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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내 장터 3·1 운동 만세시위지(독립을 향한 아우내의 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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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천 아우내 장터!

아우내 사람들은 해마다 2월 끝날 밤 아우내 장터에서 매봉봉화대까지 횃불 행진을 벌이며 그날 타오르던 봉화불 신호의 비장함을 되새기고 있다. 아우내가 아우내인 것을 자랑삼는 가장 큰 이유는 유관순 열사의 외침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1918년 이화학당 고등과에 들어가 방학 때는 고향에 내려와 농촌 봉사활동에 힘을 쏟던 유관순은 이듬해 3·1 운동이 일어나자 기숙사 뒷마당을 넘어 파고다 공원으로 달려가 만세를 부르다 일본 경찰에게 잡혔으나 곧 석방되었고 고향으로 내려와 항일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마침내 4월 1일, 지령산 매봉에서 봉화를 올리자 진천 옥천 등지의 24개의 봉우리에서 덩달아 봉화불이 올라 거사에 함께 할 것을 약속하였다. 날이 밝자 유관순은 아우내 장터에 모인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비장한 연설을 하였고 수많은 군중이 한목소리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날 오후 1시 3천여 명이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다 일제 헌병의 무자비한 발포로 수십 명이 살상 당했는데 유관순의 부모도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집마저 불태워졌다. 유관순은 천안 헌병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내 동지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자 공주를 거쳐 서울로 옮겨져 최종 판결에서 7년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이감되었다. 그러나 모진 폭행과 고문으로 쇠약해진 유관순은 1920년 10월 12일 18세의 나이로 해방의 감격도 못 본채 순국하였다. 그 뒤 유관순 열사의 시신은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1930년대 일제가 공동묘지를 군용지로 쓰고자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흔적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병천리 291 일대
현재 상태 변형/시장은 도로, 공터, 농경지의 일부가 되어 있다.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탄 당한 뒤 일제는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헌병 경찰을 동원하여 수많은 항일 운동가들을 학살·투옥하고 모든 형태의 반일 활동을 탄압했다. 강력한 무단 통치로 가혹한 탄압을 자행하는 한편, 민족 고유문화의 말살, 철저한 경제적 지배로서 우리의 정당한 민족적 저항의 기반을 없애려고 하였다. 그리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도 누리지 못하게 했으며, 「조선 태형령」을 제정하여 가벼운 죄에도 가혹한 신체적 처벌을 가하여 인권을 유린했다. 또한 토지 조사 사업과 「회사령」 등으로 민족 산업의 발전을 억압하고 경제적 수탈을 자행하였다. 1910년대에 지속적으로 나타난 이러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약탈로 농민을 비롯한 민중의 생활은 크게 악화되었으며,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지가 높아졌다.

이처럼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가 3·1 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게 된 기본 원인이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전후로 한 국제정세의 변화도 3·1 운동이 일어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을 비롯한 동맹국의 패전으로 끝나면서 수많은 국가들이 독립하여 새로 탄생하면서 민족주의가 고조되었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결주의를 주창하여 세계의 식민지 약소민족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족주의자들은 독립에 대한 민족의 열망을 환기시켜 열강의 도움으로 독립을 이루고자 하였다.

민족 자결주의 발표 이후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어가던 때, 당시 68세로 비교적 건강한 편이었던 고종황제가 갑자기 붕어(崩御: 사망)했다는 발표가 있자, 국민들은 의문을 품게 되었고, 이 때 마침 일제가 독살했다는 말이 퍼져 온 국민은 망국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적개심으로 크게 동요하게 되었다. 1910년 국권 상실 이래 기회만을 찾고 있던 일부 민족지도자들은,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원칙 발표, 재일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 고종황제의 붕어 등이 한데 겹쳐 민족적 항일의식이 고조되자, 이때가 우리 민족의 독립을 꾀할 가장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거족적인 3·1 운동을 계획하였다.

거사일은 고종황제의 인산(因山: 태상황과 그의 비, 임금과 그의 비, 황태자 부부, 황태손 부부의 장례)이 3월 3일로 결정되자 많은 지방 사람들이 서울에 모일 것을 예측하여 3월 3일로 내정하였다. 그러나 인산일을 택하는 것은 전 황제에 대한 불경이라는 천도교 측의 의견과 2일은 일요일이므로 안식일이라 피하자는 기독교 측의 의견으로, 결국 3월 1일로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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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유관순 열사는 1918년 미국인 여자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하고,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 학교 고등과 1년생으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그 뒤 일제가 이화학당을 비롯하여 서울의 학교들을 휴교시키자 고향으로 돌아와 교회와 학교를 찾아다니며 서울에서의 만세시위운동 상황을 설명하고, 이곳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다. 조인원·김구응 등의 마을 지도자를 규합한 뒤 연기·청주·진천 등지의 교회와 유림계의 뜻을 합쳐, 이 해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에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계획하였다.

이 날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이자 유관순 열사는 맨 앞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격렬하게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 도중에 일본 헌병의 총칼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당하고, 그녀는 만세시위 주동자로 잡혀 일제의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하지 않았다.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으나 이에 불복,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일제의 한국 침략을 규탄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법률에 의해 일제 법관에게 재판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다 법정모욕죄까지 가산되어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에도 틈만 있으면 큰소리로 독립만세를 불렀고, 그때마다 형무관에게 끌려가 모진 악형을 받았다. 그렇듯 불굴의 투혼으로 옥중 항쟁을 계속하다 1920년 19세의 나이로 끝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유관순 열사가 참살된 지 이틀 뒤에 이 소식을 들은 이화학당 교장 푸라이와 월터 선생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의 시체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거부하였다. 유관순의 학살을 국제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위협하고 강력하게 항의하자 석유상자 속에 든 시체를 내주었는데, 열어 보니 토막으로 참살된 비참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유관순 열사의 시신은 이화학당에 인도되어 오빠 유우석을 비롯해 스승과 동문들에 의해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이후 이태원 공동묘지가 일제의 군용기지로 쓰이게 됨에 따라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하는 가운데 열사의 주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 질문1 이화학당에 다니던 유관순 열사가 왜 고향으로 돌아와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을까?
  • 질문2 유관순 열사가 공주 지방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불복하여 항소하였는데 경성복심법원에서 오히려 7년형으로 늘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 질문3 유관순 열사가 순국하자 이화학당 측에서 시신의 인도를 요구하였을 때 왜 일제는 시신 인도를 거부하였을까?

읽기자료 2

3월 1일에 독립만세운동을 벌인 곳은 비단 서울뿐만 아니라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 이북지방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들 도시가 서울과 같은 날에 만세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은 경의선과 경원선의 철도 연변에 위치하고 있어서 연락이 쉬웠기 때문이다. 또 3·1 운동을 추진했던 민족대표 중 기독교 측 대표들이 대부분 이 지방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3월 1일에 점화된 독립만세운동의 불길은 날이 갈수록 전국 각지로 번져갔다. 서울·평안남도·평안북도·함경남도의 시위에 이어 2일에 경기도의 개성, 3일에 충청남도의 예산 등에서 치열하게 일어났다.

그 밖에 전라북도는 4일 옥구 시위로, 경상북도는 8일 대구 시위로, 전라남도는 10일 광주 시위로, 강원도는 10일 철원 시위로, 함경북도는 10일 성진 및 임명 시위로, 경상남도는 11일 부산진 시위로 각각 도내 각지로 번져갔다. 3월 19일 괴산 시위로 충청북도에 점화됨으로써 전국 13도가 골고루 3·1 운동의 대열에 나서게 되었다. 3월 21일에는 제주 조천리 시위로 바다 건너 제주도까지 번져,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와 같은 전국적인 파급은 천도교나 기독교의 조직을 통한 경우, 또 고종의 인산 행사를 보고자 상경했던 지방인이나 학생이 귀향하여 계획한 경우, 인근 지역의 운동에서 영향을 받아 계획한 경우 등 여러 가지 경로에 의한 것이었다. 지방운동으로 규모가 컸던 만세 시위는 거사계획의 누설 방지와 인원 동원이 쉬운 장날과 거의 일치하였다.

각 지역별 만세운동의 주체는 각계각층을 망라하였다. 천도교 측의 주동지역은 주로 북부의 여섯 도였으며 남부 지방에서는 거의 없었다. 이는 삼남 지방에서 동학 농민 운동 이후 계속되는 탄압으로 말미암아 교세가 궤멸 또는 북상하였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 측의 주동 지역도 주로 북부 지방으로 치우치는 편이었고, 충청도 지역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각급 학교 학생이 단독으로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고, 또 서당 생도가 주동한 곳도 10여 개소나 된다. 각 지방의 만세 운동에는 농민이 가담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도시에서는 상인들이 연합하여 철시를 단행하였다. 노동자·승려·관리는 물론, 어린이·거지·기생이 주동한 곳도 있었다. 이와 같이 전개된 민족적 궐기의 규모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만세 시위가 2,000회 이상, 참가 인원은 20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 질문1 1919년 3월 1일 대규모 만세시위가 서울뿐만 아니라 평양, 원산, 의주 등 북부 지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 질문2 3·1 운동 당시 각 지방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한 사람들은 주로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읽기자료 3

일제강점기 여성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한 황신덕은 “3·1 운동은 조선 여자로 하여금 사회의 일원으로서 남자와 협력하여 활약하기를 개시한 첫 막이었으니, 이 첫 번 시험에서 여자는 병신도 아니었고 천치도 아니었고 남자와 다름없는 사람이었던 것을 자타가 인정하게 되었다.”고 회상하였다. 이처럼 3·1 운동은 조선 사회에서 천치로 취급받아오면서 자신의 가치를 의심해야 했던 여성들이 남성과 더불어 거리를 활보하며 목 놓아 만세를 외치며 해방감을 느낄 수 있게 하였다.

3·1 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여성들은 어느 정도 사회활동이 가능했던 여학생, 기생, 기독교인 등이었다. 기숙사에서, 교실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던 여학생들은 빠르게 정보를 공유하며 일본인 교사들의 감시를 넘어 대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서울 시내 각급 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 참여가 날로 늘어나자 일제는 3월 10일 서울 지역의 학교에 대해 임시휴교령을 내려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그러자 학생들은 자신들의 연고지로 돌아가 대중을 모으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눠주며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시위를 주도한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도 그러한 이들 중의 한 명이었다. 많은 지식인, 청년, 학생들이 3·1 운동의 주모자로 검거되어 고문에 시달려야 했는데, 여성들은 여기에 성적인 괴롭힘도 더해졌다. 정조를 강요하는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게 경찰의 성적 고문은 몹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 질문1 3·1 운동 당시 여성들이 만세 시위에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참여한 이유는 무엇일까?
  • 질문2 3·1 운동 당시 만세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여성들은 주로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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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유관순 열사가 1919년 음력 2월 그믐날 밤(양력 3월 31일) 매봉산 정상에 올라 봉화를 높이 들었던 곳이다. 이를 기념하여 1977년 10월 12일 화강석으로 만든 사각형 기단 위에 봉화탑과 봉화대를 건립하였다.

  • 질문1 봉화대의 용도는 원래 무엇이었을까?
  • 질문2 유관순 열사는 왜 매봉산 정상에서 봉화불을 높이 들었을까?

시각자료 2

다음은 아우내독립만세운동기념공원에 있는 동상으로 만세 시위에 참여한 아들이 총에 맞아 죽자 어머니가 아들의 시신을 안고 통곡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일본 경찰은 어머니마저 총칼로 찔러 살해하였다.

  • 질문1 숨진 채 어머니의 품에 안겨있는 사람은 실존 인물을 표현한 것이다. 이 인물의 성명과 주요 활동을 조사해 봅시다.

시각자료 3

다음은 유관순 열사에 대한 경성 복심법원의 판결문이다. 유관순 열사는 공주지방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자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경성복심법원에 다시 재판을 받았다.

  • 질문1 경성복심법원에서 유관순 열사는 어떤 판결을 받았을까?
  • 질문2 위 판결문에서는 유관순 열사에게 어떤 이유로 유죄 판결을 하였을지 추론하여 적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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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유관순 열사가 고향으로 돌아와 교회와 학교를 찾아다니며 서울에서의 만세시위 상황을 전하고 대규모 만세시위를 준비하는 과정을 소재로 단막극을 만들어 봅시다.

모둠활동 2

경성복심법원에서 유관순 열사에게 유죄를 판결한 내용을 바탕으로 역할을 나누어 유관순 열사에 대한 모의재판을 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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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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