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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재-한봉수의병 전투지(신출귀몰한 청주의 번개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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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한국 침략을 위해 1905년 강압적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였으며 1907년에는 한국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와 같은 일본 제국주의의 국권 침탈에 격분하여 전국 각지에서는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려는 의병 운동이 일어나 항일 운동을 맹렬히 전개하였다. 이곳 모래재에서도 항일 구국의 큰 뜻을 품은 의병장 한봉수가 이정구 등 9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1909년 5월 이곳을 지나는 일본군 우편물 호송대를 습격하여 이들을 사살하고 총기와 탄약, 우편물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한봉수는 충청의병의 대표적인 인물로 1907년 9월에 봉기하여 1909년 말까지 모두 26회의 활발한 활동을 한 것으로 일본 경찰이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일제가 파악한 활동에만 국한된 것이기에 최소한의 통계에 불과한 것이다. 한봉수는 1910년 2월 초까지 60여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청주 인근에서 활동하였으며, 그해 5월 체포될 때 까지 신출귀몰하게 활동하여 사람들은 그를 청주의 번개대장이라 불렀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충청북도 괴산군 사리면 수암리 산50-4 모래재
현재 상태 모래재는 도로공사 등으로 부분 변형된 상태이다.

한봉수는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김규환의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항일전쟁에 나섰다. 한봉수는 1908년 4월 3일 김규환 등 40여 명과 함께 청주군 산외일면 세교리에서 우편행랑을 탈취하여 돈 2,000여 원을 빼앗고, 같은 해 6월 10일에는 김규환 등 여러 명과 함께 청주군 북강외면 부근 보리밭에서 일본 헌병 2명을 저격하여 한명을 사살하는 등 활발한 항쟁을 벌였다. 모래재 의병전투지는 한봉수가 1909년 5월 9명의 부하를 이끌고 괴산군 서면 사치(현, 괴산군 사리면 모래재)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우편물을 호위하는 일본군 2명이 통과하는 것을 공격하여 사살하고 총기·탄약·현금을 노획한 곳이다.

이후 한봉수는 의병을 이끌며 진천·괴산·목천·미원·평택·여주·횡성·문경 등지에서 33차례의 전투를 벌여 32번의 승리를 이끌어내어 ‘유격전의 명장’, ‘번개대장’으로 불렸다고 한다. 1910년 2월까지 충북은 물론 강원과 경상도 일대에서 다양한 투쟁을 전개하던 한봉수는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1910년 6월 내란죄·강도살인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한일 병합 때 특사로 풀려났고, 1919년 괴산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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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읽기자료 1

1907년 일제는 대한 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고, 해산된 군인들은 각지에서 의병에 참여하여 일제를 상대로 가열찬 투쟁을 전개하였다. 청주 진위대가 해산되자 여기에 소속되었던 진위대원 가운데 많은 수가 의병을 조직하거나 가담하였다. 1907년 9월경 청주진위대 해산군인 출신인 김규환이 의병을 일으켜 국권회복을 위한 투쟁에 나서자 한봉수도 이에 가담하여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다. 한봉수가 해산 군인 출신이라는 일본측의 기록도 있으나, 이는 한봉수가 초기에 해산 군인 출신 의병장인 김규환과 함께 활동한 것을 두고 잘못 기록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봉수와 김규환은 1908년 6월경까지 함께 행동하였으며, 이후 한봉수는 독자적인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전국연합의병인 13도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이 실패한 다음 의병의 활동은 일제의 대규모 탄압으로 위축되었으나 한봉수 의병부대는 오히려 이 시기에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한봉수의 의병부대는 대략 20~30명의 소규모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복을 검정색으로 물들여 입었는데 이는 복장을 군복과 같이 하여 군인 출신을 두려워하는 일본군에 대한 심리작전이었다.

한봉수 의병부대는 다른 의병부대들과 연합하여 수백명 규모의 대규모 작전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소규모 부대를 편성하여 헌병이나 경찰에 대한 매복 기습 공격, 우편물 습격 및 탈취, 친일파 처단 및 군자금 마련 등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일본군에 대한 기습이나 우편물 자루를 습격할 때는 20~40여 명 정도가 참여하였으나 친일파를 처단하거나 군자금을 마련할 때에는 6,7명의 소규모로 신속하게 활동하다보니 그야말로 신출귀몰하게 각 지역을 누비며 연전연승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편 행랑을 습격하여 노획한 현금을 어려운 민중들에게 나누어 주며 민중의 지지와 보호를 적극적으로 얻어내는 한편 변절자나 밀고자를 엄중하게 처단함으로써 주민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안정적으로 유격전을 전개할 수 있었다.

한봉수의 의병활동은 1909년에 더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09년 중반에는 속리산으로 부대를 옮겨 그곳을 거점으로 활동하였고, 1910년 말에는 경북 지역으로 이동하여 계속 활동하였다. 일제의 잔혹한 토벌로 인해 많은 의병장들이 체포당하고 해산하는 속에서 그의 활동은 돋보였고, 후기 의병장 가운데 한봉수처럼 장기간 투쟁한 경우도 매우 드믄 사례이다.

  • 질문1 한봉수가 의병에 처음 가담할 때의 국내 상황은 어떠하였는가?
  • 질문2 일본측 기록에는 한봉수를 해산 군인 출신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한봉수는 평민 출신이었다. 한봉수를 해산 군인 출신으로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
  • 질문3 서울 진공 작전 실패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의병활동이 전체적으로 위축되던 시기에 한봉수 의병부대가 장기간에 걸쳐 활발하게 투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읽기자료 2

한봉수는 1910년 2월 의병활동을 중단하고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된 일제를 피하여 처가가 있는 서울로 잠입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의 도주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자수 의사를 밝혔다. 당시 그는 일제의 끊임없는 추격으로 활동 근거지를 철저히 파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부하들도 대부분 체포당하여 더 이상 활동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그의 자수 의사 표시는 당시의 상황을 감안할 때 불가피한 선택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제는 1908년부터 의병에 대해 이른바 귀순정책을 펴고 있었다. 일제는 귀순의병에게 ‘귀순표’를 발급하고 생업에 종사하도록 권고하여 일시적으로 효과를 보기도 하였다.

서울에 잠입해 있던 한봉수는 1910년 5월 충북 경찰부에서 급파한 순사에 의해 체포당하였다. 한봉수가 자수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한봉수의 자수의사를 무시하고 황급히 그를 체포하였던 것이다. 이는 한봉수라는 인물이 일제를 얼마나 고심하게 만들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체포된 한봉수는 1910년 6월 29일 공주재판소 청주지부에서 열린 재판에서 많은 증거를 확보한 일제에 의해 내란죄 주범으로 교수형의 판결을 받았다.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음을 기다리며 옥고를 치르던 그는 8월 29일 국권 침탈 이후 이른바 ‘합방 대사령’으로 출옥하였다.

한봉수가 일제에게 자수의사를 밝혔다 하더라도 이 사실만 가지고 그가 일제에게 항복이나 굴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그가 의병활동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9년 뒤인 3·1 운동 때 만세시위를 주도하며 독립운동의 선봉으로 재등장한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 질문1 한봉수가 일제에게 자수의사를 밝힌 이유는 무엇일까?
  • 질문2 한봉수가 자수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왜 일제는 자진 출두를 기다리지 않고 순사를 보내어 급히 체포하였을까?
  • 질문3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 국권을 완전히 침탈한 후 이른바 ‘합방 대사령’을 실시한 이유는 무엇일까?

읽기자료 3

경술국치 이후 이른바 ‘합방 대사령’으로 석방된 한봉수는 일제 고위 관리의 행차가 있을 때에는 가택 연금을 당해야 했고, 수시로 가택 수색을 당하는 등 일제의 삼엄한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의병장으로서 국권 회복을 이루지 못한 분노를 억누르고 살던 그는 고종 황제가 급서하자 인산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였다가 고향의 선배로서 3·1 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손병희 선생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3·1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1919년 2월 27일 한봉수가 홍명희와 함께 손병희를 방문하자, 손병희는 반갑게 맞은 후 독립선언서를 내놓고 독립 만세 운동에 대한 계획을 설명한 후 두 사람이 청주와 괴산에서 책임지고 독립 만세 운동에 협력해서 활동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귀향 직후 만세 운동을 계획하던 한봉수는 드디어 4월 1일 고향인 세교리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튿날인 4월 2일 다시 세교장터에 모인 장꾼과, 마침 그곳을 지나던 내수보통학교생 85명과 교사들을 규합하여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고 인근 지역인 미원지역의 만세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로 인해 한봉수는 다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5월 6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형을 선고받고 다시 복역하게 되었다.

한봉수는 구국운동을 주도한 후기 의병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서 사형선고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3·1 운동 때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던 것이다.

  • 질문1 한봉수는 어떤 일을 계기로 3·1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을까?
  • 질문2 3·1 운동 당시 한봉수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을까?
  • 질문3 한봉수의 경우처럼 한말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사람이 3·1 운동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에 대하여 조사하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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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은 한봉수 의병장의 생전 모습이다. 한봉수는 1884년 4월에 출생하여 1972년 12월까지 생존하였다.

  • 질문1 한봉수가 처음 의병에 가담하였을 때와 3·1 운동을 주도하였을 때의 나이는 각각 몇 살이었을까?
  • 질문2 한말에 활동한 의병장으로서 광복이후까지 생존하신 분은 많지 않다, 한봉수처럼 일생을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분들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어떻게 예우를 받았는지 조사하여 봅시다.

시각자료 2

다음은 충북 진천에 있는 의병장 한봉수의 항일의거 기념비이다. 1908년 6월 한봉수 의병부대가 일본 헌병기마대의 호위 아래 우편행랑이 진천으로 향하는 것을 습격하여 일본헌병 상등병 시마자키를 사살하고 현금을 노획했다. 당시 일제가 시마자키 상병을 애도하는 순직비(왼쪽 흰색 동그라미 속의 비)를 세웠던 그 자리에 1977년 한봉수 항일의거비가 세워졌다.

  • 질문1 항일의거비를 세우면서 일본 헌병을 애도하는 순직비를 철거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 질문2 의병장과 그가 사살한 일본군의 비가 함께 있는 국내 유일의 역사 현장을 보고 느낀 소감을 간단히 적어봅시다.

시각자료 3

다음은 한봉수 의병의 격전유적비가 있는 모래재의 현재 모습이다.

  • 질문1 이 고개의 이름을 모래재라 부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 질문2 모래재의 지형을 살펴보고 의병 활동 당시의 길과 지금의 길을 비교하여 정리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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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한봉수는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장기간에 걸쳐 다양한 형태의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한봉수 의병장에 대한 기록을 조사하여 한봉수 의병부대의 주요 활동을 연표로 만들어 봅시다.

모둠활동 2
한봉수는 33차례의 전투를 벌여 32번의 승리를 이끌어내어 ‘유격전의 명장’, ‘번개대장’으로 불렸다고 한다. 한봉수가 수십차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요인을 분석하여 정리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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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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