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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부상병 피학살지-국군병원(제네바협약 위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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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서울대학교 병원 내에 있는 현충탑 ‘이름 모를 자유 전사의 비’의 비문 내용이다.

 

이름 모를 자유 전사의 비


1950년 6월 28일
여기 자유를 사랑하고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운 시민이
맨 처음 울부짖은 소리 있었노라
여기 자유 서울로 들어오는 이 길목에
붉은 군대 침공해 오던 날
이름도 모를 부상병 입원 환자 이들을 지키던 군인 시민 투사들이
참혹히 학살되어
마지막 조국을 부르는 소리 남겼노라
그들의 넋은 부를 길이 없으나
길게 빛나고
불멸의 숲 속에 편히 쉬어야 하리
겨레여 다시는 이 땅에
그 슬픈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게 하라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28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병원
현재 상태 변형, 지형은 거의 바뀌지 않았고, 주변 모습만 많이 바뀌었다.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 옆에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6·25 전쟁 일어난 직후인 1950년 6월 26일부터 서울대병원은 국군 부상병을 치료하는 육군병원 체제로 바뀌었다. 그러나 28일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하자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부상병들은 철수는커녕 전투부대와 연락체제를 유지하지 못하고 버려진 처지가 되었다. 미아리를 지나 서울시내에 진입한 북한군은 서울대학병원에 입원 중이던 전상자들을 학살했다. 시체는 트럭으로 한강에 버려지거나 뒷동산에 매장되었다. 이 와중에 걸을 수 있는 부상병 중 일부는 민간인 복장으로 위장하여 탈출했다.

1963년 7월 한국일보사에서는 학살당한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서울대병원 학살현장 인근에 비를 건립하였다. 1999년 6월 현충일에 서울대학병원장이 안내표지를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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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6월 28일 새벽 수도 방어를 위한 국군의 마지막 보루였던 미아리 방어선이 무너지자 북한 제1군단(군단장 중장 김웅)은 제105전차여단과 함께 그날 한강 북쪽의 도하점올 폐쇄하는 한편 시내의 주요 기관을 장악하여 적화 체제를 굳히게 되었다.

북한군은 그들의 제1단계 목표인 이른바 서울 점령을 자축하는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28일 낮은 그대로 보내고 그 뒤부터 한강 도하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부대 전개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북한군 제4사단(사단장 소장 이권무)은 28일 새벽 5시 30분에 동북쪽으로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28일 아침 8시 무렵 제18보병연대가 서울의 북쪽 변두리를 점령하였다. 이후 신촌 일대에 자리 잡아 한강대교(인도교)에서 마포-서강에 이르는 여의도의 대안을 점령하여 장차 영등포에서 도하하고자 하였다.

북한군 제3사단(사단장 소장 이영호)은 퇴각하는 국군 부대들의 저항을 극복하면서 서울을 남쪽으로 우회하여 오후 4시 무렵 서울의 남쪽 변두리인 이촌동(현 이촌2동 한강철교와 원효대교 사이)을 점령하였다. 그 후 사단은 용산 일대에서 이촌동-한남동 사이의 강변에 병력을 배치하여 장차 신사동으로 이동하고자 하였다.

북한군 제6사단(사단장 소장 방호산)은 개성 일대를 점령한 후 김포 반도로 진출하여 영등포 및 인천을 점령한 후 이곳에 머물다가 제4사단이 수원을 공격할 때 뒤를 따랐다. 북한군 제1사단(사단장 소장 최광)은 뒤늦게 수색 일대에 입성하였으나 전투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아 제2군단으로 배속이 전환 되었다.

제105전차여단은 28일 05:30부터 서울 북동 및 동쪽으로부터 진입한 후 주로 방송국, 발전소, 우체국, 전신국 및 도시의 여타 행정기관을 점령하였다. 이후 28일 4시 무렵 사단의 주력이 서울 북부와 중심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리하여 다시 한번 한강선의 돌파에 선두가 된 북한군 제3사단과 제4사단은 각각 관측소를 남산과 와우산(105고지) 및 노고산(104고지)에 두고, 포병연대로 하여금 남산 기슭과 신촌 일대에 포를 쏘도록 하여 화력지원 태세를 갖추게 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북한군 사단장들은 서울에서 퇴각하는 국군을 적극적으로 추격하거나 한강 도선장을 점령하지 않은 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모호하게 행동하였다. 또한 제105전차여단 예하 부대들도 서울을 점령한 후 3일 동안 국군을 추격하지 않은 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음으로써 국군에게 한강의 남쪽 강변을 강화하고 교량을 파괴할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 질문1 북한군의 서울 점령은 최종적으로 아군의 어떤 방어선의 무너졌기 때문인가요?
  • 질문2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 부대 이름을 써 봅시다.
  • 질문3 북한군 제105전차여단이 점령한 서울의 주요 기관은 무엇인가요?
  • 질문4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아군의 한강선 방어에 선두가 된 북한군 부대 이름을 써 봅시다.
  • 질문5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국군에게 한강의 남쪽 강변을 강화하고 교량을 파괴할 여유를 주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2

북한군의 서울 진입에도 불구하고 개전 직전에 서울 시내의 각 종합병원에 임시 수용된 전상자에 대한 후송 대책은 전혀 강구되지 않았다. 6월 24일 당시에 각 육군병원에 입원 중인 환자는 대방동의 수도육군병원에 129명, 부평의 제1육군병원에 518명, 대전의 제2육군병원에 200명, 제3육군병원에 129명, 제5육군병원에 277명 등 총 1,276명이었으나 전쟁이 시작된 3일 동안 3,200명의 전상자를 내어 병원의 수용 능력을 넘어서게 되어 그 긴급대책으로 종로의 서울대학병원, 청량리의 서울위생병원, 서대문의 서울적십자병원, 을지로의 서울시립병원, 용산의 철도병원 등 시내 종합병원에 이들을 수용하게 되었다. 이 때 각 병원에 수용된 환자는 서울대학부속병원에 100명, 그 밖의 병원에는 각 70여 명씩 수용되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북한군의 갑작스런 서울의 진입으로 진입하자 스스로 진로를 길을 개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질문1 6·25 전쟁 직전의 전상자는 몇 명이었나요?
  • 질문2 6·25 전쟁 개전 3일 동안 발생한 전상자는 몇 명이었나요?
  • 질문3 늘어난 전상자를 수용하기 위해 세운 대책은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3

1950년 6월 28일 아침, 북한군은 붕괴된 미아리 방어선을 뚫고 중앙청으로 향했다. 본대에서 갈라져 나온 200여명의 북한군은 아침 9시를 조금 지나서 서울대학병원을 공격하였다. 서울대학병원은 사흘간의 서울 북부 전선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국군 부상 환자로 만원 상태였다.

서울대학병원의 환자들은 전선이 붕괴된 상황에서 후방으로 긴급 후송이 되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1개 소대의 병력만이 배치되어 경비를 맡고 있었다. 북한군에 맞서 경비 소대는 용감히 싸웠지만 한 시간도 못되어 소대장을 비롯한 부대원 대부분이 전사하였다.

서울대학병원에 난입한 북한군은 외곽은 물론 각 건물마다 병력을 배치했다. 당시 서울대학병원은 현재 대본관이 있는 자리에 1·2·3·5 동의 병동이 있었으며, 병상 수는 800석이었다. 각 병실마다 국군 부상자와 민간인들이 뒤섞여 아비규환이었으며, 침상이 부족하여 국군 환자들은 입원실 바닥, 복도에 누워서 생사를 헤매고 있었다. 6명이 입원하는 병실의 바닥에는 피 묻은 군복을 그대로 입은 채 국군 환자가 30여명이나 누워서 신음하기도 했다.


  • 질문1 서울대학병원을 공격한 북한군의 규모와 시점을 써 봅시다.
  • 질문2 서울대학병원을 경비하던 국군의 경비 병력 규모는 얼마였나요?
  • 질문3 당시 서울대학병원의 규모를 써 봅시다.
  • 질문4 북한군의 서울대학병원 점령 당시 상황을 써 봅시다.

읽기자료 4

북한군 중좌의 총지휘로 전상자에 대한 학살을 감행하였다. 이 학살은 전투 중에 발생한 우발적 학살이 아니라 지시에 따라 체계적으로 진행된 기획 학살이었다. 월북했던 의사가 북한군 군의관이 되어 따발총을 매고 나타난 자를 비롯하여 서울대학병원에서 잠복해 있던 4~5명의 좌익 부역자들이 북한군을 따라 다니며 학살 대상에 대한 세세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병동의 출입구를 모두 봉쇄한 북한군은 병실마다 찾아다니며 따발총을 난사해서 국군 환자들을 학살했으며 국군 부상병과 구분이 안가는 일반 환자들도 같이 학살하였다.

환자 중에 권총을 가진 간부급들은 병실에 난입한 북한군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전사하기도 하고 자결하기도 했었다. 환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죽이던 북한군은 아예 환자들을 입원실 구석에 몰아넣고 사살해 버렸다. 북한군은 사살 후 총검으로 아직 죽지 않은 국군들의 가슴이나 목을 찔러서 확인 살인을 하였다.

서울대학원에는 정신 병동이 있었다. 이들은 정신 분열증의 중증 환자가 아니라 강박증이나 환청 등 가벼운 심리 장애 증세를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북한군은 이들을 모두 총검으로 살해하였다. 도주 할 곳이 없었던 이들은 창문에 매달려 숨어 보려고 했지만 북한군은 이들을 총창으로 내리찍어 땅바닥으로 떨어뜨려 죽였다.

다른 병실에서 총성이 들리고 학살이 시작된 것을 알아챈 국군 부상병들은 몸을 억지로 움직여 탈출을 시도했지만 병동의 앞을 지키는 북한군에게 모두 사살 당하였다. 그래도 요행히 병동을 탈출한 국군은 병원을 벗어나고자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북한군이 그 뒤를 쫓으며 총을 쏘거나 총검을 휘둘러 죽였다. 중상을 입고 움직이지 못하는 국군 장병 중에는 혀를 깨물고 자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약 세 시간 동안 국군 부상병을 학살했음에도 아직 죽이지 못한 국군 환자들이 많다고 생각한 북한군은 또다시 학살을 감행하였다. 오후에는 각 병실과 건물을 다시 뒤져 생존한 국군들을 찾아내서 치과 대학 앞에 집합시켰다. 집합한 국군환자들에게 따발총으로 사격을 가했으며 쓰러진 시체더미를 헤치며 숨이 붙은 환자들은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이때에도 국군으로 의심되는 환자나 방문 가족까지도 죽였다. 그렇게 죽이고도 아직도 부족하다고 느낀 북한군은 오후 늦게 또 다시 정밀 수색으로 거동 수상자를 색출해 내서 병원 보일러실 석탄더미에 이들을 생매장하였다.

서울대학병원의 학살이 끝나기도 전에 북한군 환자들이 소 달구지와 민간차량 등에 운반되어 들어와 병상을 차지하였다. 6월 29일에는 북한군에 부역하는 좌익 근무자들이 병원 본관 앞에서 단합대회를 열기도 하였다.


  • 질문1 북한군에 의한 서울대학병원 학살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 질문2 북한군은 학살 초기에는 어떠한 방법을 사용했나요?
  • 질문3 북한군은 학살을 쉽게 하기 위해 어떠한 방법을 사용했나요?
  • 질문4 북한군은 정신병동에서는 환자들을 어떻게 학살했나요?
  • 질문5 북한군은 오후에는 환자들을 어떻게 학살했나요?

읽기자료 5

서울대학병원에서 학살당한 국군의 숫자는 100명 설에서 1,000명 설까지 정확하지 않다. 서울대학병원 여기저기에 널려있던 시체는 더운 여름 날씨에 부패하기 시작하였다. 인근 주민들은 시체 썩는 냄새로 더운 여름 날씨에도 불구하고 문을 닫고 살아야 했다. 병원 앞을 지나다니던 행인들도 시체 썩는 냄새 때문에 코를 막고 뛰어서 지나가야 했다. 사체를 20여일 동안 방치하던 북한군은 사체들을 모두 모아 창경궁 앞과 원남동 로터리에서 화장하였다. 국군 시체의 타는 냄새 주민들을 소름 끼치는 공포로 몰아넣었다

서울대학병원에서의 북한군의 만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9·28 서울수복 전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았거나 불순분자로 분류된 100여명을 서울대학병원 구내에서 학살하였다.

서울대학병원 전상자에 대한 잔인한 학살은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던 당일에 자행되었다. 적의 수도를 점령하면 민심을 얻기 위해 우호 정책을 쓰는 것이 일반적인 정책이었다. 하지만 북한군은 점령 당일에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하고, 사체들을 20여일 간이나 방치하는 인면수심의 무도함을 자행하였다.


  • 질문1 북한군은 며칠 동안 사체를 방치했나요?
  • 질문2 북한군은 사체를 화장한 장소는 어디인가요?
  • 질문3 북한군은 9·28 서울수복 이전에 서울대학병원에서 어떤 일을 저질렀나요?

읽기자료 6

"미국에 와서 살고 있습니다. 전쟁이 터지고 얼마 안되어 서울대학병원에서 대학살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 때 14살이었습니다. 당시 서울대학 간호대학 옆, 또 창경궁 정문 옆을 지나다니면서, 산더미같이 겹쳐 쌓아 누인 그 시신들, 비와 햇빛에 썩어가는, 복부가 잔뜩 부풀은 시신들을 보고 다니며, 어린 나이였지만 그 시신들을 향해 내면으로 위로를 보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당시 국군이 사용했던 대포가 열 문 정도 쓰러져 있었는데, 나는 신기해서 그 총포를 구경하러 앞에 다가 갔다가, 그 썩는 냄새 때문에 도저히 더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그 때 그 시신들은 100명 아니라, 1,000명쯤 넘어 보였습니다.

당시 3개월간의 어둡고 무서웠던 기억이, 그 대학 병원 앞의 처참한 모습이 70 중반을 넘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저의 부친도 저들 북한군의 잔학한 손에 끌려가 학살 순교하셨을 겁니다.“"


  • 질문1 당시 학살된 국군 부상병의 시체를 쌓아 놓은 곳은 어디인가요?
  • 질문2 목격자는 학살당한 인원을 몇 명으로 기억하고 있나요?
  • 질문3 학살 현장은 목격자에게 어떤 생각을 갖게 했나요?

읽기자료 7

제네바협약은 전쟁으로 인한 희생자 보호를 위하여 1864년에서 1949년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체결된 국제조약이다. 제네바협약의 목적은 전쟁 기타 무력분쟁이 발생한 경우에 부상자, 병자, 포로, 피억류자 등을 전쟁의 위험과 재해로부터 보호하여 가능한 한 전쟁의 참화를 경감하려는 것이다.

1949년 8월 12일 제네바회의에서 채택된 1949년 제네바 협약은 「전지(戰地)에 있는 군대의 부상자 및 병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조약」, 「해상에 있는 군대의 부상자·병자·난선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조약」, 「포로의 대우에 관한 조약」, 「전시(戰時)의 민간인 보호에 관한 조약」 등 4개 조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전지에 있는 군대의 부상자 및 병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조약」 제12조는 전지에서의 부상자와 병사자를 보호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조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대의 구성원과 기타의 자로서 부상자 또는 병자인 자는 모든 경우에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한다. …그들은 성별, 인종, 국적, 종교, 정견(政見) 또는 기타의 유사한 기준에 근거를 둔 차별 없이 인도적으로 대우 또는 간호되어야 한다. 그들의 생명에 대한 위협 또는 그들의 신체에 대한 폭행은 엄중히 금지한다. 특히 그들은 살해되고 몰살되거나 고문 또는 생물학적 실험을 받도록 되어서는 안된다."

  • 질문1 제네바 협약이 시작된 해는 언제인가요?
  • 질문2 제네바 협약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 질문3 4개의 제네바 협약 중 「전지에 있는 군대의 부상자 및 병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조약」 제12조를 요약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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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서울대병원 구내에 있는 현충탑이다.

  • 질문1 서울대병원 구내에 현충탑이 세워진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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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모둠별로 북한군의 국군부상병 학살이 제네바협약에 어떻게 위배되는지 토론하여 봅시다.
모둠활동 2
모둠별로 자기 지역에서 북한군에 의하여 일어난 학살 사건을 조사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모둠별로 북한군의 국군부상병학살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작성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4
모둠별로 자기 지역의 6·25 전쟁 참전 용사를 방문하여 경험담을 구술 받아 정리해서 발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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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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