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영역

본문영역

  • 도입
  • 역사적 배경
  • 읽기
  • 시각자료
  • 모둠활동

주요사적지 배움터

제천의병 남산전투지(제천의병의 처절했던 최후 격전지)

도입

제천 남산은 제천의병의 항일 정신이 깃든 격전지이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제천의병은 유인석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1896년(고종 33) 2월 17일에 충주성을 함락시키는 등 기세를 떨쳤으나, 가흥과 수안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와 관군의 공세로 3월 5일 충주성을 빼앗기고 다시 제천으로 후퇴하였다. 의병은 남산에 주둔하면서 중앙공원 아후산에 지휘소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에 의병의 방어선은 점차 밀렸고, 5월 25일에는 근거지인 남산에서 최후의 방어전을 벌였다. 이 남산 전투에서 중군장 안승우와 종사관 홍사구를 비롯하여 많은 의병들이 순국하였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충청북도 제천시 화산동 남산 191
현재 상태 변형 / 현재 유적지로 정비되어 있다.

1895년 단발령이 내려지자 위정척사에 앞장섰던 유인석을 창의대장으로 하여 제천의병이 궐기하였다. 제천의병은 1896년 2월 충주성 함락에 성공하였으나, 가흥과 수안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와 관군이 충주성을 포위하고 공격해 오자 3월 5일 충주성을 포기하고 다시 제천으로 이동하였다.

유인석 부대가 다시 제천에 거점을 확보하자 문경지역의 이강년 부대 등 각처에서 활동하던 의병 부대들이 속속 제천으로 몰려들어 유인석 의병 진영에 합류하였다. 유인석은 군세가 강화되자 제천을 중심으로 하여 주위의 단양, 청풍, 원주, 영월, 평창, 정선 등에 수성장을 임명하고, 제천으로 들어오는 요지에 병력 배치를 강화하여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관군의 지휘관인 장기렴은 의병에게 해산과 귀순을 권유하고, 의병측은 관군에게 의병에 협력하도록 종용하는 서신을 보내어 서로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5월 23일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25일 중군장 안승우는 제천의 병력을 남산에 집결시켜 관군과 최후의 결전을 시도하였다. 관군이 장기렴의 진두지휘 아래 남산을 공격하자 의병은 화승총을 이용하여 이에 맞섰으나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관군에게 밀려 패하고 말았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읽기

읽기자료 1

1895년 조선의 국모 명성 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조선의 각지에서 의병투쟁이 전개되었는데 이를 을미의병이라 한다. 을미의병 중 특히 두드러지게 활동을 한 것이 제천의병이다. 제천의병은 1896년 지평(현재 경기도 양평군)의 안승우·이춘영 의병에서 시작됐다. 안승우는 포군장 김백선과 포수 400여 명을 주병력으로 원주관아를 점령하고 제천에 무혈 입성했다. 이들은 제천에서 이필희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단양으로 진격, 일본군과 싸워 승전고를 울렸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군과 관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영월로 퇴각하였고 유인석이 창의대장을 맡아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유인석은 제천 관아를 접수하고 인근 아사봉에 진을 친 후 중군장에 이춘영, 전군장에 안승우, 선봉장에 김백선, 소모장에 서상렬을 임명하는 등 지휘부를 재정비하고 각지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니 유인석의 격문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속속 의병에 참가하여 그 병력이 1만여 명에 달했다.

유인석이 지휘한 제천의병은 여세를 몰아 남한강을 건너 충주성을 공략했다. 당시 충주성에 주둔하고 있던 관군 400여명과 일본군 200여명은 제대로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쫓겨 나갔고, 충주성을 점령한 의병들은 강제로 단발령을 시행한 관찰사 김규식을 처단했다.

애초에 제천의병은 충주성을 장악한 후, 인근의 호응을 받아 서울 쪽으로 진출하려고 했다. 그러나 충주성을 되찾으려는 일본군과 관군의 집요한 공세에 시달리게 되었다. 결국, 제천의병은 고립된 상태에서 더 견디지 못하고, 보름 넘게 장악하였던 충주성을 버리고 근거지인 제천 지역으로 물러서고 말았다. 제천의병이 제천을 근거로 하여 장기전에 들어가자 일본군은 보급로를 끊고 압박을 가하였고 의병들은 식량과 소금이 부족하여 큰 고통을 겪게 되었다. 이런 국면을 호전시키고자 제천의병은 적극적인 공세에 다시 나섰다. 충주 쪽의 적을 방어하고 있던 후군장 신지수, 좌군장 우기정과 우군장 안성해 등으로 하여금 선봉장 김백선과 함께 가흥을 공략하게 하고, 이강년의 유격군을 수안보·조령 일대에 보내어 영남 지역에서 소모장 활동을 하던 서상렬의 부대와 협조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에 밀려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게다가 여러 장수가 공동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증폭되어 봉기 초부터 의병을 이끌어 왔던 선봉장 김백선이 희생되는 사건이 일어나 의병들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한편, 정부는 아관 파천 이후 친러 내각이 수립되면서 집요하게 의병 해산을 요구했다. 강화 진위대장 장기렴은 병력을 이끌고 충주 쪽으로부터 들어와서 왕명을 내세우면서 의병을 해산하라고 윽박질렀다. 그러나 제천의병은 완강히 해산을 거부하면서 제천 인근 지역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고 항전의 의지를 불태웠다. 이후 한 달이 넘도록 관군과 의병은 대치상태를 지속하였으나 식량과 물자 부족으로 커다란 어려움을 격어야 했다.

결국, 5월 25일 장기렴의 군대가 청풍 쪽으로부터 제천으로 쳐들어오자 제천의병은 독송정·남산·수도산 등의 요새지를 구축하고 맞서 싸워 관군을 물리쳤다. 그러나 갑작스런 비바람으로 의병들의 화승총이 기능을 잃게 되자 관군은 제천을 일거에 장악하였고. 남산성에서 전투를 독려하던 중군장 안승우와 종사 홍사구는 피신하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우다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 질문1 충주성을 점령했던 제천의병이 퇴각하여 제천을 거점으로 장기전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 질문2 왜 제천의병은 관군들이 왕명을 내세우면서 해산을 종용하는 것을 끝까지 거부하였을까?

읽기자료 2

왕비가 일본 폭도들에게 무참하게 시해당하고, 단발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들은 유학자 안종응은 의분을 참지 못하고 급히 아들을 찾았다. 그는 이미 수십 자루의 창을 만들어 놓고 관리들이 삭발하러 올 경우 처단하기로 작정, 뜻을 함께 하는 우국지사들을 불러 모으던 중에 김백선과 이춘영 등이 의병을 일으키고자 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아들 승우를 불렀던 것이다. 당시 안승우(1865~96)는 충북 제천 장담에 가 있었다. 성재 유중교의 문인들이 이른바 '갑오·을미왜란'에 맞서 열었던 중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화서 이항로에서 유중교로 이어진 '화서학파(華西學派)'의 총수였던 의암 유인석은 국외로 가서 후일을 도모하자고 했지만, 안승우는 서상렬, 이필희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자고 뜻을 모았다. 그러던 차에 부친의 부름을 받고 급히 지평으로 돌아온 것이다.

안승우가 지평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김백선과 이춘영 등이 의병을 일으켜 포군 400여 명을 이끌고 강원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로 향한 뒤였다. 안창은 교통의 요지인 데다가 이춘영의 처가가 있는 곳, 이춘영이 처가의 도움을 받아 의병 봉기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때에 안승우가 의병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안승우와 이춘영은 유생으로 지평뿐만 아니라 인근에도 이름이 나 있었고, 김백선은 동학 농민 운동 때 농민군을 가장한 무뢰배를 척결해서 절충장군의 첩지를 받았기에 그들의 의병 봉기에 호응하는 이가 많았다.

1896년 1월 지평의병이 강원 원주에서 일어나 이튿날 원주관아를 점령하고, 그 다음날 제천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이필희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군사에 서상렬, 중군장에 이춘영, 안승우는 군무도유사를 맡는 의진이 구성되었다. 그리고 단양 장회협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했지만 이필희 대장이 사임하자 이춘영과 서상렬은 의병 모집을 위해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

2월 2일, 안승우가 영월에서 머무르고 있을 때 유인석이 찾아오자 안승우는 유인석에게 의진의 대장이 되어줄 것을 간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유인석은 의병을 이끌고 제천으로 와서 본영을 설치하고 제천과 인근 지역의 의병을 규합하여 그달 17일 충주관찰부가 있던 충주성을 점령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관군과 일본군은 이튿날부터 총공격을 해 왔다. 23일 조령과 수안보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중군장 이춘영이 전사하자 이어 임명된 안승우가 남산을 지켰다. 29일 적의 세력이 왕성하여 남산을 지킬 수 없어 철군하니 적군은 충주성 바로 아래까지 육박해 왔다. 3월 5일 의진은 충주성을 포기하고 달천을 거쳐 청풍으로 들어갔으며, 8일에 제천에 이르러 본영을 설치했다.

3월 16일 가흥 방면으로 총공격전을 전개하기로 하고 선봉장 김백선을 중심으로 후군과 좌·우군이 합세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김백선은 일본군의 세력이 예상보다 우세하므로 증원군을 요청했으나 본진에서 의진을 총괄하던 안승우는 "계획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요는 사기를 보아 결정하여야 할 일이요, 군사가 적음을 말할 것이 아니다. 더구나 중심지지(中心之地)를 비우고 많은 군사를 보낸다는 것은 그릇된 계산이 아니겠느냐"며 증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결국 의진의 협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가흥 진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회군한 김백선은 안승우에게 대들었다.

"중군장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오? 왜 언약한 대로 응원군을 보내주지 않았소?” 라며 가흥(현 경북 영주시)에서 일본군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제천 본진으로 돌아온 김백선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안승우를 요절낼 듯이 칼을 뽑아들었다.

안승우가 "중군의 병사를 함부로 뺄 수 없었소. 중군의 소임은 대장을 옹위해야 하잖소?” 라고 말하자 김백선은 "뭣이라고? 왜 보내준다는 응원군을 보내지 않았느냔 말이외다.”라고 맞섰다.

선봉장 김백선이 중군장 안승우에게 거칠게 항의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의병대장 유인석은 분노로 인해 수염을 부르르 떨면서 "그대는 본시 한낱 포수에 불과한 상민이었거늘, 어찌 분수를 모르는가? 여봐라! 저 자를 군령위반죄로 다스려서 포살하라!"라고 호령하였다.

결국 산포수들을 이끌고 충주성을 점령했던 호좌의진 선봉장 김백선이 수많은 동료 의병들이 모인 가운데 군령위반죄로 총살되었다. 이 일로 인해 의진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던 포수들이 이탈하고, 의병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의진에서는 단양·영월·원주·정선·지평·청풍·평창 등지에 수성장을 배치하여 해당 읍성을 장악, 의병을 모으고 군수물자를 담당하게 하였지만, 의병 해산을 종용하는 선유조칙이 내려오자 의병들의 동요는 심해지고 장기렴이 이끄는 관군의 공격은 날로 드세어 갔다.

5월 25일, 마침내 안승우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새로 쌓은 남산성에서 싸움을 독려하는데, 설상가상으로 폭우가 쏟아졌다. 의병의 주무기인 화승총은 쓸 수 없는데 관군의 총탄은 비 오듯 했다. 안승우는 돌을 던지며 끝깢; 대항하다가 체포되어 모진 매를 맞고 절명하였다. 안승우는 지평의병과 제천의병의 연합의진이었던 '을미 호좌의진'의 중군장으로 활약했지만, 실제로는 당시 유림의 최대 학통이었던 화서학파가 의병에 적극 참여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질문1 중군장 안승우는 왜 선봉장 김백선에게 응원군을 보내주지 않았을까?
  • 질문2 의병대장 유인석이 선봉장 김백선을 처형한 이유는 무엇인가?
  • 질문3 김백선의 처형은 제천의병에 어떤 영향은 주었을까?

읽기자료 3

홍사구(1878~96)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돈독하게 자랐다. 그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잡혀가서 끝까지 굽히지 않고 싸웠던 3학사 홍익한의 후손으로 증조부 홍운은 수차례 걸쳐 감사를 지냈고, 아버지도 높은 벼슬에 오른 좋은 가문에서 자랐다. 결혼 후 제천에서 살 때 이웃에 사는 안승우를 매일 찾아가서 예의를 다하여 안승우의 제자가 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맞서 스승 안승우가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제천의병의 중군장이 되자 홍사구는 안승우의 종사관이 되어 의병에 참여하였다. 제천의병은 한 때 충주성을 점령하기도 하였으나 일본군과 관군의 반격에 밀려 수안보 전투에서 이춘영, 주용규 등 장수들이 전사하고 전세가 불리해지자 다시 제천으로 후퇴하였다. 이 때 홍사구는 스승 안승우와 함께 남산에 진을 치고 관군에 맞섰다.

1896년 5월 25일 관군 장기렴의 부대가 제천으로 쳐들어와 남산성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폭풍우가 불고 비가 퍼 부어 의병들의 화승총에 화약을 넣을 수가 없고 화승에 불이 꺼져 총기를 사용할 수 없는데 반하여 일본군이 있는 안전 지대에서 총알이 계속 날아왔다. 스승 안승우가 적의 총탄에 무릎을 맞아 사로잡히자 의병들이 모두 흩어졌으나 홍사구만이 홀로 남아 호위하였다. 안승우는 홍사구에게 “나는 이미 의병의 대장으로 마땅히 죽을 때 죽기로 작정하였지마는 네가 나와 같이 죽은 것은 무익하다. 몸을 보존하여 후일을 도모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홍사구는 “종사가 되어 주장이 화를 입는 것을 보고 어찌 혼자만 살 수 있으며, 제자가 되어 스승이 화를 입는 것을 보고 어찌 혼자만 살 수 있겠습니까. 친구 간에도 환란을 당하면 어버이가 계시다고 해서 피할 수 없는 일인데 더구나 스승에게 이겠습니까.”하며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안승우가 적에게 욕을 당하자 홍사구는 “너희들이 비록 짐승의 무리라 할지라도 극히 미미한 슬기가 있다면 반드시 충신과 역적을 분별하고 사람과 짐승의 구별은 알 것이다. 우리가 대의를 의지하여 적을 막아내는 것인데 감히 이럴 수가 있느냐.” 하면서 몸을 돌려 막대 속에 감추어 두었던 칼을 빼어 급히 적을 내리쳤다. 당황한 관군들은 총을 쏠 겨를도 없이 총칼로 마구 내리쳐 홍사구는 두 팔이 잘린 채 전사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19세에 불과하였다. 며칠 후 동료 박정수, 이정규 등이 시신을 수습하여 갈마골에 묻었는데, 한동안 무덤이 잊혀졌다가 발견되어 의림지 동남쪽 산중턱으로 이장하였다. 2007년 4월 25일 다시 현재의 제천시 고암동 순국선열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질문1 의병장 홍사구는 왜 19세의 어린나이에 의병에 참여하였을까?
  • 질문2 홍사구가 스승 안승우의 곁을 끝까지 떠나지 않고 호위한 이유는 무엇인가?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은 제천의병 기념탑으로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구국의 일념으로 목숨을 바친 제천의병의 숭고한 의병정신을 기리고 있다. 제천의병은 한말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 등 계속적으로 봉기한 의병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제천은 의병의 본 고장으로 평가 받고 있다.

  • 질문1 제천이 의병의 본고장으로 평가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 질문2 제천에서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 등 계속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여 활동하였다. 제천에서 활동한 주요 의병을 시기별로 조사하여 정리해 봅시다.

시각자료 2

다음은 제천시 고암동 순국선열 묘역에 있는 의병장 홍사구의 묘이다. 홍사구가 전사한 며칠 후 동료 박정수, 이정규 등이 시신을 수습하여 갈마골에 묻었는데, 한동안 무덤이 잊혀졌다가 발견되어 의림지 동남쪽 산중턱으로 이장하였다가 2007년 4월에 현재의 순국선열 묘역으로

  • 질문1 왜 제천에 순국선열 묘역이 만들어지게 되었을까?
  • 질문2 제천 순국선열 묘역에는 어떤 사람들이 안장되어 있을까?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모둠활동

모둠활동 1

제천이 의병운동의 본고장이라 불릴 정도로 을미사변 이후 국권피탈에 이르기까지 의병 활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배경을 조사하여 발표합시다.

모둠활동 2
의병장 안승우와 김백선의 대립과 김백선에 대한 군령위반죄 처형은 제천의병의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모둠을 나누어 두 사람의 견해에 대한 찬반토론을 하고 종합의견을 정리해 봅시다.
모둠활동 3
제천에서 매년 행해지고 있는 제천의병제의 주요 프로그램을 알아보고 토론을 통하여 제천의병제의 발전 방안을 모색해 봅시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하단영역

관련사이트

주소: 31232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독립기념관로1  전화: 041-560-0405 팩스 : 041-560-0426 
 Copyright 2021 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