령은 구속 이유인 근무태만 이외에 한강 폭파 책임을 묻는 적전비행(敵前非行)의 죄가 추가되었다. 9월 10일에는 육군특명 갑 제127호로 군법회의가 설치되어 최대령은 이에 회부되었다. 9월 15일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최대령은 근무태만은 무죄가 되고 적전비행은 유죄가 되어 다음날 14시에 부산 교외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이 군법회의의 판결은 폭파를 직접 명령한 채총참모장이 전사한 이후로 군의 최고 책임자인 신성모 국방부장관의 책임을 최창식 대령에게 전가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1961년 9월에 최대령의 부인 옥정애는 재심을 청구하였다. 1962년 5월 15일 보통군법회의는 원심판결 불인(不認) 및 무효를 선고하였고 1963년 10월 23일 결심 공판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 질문1 한강교 폭파의 논란이 계속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최창식 대령의 구속 사유를 써 봅시다.
  • 질문3 최창식 대령의 사형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4 최창식 대령에게 무죄가 선고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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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미공군의 B-29기가 한강교를 공중 폭격하는 장면이다.

  • 질문1 다리 이름을 왼쪽부터 차례로 써 봅시다.

시각자료 2

절단된 한강 인도교(한강 대교) 사진이다.

  • 질문1 한강 인도교가 절단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한강 인도교의 폭파는 당시 어떤 피해와 영향을 주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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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모둠별로 한강 인도교 폭파의 시기와 방법의 적정 여부를 토론하여 봅시다.
모둠활동 2
모둠별로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 대한 모의재판 시나리오를 작성하여 시연해 봅시다
모둠활동 3
모둠별로 한강 인도교 주변의 국방·안보 유적을 답사하기 위한 답사계획서와 답사자료집을 작성하여 봅시다.

모둠활동 4
모둠별로 자기 지역의 6·25 전쟁 참전 용사를 방문하여 경험담을 구술 받아 정리해서 발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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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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