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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병호 생가(자신과 가족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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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여 우리는 참담한 멸망을 면(免)하야 자생(自生)을 도(圖)하려 하나니,
전(戰)하면 생(生)하고 부전(不戰)하면 사(死)할지라.
하물며 역천(逆天)하는 적의 패멸(敗滅)에 조(遭)함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함이리오.
유아배달족(唯我倍達族) 신남신녀(神男神女)는
이천만의 철혈(鐵血)을 일합(一合), 일거(一擧)에 적을 파쇄(破碎)하야
무궁화 삼천리 조국의 국권을 광복하고
백두산상(白頭山上) 태극기하(太極旗下)에
명년(明年) 금일(今日)을 기념하기로 신전에 맹서합시다.
-연병호가 1920년 3월 1일 독립신문에 기고한 글-"

 

연병호는 우리 민족이 참담한 멸망에서 벗어나 스스로 살 길을 도모함에 있어 힘써 싸우면 살 것이요 싸우지 않으면 죽을 것임을 역설하였다. 하늘을 거역하는 일본이 패망할 것이 불을 보듯 명확하니 이천만 우리 민족이 피 흘려 싸워 적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삼천리 조국의 국권을 되찾아 백두산 위 태극기 아래 내일을 기념할 것을 신 앞에 맹서한 그는 일생을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광복 이후 제헌국회의원으로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하였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 555
현재 상태 복원 / 현재 복원사업 결과 초가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주변 담장과 신축 사당이 인접하여 있다. 경내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고, 당초 있었던 연자방아가 남아있다.

연병호(1894~1963)의 호는 도명(圖明)이며 증평에서 출생하였다. 청안 중명학교와 북간도 창동학원, 베이징대학을 졸업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청년 외교단을 조직하였고,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후원하였으며, 외교를 통해 일본을 규탄하고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다.

1920년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뒤, 베이징에서 독립 혁명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1922년에는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1937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활동하던 중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8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임시정부 한국준비위원회 영접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괴산군에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50년에도 국회의원에 재선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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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연병호는 1894년 11월 22일,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에서 태어나 괴산군 청안면에 있었던 중명학원을 수료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연길시 창동학원, 그리고 북경시 중국대학교 등에서 공부하였다. 중국에서 공부를 하게 된 동기는 일찍이 영국에서 유학을 하고 1910년대 초 중국 연길시 용정촌에서 세관원으로 근무하던 형 병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일제에 의하여 주권을 강탈당하자 연병호는 25세가 되던 해인 1919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만주, 난징, 상하이 등지로 전전하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국내에서 임시정부를 후원하기로 하고 동지 송세호와 함께 입국하였다. 1919년 5월 이병철, 조용주 등과 비밀 항일운동 단체인 ‘대한 독립 청년 외교단’을 조직, 독립운동자금 모집과 임시정부에 정보제공 등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대한 독립 청년 외교단은 연병호·송세호·이병철 등이 조직한 항일 독립 운동단체로 민족의 독립 정신을 고취하고 상해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한편, 국제 외교를 통해 일본의 침략행위를 규탄, 독립을 쟁취할 목적으로 애국청년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회원은 40여 명으로, 서울에 본부를 두고 안재홍을 총무로 임명, 임시정부에 건의서와 자금을 보냈으며, 1919년 8월에는 국치일을 맞아 「국치기념경고문」, 「외교시보」를 인쇄·반포하여 국민계몽에 힘썼다. 그 후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독립 운동 참가단체 조사표」, 「피해 의사(義土) 조사표」, 「가옥파괴 조사표」 등을 작성했으며, 기구를 확대하여 배달청년단으로 확대·개편하려다가 그해 11월에 일본 경찰에 의해 발각되어 많은 회원들이 검거됨으로써 해체되었다

연병호는 청년외교단 사업의 일환으로 여성들의 비밀 결사 조직인 대한 애국 부인회와 긴밀한 협조를 취하며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으며, 출옥 후 다시 상하이로 탈출하여 1921년 4월 한인의 단결을 목적으로 조소앙과 함께 ‘세계한인동맹회’를 설립하여 독립 운동을 계속하였다. 1922년 7월에는 국민 대표 회의 개최 등으로 독립운동 단체들의 분규가 심해지자 안창호·김현구·조소앙 등과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여 수습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서로의 의견이 나뉘게 되자 조소앙·김용철·조완구·이기용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를 탈퇴하였다.

  • 질문1 연병호는 대한 독립 청년 외교단에서 어떤 활동을 하였을까?
  • 질문2 연병호가 활동한 대한 독립 청년 외교단이 대한 애국 부인회와 긴밀한 협조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
  • 질문3 연병호가 시사책진회를 탈퇴한 이유는 무엇일까?

읽기자료 2

연병호는 1925년 3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대통령 이승만의 탄핵안이 가결되고, 박은식이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북경에서 이천민·박숭병과 같이 이의 부당함을 성토하는 교정서를 발표하였다. 1929년 말에는 안창호·이동녕·김구·엄항섭·이시영 등과 함께 중국 국민당과 연계하여 한국 국민당을 발기 조직하였으며, 1934년 2월에는 윤기섭과 함께 재남경 한국 혁명당 대표로서 재만 한국 독립당 대표 홍진·홍면희·김원식 등과 회합하고 양 단체를 통합하여 새로이 신한 독립당을 조직하였다.

1935년 1월 재남경 한국 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대일전선통일동맹의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집행위원이던 연병호는 정무위원회 주임으로 선출되었고, 의열단 등과 통합하여 1935년 7월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발전 조직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은 민족유일당 활동을 목표로 의열단·한국독립당·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대한인독립당이 연합하여 조직하였다. 그러나 조선민족혁명당이 결성된 뒤에도 모체가 되었던 단체들은 표면적으로는 해체성명서를 발표하였으나 실제로 여전히 독자적으로 대외활동을 하였으며, 특히 서로 다른 사상과 혁명노선으로 결성 7개월 만에 조직상의 분열이 발생하였다. 이 분열은 구성원간의 극복하기 어려운 사상적 주장과 독립운동 방략의 차이 및 신당의 양대 세력인 김원봉과 지청천 양파의 대립에서 비롯되었으며, 조선민족혁명당을 의열단 출신의 김원봉 세력이 주도하자 한국독립당과 신한독립당 세력이 1935년 9월을 전후하여 탈당하며 최대의 독립단체로 자처하던 기세는 크게 저하되었다.

연병호는 1934년에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1935년 10월까지 활동하였으며, 이 무렵에 독립공론을 발행하여 민족정신 고취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많은 활동을 하던 중 일제 앞잡이인 상해 거류 조선인 회장 이갑녕을 저격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관련자로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다 1937년 1월 7일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으며, 징역 8년형을 받고 공주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1944년 10월에 출옥하였다.

  • 질문1 연병호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당시에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의 의원은 어떤 방법으로 선출하였을까?
  • 질문2 연병호가 대일전선 통일동맹 활동으로 조직 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조선 민족 혁명당이 결성 7개월 만에 분열된 이유는 무엇인가?
  • 질문3 연병호가 두 번째로 옥고를 치르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읽기자료 3

연병호는 광복이 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준비위원회 영접부장으로 활동하였고,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선거로 제헌의원을 선출하는 총선거가 실시되자 충북 괴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한 국민당 후보로 당선되어 문교분과 위원으로 광복운동사 편찬과 민족진영강화대책위원 등 많은 활동을 하였고, 우리나라 연호를 ‘단기’가 아닌 ‘대한민국’으로 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부결되었다.

연병호는 제헌국회 의원 시절 검은 두루마기에 고무신을 즐겨 신었는데 주변에서 정장을 권유했으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구두 신고 양복을 입으면 나도 입겠다.’라고 하면서 일축했다고 한다. 연병호는 평소 과묵한 성격으로 평생을 처자식 걱정은 하지 않고 오직 나라 걱정만 하면서 살았는데 1963년 1월 26일 눈보라가 치는 날 논두렁길을 급하게 뛰어 집에 당도하니 부인이 병환으로 몹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내가 나라 걱정만 했다’라고 크게 탄식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운명을 했다고 한다. 부인 곽씨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지켜보고 시력을 잃었다고 한다.

연병호의 장례는 1963년 2월 3일 괴산군 사회장으로 치러졌는데 도안초등학교에서 영결식을 갖고 도안면 석곡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1976년 10월 26일 서울 동작구 국립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167호로 이장되었으며,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 질문1 광복이 되자 국내에 있던 연병호는 어떠한 활동을 하였는가?
  • 질문2 1948년 5.10 총선거가 남한만의 단독선거로 실시된 이유는 무엇인가?
  • 질문3 제헌의원 시절 연병호가 검은 두루마기에 고무신을 즐겨 신은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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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은 1963년에 연병호에게 추서된 건국 공로훈장과 건국 공로훈장증이다. 훈장증에 건국 공로훈장 단장을 추서한다고 쓰여 있는데, 1990년 상훈법 개정으로 단장(국민장)이 독립장으로 개칭되었다.

  • 질문1 건국 공로훈장의 수여 대상과 종류를 알아봅시다.
  • 질문2 건국 공로훈장을 수여 받은 사람에게는 어떤 혜택이 주어질까?

시각자료 2

다음은 1948년 5·10 총선거 실시 결과 선출된 제헌의회 국회의원들의 기념사진이다.

  • 질문1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실시될 당시 국회의원 정수와 투표 결과 선출된 국회의원은 몇 명인가?
  • 질문2 연병호가 5·10 총선거에 출마한 지역구와 정당을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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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대한민국의 건국에 뚜렷한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건국 공로훈장이 수여됩니다. 건국 공로훈장의 수여 대상과 종류, 그리고 혜택에 대해 알아보고 독립운동 유공자에 대한 합당한 예우 방안에 대해 토론해 봅시다.

모둠활동 2

철기 이범석 장군이 연병호의 장례식장에서 추도사를 읽었습니다. 철기 이범석 장군과 연병호 선생의 관계를 조사해 보고, 이범석 장군의 입장이 되어 연병호의 추도사를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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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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