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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녕 생가(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터줏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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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여!
우리나라가 온전한 자유를 누리며
굳건한 독립을 되찾는 데는
하나는 내 동지들의 단결이요
둘은 우리 동포들의 단결이며
셋은 모든 대한 민족이 대동단결함에 있으니
오로지 뭉치면 살고 길이 열릴 것이요
흩어지면 멸망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70평생을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해 온 석오 이동녕의 어록비 내용이다. 이동녕은 한말 자주적 독립운동단체인 독립협회 활동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한 이래 북간도에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신민회 활동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신흥학교 설립, 대한광복군정부 수립 등 평생 쉬지 않고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내무총장과 국무총리, 국무령, 대통령 대리, 4차례의 주석 역임 등 임시정부의 요직을 두루 수행하며 우리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회복하고자 자신을 바쳤던 지도자였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동리 79-2
현재 상태 변형 / 이동녕이 태어난 곳으로‘ㄱ’자형 안채와 사랑채가 있었으나 1939년 개축했으며 현재는 새롭게 복원되어 있다.

개항 이후 열강의 침략에 맞서 독립협회가 조직되어 자주 국권과 자강 개혁, 그리고 자유 민권 운동을 전개하며 근대적 민족 국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일제의 국권 피탈이 본격화되자 실력 양성을 통한 국권 회복을 목표로 애국계몽운동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신민회를 중심으로 만주 지역에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새로운 근대 국가 설립을 위한 노력이 구체화 되었다. 3·1운동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 통치에 맞선 우리 민족의 가열찬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널리 알렸고, 그 결실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독립 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동녕(李東寧, 1869~1940)은 1896년 독립협회에 참여했으며, 1904년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자 서울 상동교회에서 청년회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고,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 파기를 위해 결사대를 조직하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체포되어 2개월 간 수감생활을 하였다.

1907년 안창호·양기탁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으며,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서간도 삼원보에서 이회영·이상룡 등과 경학사를 만들었고, 신흥강습소의 초대 교장이 되어 독립군 지도자를 양성하여 신흥무관학교로 확대·발전시켰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가 한국군관학교 설립을 추진하다가 발각되어 3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그 후 이상설·이동휘 등과 권업회를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1914년에는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는 동시에 『대동신문』·『해조신문』을 발행하였다. 1919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임시의정원 의장과 함께 국무총리로 취임하여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1924년 다시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겸 군무총장으로 취임하고, 이후 국무령·법무총장을 역임하다가 1927년 주석이 되었다. 1930년 김구 등과 함께 한국 독립당을 조직했고, 1930년과 1935년 임시정부 주석이 되어 1940년 사망 전까지 임시정부와 함께 하였다. 1940년 3월 중국 사천성에서 지병인 천식이 악화되어 급성폐렴으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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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이동녕은 서양 열강과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 되는 시기인 1869년 충남 천원군 목천면 목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며 학문과 인품을 연마하던 중 우리나라가 일제의 강요에 의한 불평등 조약으로 개항을 하게 되고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으며 개화와 척사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싸이자 그는 줄곧 “아는 것이 힘”이라는 구호아래 중국 고전을 읽고 조선의 현실에 적용하기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비록 부친이 관리로 출세하고 있었지만 그는 양반이라는 신분적 특권의식을 버리고 새로운 가치관을 모색, 형성하고 의식구조를 개편하며 사회 제도의 혁신과 민중이익의 옹호하는 개화의식을 기르며 성장하였다.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 침탈이 본격화되자 독립협회가 조직되어 정부를 비판하고 여론을 형성하며 자주독립의 의욕을 강력히 시사하며 의회적 기능을 하고자 하였다. 이동녕 선생은 독립협회의 설립과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특히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어 의회적 기능을 발휘할 때 이동녕은 운영위원으로 민권 운동에 앞장섰다. 그리고 정부가 독립협회 활동을 탄압할 때 이동녕은 동지들과 함께 독립협회를 사수하면서 민권운동과 개화운동을 함께 추진하다가 이준 등과 같이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어 7개월 만에 풀려났다.

당시 이동녕은 제국신문을 창간하고 운영하고 있던 이종일과 가깝게 알고 지내게 되었고, 제국신문의 논설위원이 되어 시국에 관한 글을 발표하였다. 특히 1898년 10월 28일자 논설인 ‘위국의 방도’에서 국민 참정권을 극력 주장하였는데 이는 뒷날 민주 공화정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구체화되었다. 이처럼 이동녕이 전형적인 선비 집에서 태어나 자랐으면서도 세계의 정세변화와 국민 참정권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은, 세계는 변해 가는데 옛 전통질서나 체제에 안주하는 것은 국가의 발전을 막고 낙후되는 일임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 질문1 이동녕이 독립협회의 조직과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 함께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을 교과서에서 찾아 정리해 봅시다.
  • 질문2 이동녕 선생이 논설위원으로 활동한 제국신문이 당시 다른 신문과 비교되는 뚜렷한 특징은 무엇이었을까 정리해 봅시다.
  • 질문3 이동녕이 ‘위국의 방도’라는 제국신문 논설에서 국민 참정권을 극력 주장한 것이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어떻게 구체화 되었을까 정리해 봅시다.

읽기자료 2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실력 양성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하는 애국 계몽 운동이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이동녕은 국내외 상황이 국권을 상실할 상황으로 치달아 가자 1904년 상동교회에서 양기탁, 신채호, 김구 등과 같이 독립운동과 계몽단체로서 상동청년회를 조직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청년회는 신민회 산하 청년교육기관이 되어 청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1914년 해산될 때까지 민족주의 자립의식을 북돋우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상동청년회를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이동녕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동지들과 함께 덕수궁의 대한문 앞으로 달려가 혈서로 ‘사수독립’이라는 글자를 써가지고 대궐문 앞에서 복합 상소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과 충돌하게 되었고 이동녕은 체포되어 두 번째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2개월 뒤 풀려났으나 일제에 의한 요시찰 인물이 되어 국내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기가 어려워졌다. 이에 이동녕은 국외로 나가 치밀한 계획 하에 나라를 구하기 위한 민족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북간도의 용정에서 이상설 등과 함께 서전서숙이라는 민족 학교를 세우는데 참여하고 교사로 활동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자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러나 일제 통감부의 간도출장소가 설치되어 일제 경찰과 친일 집단들의 탄압을 받게 되자 서전서숙은 1년 만에 문을 닫게 되었고, 이동녕은 변장을 하고 국내로 돌아와 더 큰일을 계획하기 위해서 안창호, 양기탁, 이동휘, 김구, 등과 함께 신민회라는 비밀결사 항일투쟁단체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신민회의 공식 대표는 양기탁이었고, 이동녕은 총무를 맡아 활동하였는데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인재육성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애국사업이라 판단하고 오산학교를 비롯하여 신민회가 설립한 학교와 학회를 후원하면서 청년 육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 질문1 이동녕이 국내를 떠나 간도로 가서 서전서숙을 세우는데 참여한 이유는 무엇일까?
  • 질문2 이동녕이 상동청년회를 조직하고 서전서숙 설립, 오산학교 지원 등을 통해 젊은 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인 이유는 무엇일까?

읽기자료 3

이동녕은 신명을 바쳐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빼앗기자 너무 분하여 통곡으로 날을 세웠다. 그는 국내에서의 국권회복운동이 일제의 무력적 위협으로 한계점에 달했음을 인식하고 동지들과 함께 그 돌파구로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결심하였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이동녕은 이석영, 이시영, 김동삼 등과 함께 서간도의 삼원보라는 낯설고 추운 산간벽지로 이주하여 온갖 시련을 겪으며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였다. 이동녕은 젊은 역군을 양성하는 것이 곧 민족의 독립을 앞당기는 일이라 굳게 믿고 서전서숙 설립의 경험을 살려 교육기관의 설립을 구상하였다. 마침내 빈 창고를 빌려 신흥강습소를 열게 되었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신흥무관학교가 되었다. 신흥 무관 학교는 9년간 운영되었는데 모두 3,500여명의 독립 역군을 길러 독립전쟁을 주도적으로 담당할 인재 양성의 요람이 되었다.

간도에서 활동하는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일제의 탄압과 감시가 심해지자 이동녕은 이상설 등이 활동하고 있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이곳에서 이상설, 이동휘 등과 같이 1914년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고 사관학교 설립을 계획하였으나 이것이 문제가 되어 러시아 경찰에 체포되어 3개월간 옥고를 겪기도 하였다.

  • 질문1 이동녕이 서간도 삼원보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한 이유는 무엇일까?
  • 질문2 독립 운동가들이 낯설고 추운 서간도의 산간벽지에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며 겪은 어려움 중에 가장 힘들었을 것이라 생각되는 것을 세 가지만 추정한다면 무엇일까?
  • 질문3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일제에 맞서 독립 전쟁을 전개하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들을 찾아봅시다.

읽기자료 4

국내외에서 독립투쟁을 전개하던 이동녕은 3·1운동이 일어난 뒤 중국 상해로 가서 대한 광복군 정부를 수립하였던 경험을 토대로 임시정부 수립에 적극 참여하였다. 정부 수립을 위해 임시의정원을 설립하고 임시헌장을 제정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선포하였는데 이동녕은 초대 임시의정원의 의장으로 추대되어 임시정부의 수립을 주도하였다. 이후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체제의 정부로 독립 운동의 구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동녕은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탄핵 당한 뒤 대통령의 직무를 대행하였으며, 국무령 국무위원회의 주석 등 임시정부의 지도자로서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하였고, 내정교통과 외교군사, 문화교육, 재정사법 업무를 주도적으로 집행해 나갔다. 그는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 등 두 차례 입법부 수반을 역임하였고, 각부 총장(장관), 국무총리, 국무령, 대통령 대리, 4차례의 주석 역임 등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임시정부의 중점 업무를 두루 수행하였다. 비록 그 자신은 꿈꾸었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였으나 그의 삶과 애국정신은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달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회복하고자 일생을 바친 진정한 지도자였다.

  • 질문1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의정원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 질문2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제정한 임시헌장에서 민주공화제를 채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 질문3 이동녕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터줏대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동녕을 임시정부의 터줏대감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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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 축하회 사진으로 두 번째 줄 왼쪽에서 아홉 번째가 이동녕이다.

  • 질문1 이동녕은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부터 1940년 서거하실 때까지 임시정부의 주요 직책을 두루 역임하셨다. 이동녕이 역임한 임시정부에서의 주요 직책을 조사하여 정리해 봅시다.

시각자료 2

다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인 이동녕이 독립 자금을 낸 사람들에게 보낸 자금 모집 감사장이다. 당시 임시정부에서는 독립 운동 자금을 낸 사람들에게 조국을 위하는 충성과 동족을 사랑하는 의기를 기리는 감사장을 발송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질문1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어떠한 방법으로 독립 자금을 모으고, 모금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감사장을 보냈을까?

시각자료 3

이동녕은 1940년 72세를 일기로 급성폐렴으로 중국 기강에서 서거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고, 광복 후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를 봉환하여 사회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하였다.

  • 질문1 임시정부가 이동녕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렀으나 광복 후 유해를 봉환하였을 때는 사회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시각자료 4

다음 이동녕의 초상화는 1930년대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공원 의거 2일전인 1932년 4월 27일에 쓴 자필 이력서에 첨부되어 있었다. 윤봉길 의사가 평소 존경하던 이동녕의 초상화를 소지하고 있다가 이력서를 쓰면서 말미에 첨부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질문1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일으킬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이동녕이 맡은 직책은 무엇이었을까?
  • 질문2 윤봉길 의사가 평소에 이동녕의 초상화를 소지하고 있다가 거사 이틀 전 이력서를 쓸 때 함께 첨부한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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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본인이 1919년에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원이라고 가정하고, 임시정부의 활동 방향을 제시해 보자.

모둠활동 2

자신이 몸담고 있는 가정이나 학급과 같은 공동체의 민주적인 운영 규칙을 제정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자신이 광복 직후 귀국을 한 독립운동가 중 한사람이라고 가정하고, 앞으로 만들고 싶은 독립 국가의 모습을 모둠별로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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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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