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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3월 17일 아침 8시경 15명으로 구성된 일본경찰 추격대가 충남 당진군 석문면 소난지도에 상륙을 시도하였으나 선착장에서 의병부대로부터 반격을 받자 우회하여 마을 뒤쪽으로 상륙하였다. 의병은 지형을 이용하여 일본경찰대에 항전하였으나 탄약이 떨어지자 일본 경찰대에게 쫒기게 되었다. 의병대는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 동굴 속에 몸을 숨기려고 하였으나 발각되어 5명이 희생되었다. 이어 의병대는 섬의 동남쪽에 있는 돌각지점에서 경찰대의 집중 총격을 받아 36명이 살해되었다. 나머지 의병들은 바닷물에 뛰어 들어 목숨을 부지하려 하였으나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이 소난지도 전투에서 의병은 100여 명이 전사 또는 행방불명된 것으로 확인된다. 9명이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혔으나 이들 역시 현장에서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소난지도 의병총은 해방 후에 의병의 흩어져 있던 유해를 주민들이 수습하여 조성한 것이다.
역사적 배경
| 현재 주소 | 충청남도 당진군 석문면 난지도리 373-2 |
|---|---|
| 현재 상태 | 원형보존 / 1977년 소난지도 의병의 유골을 수습하여 조성한 봉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
1905년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과 강압적인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강탈하자 하고 전국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경찰에 맞서 치열한 항전을 전개했다. 이 때 충남 당진에서는 최구현 의병장, 홍성에서는 민종식 의병장 등이 창의했다. 또 경기도 화성에서는 홍일초 의병장, 수원에서는 홍원식 의병장, 용인에서는 당진 출신의 정주원 의병장 등이 창의했다. 나라를 되찾으려는 우국충정만으로 창의했기에 의병들의 무기와 장비는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이들 의병장들이 이끄는 의병군은 일본군의 초토화 작전에 밀려 그 일부가 소난지도로 이동했다. 섬 일대에서 활동하던 수적들도 의병군에 가담했다. 의병군은 소난지도에 보급로를 확보하고 대일항전의 근거지로 삼았다. 소난지도 의병군은 당진, 서산, 태안 등 충남 서북부는 물론 화성, 수원 등 경기도 남부 일대까지 진출해서 대일항전을 벌였다.
그러나 이 섬은 의병군이 활동하기에는 작은데다가 뭍에서도 너무 가까웠다. 일본군과 경찰은 이 섬이 의병군의 근거지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일본이 의병군을 토벌하기 위해 경찰대를 파견하면서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1906년과 1908년은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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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동학농민운동 후에 남아 있던 농민군은 1896년 의병운동에 가담한 후, 흩어져 화적(火賊)으로 지내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사정이 나아지지 않자 1899년부터는 여러 가지 이름의 집단을 만들어 저항 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들 중에 홍길동전을 사상적 배경으로 삼고, 각지에 출몰하여 부호의 재물을 빼앗아 빈민에게 나누어주는 활빈당이 등장 하였다. 1900년경 충청도 서해안 내포지역에서 활빈당이 처음 등장하여 점차 남한 각 지역으로 그 세력이 확장되어 1904년까지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소난지도의 포구는 천연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 전라도의 세곡을 서울 경창으로 실어 나르던 조운선이 태풍을 피해서 기항하던 곳이기도 하였다. 소난지도는 이와 같은 지형적인 조건으로 인해 수적들이 활동하기에 유리하여 수적들이 자주 나타났다. 1901년 5월 수적 수십 명이 정박하여 총을 쏘며 재물을 빼앗아 갔는데 이들은 스스로를 ‘활빈당’이라 하고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로 인해 국권이 박탈당하자 의병이 전국적으로 크게 일어났다. 이때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던 활빈당들이 의병에 합류하였는데, 소난지도에서 활동하던 활빈당들도 점차 의병화하면서 소난지도는 의병의 근거지로 탈바꿈하였다.
- 질문1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활빈당’이 다른 ‘화적’들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 질문2 활빈당들이 의병 활동에 적극 참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읽기자료 2
최구현은 당진 면천 출신으로 22살이던 1887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다음 해 훈련원 봉사를 시작으로 1904년 군부 참서관에 올랐던 사람이다. 1904년 일제가 한일의정서를 강요하고 이를 핑계 삼아 국정을 압박하자 이를 탄식하며 군부 참서관 직을 사임하였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어 이듬해인 1906년 4월 면천, 당진, 고덕, 천의, 여미 등지에 격문을 발표하고 37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 때 최구현은 창의영도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을 통솔하고 연달아 15일 동안 의병이 나온 고을들을 행군하며 위세를 드높였다. 이렇게 백성들로 하여금 왜적을 쳐부숴야한다는 의분을 불러일으키고, 4월 17일 초저녁 면천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 수비대가 맹렬히 쏘아대는 신식총포의 위력이 더없이 강해서 의병들의 창과 칼, 화승총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동이 트는 새벽녘, 총탄이 비 오듯 하는 속에서 죽고 다친 의병들을 들것에 부축하고 눈물을 삼키며 의병들이 해산하였다. 이 때 최구현은 죽기를 각오하고 왜놈과 싸울 것을 맹세한 의병 36명을 거느리고 밤에만 행군하여 소난지도에 도착하였다. 당시 소난지도에는 당진 의병과 화성창의장 홍일초 부대 40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서산 의병 김택순 등 28명과 홍주 의병 차상길 등 15명이 합세하니 의병이 모두 120여 명이 되었다. 이들은 국내에서는 항일 투쟁을 계속하기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바다 건너 간도로 가서 왜를 멸망시킬 싸움을 계속하기 위해 배를 타고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8월 24일 새벽 관군과 일본군 수비대 이삼백 명이 세 척의 배를 나무를 실은 배로 위장한고 섬을 기습 공격하였고 최구현은 붙잡혀서 면천감옥에 갇혔다. 이 때 최구현은 일본 수비대의 지독한 고문을 받고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며 토지 30결을 빼앗기고 수레에 실려 풀려났으나 회생하지 못하고 그해 12월에 사망하고 말았다.
- 질문1 최구현이 1906년 의병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일까?
- 질문2 당진, 화성, 서산, 홍성 등지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이 왜 소난지도로 모여들었을까?
- 질문3 소난지도에 모인 의병들이 간도로 향할 준비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읽기자료 3
1908년 들어서 당진 일대에서의 의병 활동이 활발했다. 3월 9일에는 의병 60~70여 명이 각기 총검을 휴대하고 당진읍내로 들어와 박사원이라는 자를 붙잡아 포박하여 당진군 군내면 북창리로 연행하여 주민들 앞에서 일본군의 밀정으로 우리의 행동을 방해하기 때문에 부득이 처벌할 수밖에 없다며 총살시킨 일까지 있었다. 홍성경찰분서에서는 이 보고를 받고 3월 13일 일본인 순사 7명과 한인 순사 8명 등 15명으로 구성된 경찰대를 편성하여 당진지역으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결국 소난지도가 의병의 근거지임을 알고 3월 15일 아침 6시부터 배를 타고 소난지도로 들어가 의병들을 공격하였다.
이들 경찰대는 소난지도에 도착하여 의병 측의 배 2척을 확인하고 사복을 입은 순사로 하여금 정찰을 시켰다. 의병 측에서 이를 미리 탐지하고 섬의 민가에 숨어서 배를 향해 발포하여 한인 순사 한명의 이마에 총상을 입혔다. 경찰대는 7시경에 상륙을 감행하여 마을 뒤쪽의 고지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오히려 민가를 향해 총격을 가하자 의병은 서쪽의 고지로 옮겨 항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의병들은 점차 탄환이 부족해지며 경찰대에게 밀리게 되었다. 의병들은 고지 뒤쪽의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 섬의 동남쪽으로 피하면서 경찰대와 수십 차례 접전하였으나 화력에 밀리면서 동남쪽의 돌각지점에서 22명이 전사하고 말았다.
오후 1시부터 경찰대가 섬 전체를 다시 수색하자 의병들은 북쪽의 동굴 속에서 맹렬히 사격을 하며 저항하였으나 의병 5명이 전사하였다. 의병은 계속 추격을 당하여 오전에 크게 피해를 입은 돌각지점에서 14명이 또 전사하였다. 오후 3시경 전투는 끝났고 대장 홍원식과 선봉장 박원석을 비롯한 41명이 전사하고 9명이 부상을 입고 체포되면서 의병은 궤멸하고 말았다. 일본군과 경찰대는 의병들이 타던 배의 선원들을 당진포의 해창 앞까지 끌고 와서 총살시켰다. 이로 보아 부상을 당해 포로가 된 의병들도 총살당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의병 50명 정도가 바다에 투신하여 행방불명되었다고 보고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죽음을 면할 수 없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위의 기록들을 통해 당시 소난지도에는 약 100명에 달하는 의병이 주둔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군의 보고서에는 41명이 전사된 것으로 보고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100여 명에 달하는 의병이 대부분 전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이 노획한 무기를 보면 화승총을 포함하여 총이 16정 밖에 없었으며 실탄이 전혀 없었다. 이로 보아 의병들의 무기가 매우 열악했으며 실탄이 떨어질 때까지 끈질기게 저항하다 전멸한 것으로 추정된다.
- 질문1 100여 명의 의병들이 15명의 경찰대에게 패하여 전멸한 이유는 무엇일까?
- 질문2 의병 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제가 의병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였음을 증명하는 사례를 소난지도 의병 전투에서 찾아봅시다.
읽기자료 4
소난지도 의병에 대한 일본 경찰의 보고서에 의하면 의병 대장은 50세 정도의 홍원식으로 경기도 안성 사람이며, 선봉장은 30세 정도의 박원석이라고 분명히 적고 있다. 하지만 다른 증언에 의하면 의병대장은 홍일초라고도 전해지는데 홍원식과 홍일초는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홍원식에 대하여는 경기도 수원의 양반 출신으로 관직 경력이 없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런데 안성사람으로 당진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장 홍원식은 1919년 제암리 교회에서 순국한 홍원식과 동일 인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홍원식은 전투 중에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렸으나 소나무에 걸려 요행히 살아났으며, 소난지도에서 초상이 나자 상복으로 갈아입고 탈출하여 당진으로 나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소난지도에서 탈출한 홍원식은 고향으로 돌아가 요양을 한 후 1910년대 기독교 권사가 되어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 활동을 하면서 제암리 교회의 책임자 안종, 고주리 천도교 책임자 김성열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구국동지회를 조직하여 항일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기미를 눈치 챈 일본 헌병 2명이 홍원식을 체포하려 하자 동지들과 함께 그들을 타살하고 오랫동안 서울로 피신하였다.
1919년 거국적인 3·1운동이 일어나자 홍원식은 서울에서 독립 선언문을 가지고 제암리로 다시 돌아와 천도교, 기독교인들과 청년들에게 배포하고 3월 25일에서 27일 까지 계속 산위에 올라가 횃불을 올리고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그 뒤 4월 15일 일본 헌병과 경찰이 제암리에 도착하여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을 비롯한 마을 주민들을 교회당에 집합시키고 방화와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살상한 제암리 학살 사건을 일으켰다. 이 때 홍원식을 비롯한 김정헌, 안경준 등 애국지사와 주민들이 학살당했고, 급보를 듣고 달려온 홍원석의 처 김씨 부인도 일본 헌병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 질문1 1908년 활동한 소난지도 의병의 대장 홍원식에 대한 기록이 불확실한 이유는 무엇일까?
- 질문2 왜 일본 헌병과 경찰들은 제암리 교회에서 양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였을까?
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은 소난지도 의병총으로 1908년 소난지도에서 일본 경찰대와 항쟁하다 순국하신 의병 100여 명의 유골들을 모아 합장한 무덤이다.
- 질문1 우리나라에는 여러 명의 유골들을 한데 모아 합장한 무덤들이 많이 있다. 소난지도에서 순국한 의병 100여 명의 유골들을 한데 모아 합장한 이유를 알아봅시다.
- 질문2 소난지도 의병총과 같이 여러 사람의 유골을 한데 모아 합장한 사례를 찾아봅시다.
시각자료 2
다음은 일제가 편찬한 『폭도에 관한 편책』 중 1908년 소난지도 선착장 전투기록으로 홍성경찰분서장 경부 이와사키 요시키[岩崎良材]가 경무국장 마츠이 시게루[松正茂]에게 보낸 보고서이다.
- 질문1 문서를 보면 1908년에 홍성경찰분서장과 내부의 경무국장이 일본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국권 피탈 이전인 1908년에 일본사람이 경찰분서장과 경무국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 질문2 이 보고서에서 의병들을 폭도라고 쓰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각자료 3
다음은 1908년 3월 15일 소난지도 의병이 일제 경찰과 전투를 벌이던 중 은신하고 있던 의병 5명이 희생된 동굴이다. 지금은 태풍으로 동굴 입구가 붕괴되었다.
- 질문1 소난지도에서 의병들이 일본 경찰대에 맞서 싸우다 순국한 동굴을 찾아 당시의 전투 흔적을 찾아봅시다.
모둠활동
소난지도 의병 항쟁 사적지를 찾아 당시 의병들이 일본 경찰대에 맞서 싸웠던 지역을 직접 확인해 봅시다.
소난지도 의병추모탑을 찾아가 추모탑이 만들어진 경위를 살펴보고 학생의 신분으로 나라를 위해 싸우다 헌신하신 분들을 기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구체적으로 찾아 정리해 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