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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9월 18일 진잠 현감을 지낸 문석봉(文錫鳳)이 국모의 원수를 갚자는 국수보복론(國讐報復論)과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음으로써 보답한다는 주욕신사(主辱臣死)의 정신에 입각하여 민영환과 손근수, 신응조 등 중신들의 찬동을 얻어 옥천의 오형덕, 공주의 김문주, 회덕의 송도순 등 지방 사족들과 함께 유성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유성장터에서 수백 명의 의병을 모아 회덕현 무기고를 급습하여 무장하고 진잠과 공암을 거쳐 공주의 와야동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였다. 관군들의 매복 공격에 패배한 의병들은 왕촌 일대로 피신하였다가 재기를 도모하였으나 의병장 문석봉이 옥고의 후유증으로 순국함으로써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유성의병은 을미의병의 효시로서 단발령 공포 후 전국적으로 의병봉기를 촉발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글은 유성 장터공원에 세워져 있는 유성의병 사적비의 일부이다. 명성 황후 시해 사건 이후 국모의 원수를 갚고 임금이 욕을 당한 것에 죽음으로 보답한다는 정신으로 봉기한 유성의병은 전국적으로 전개되 의병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역사적 배경
| 현재 주소 | 대전광역시 유성구 장대동 282-15 일대 |
|---|---|
| 현재 상태 | 변형 / 아직도 4, 9일장이 서고 있지만 당시 모습과는 많이 변한 상태이다. 현재 놀이터와 마을회관이 자리 잡은 곳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
대전시 유성구 장대동 일원 부지에 자리한 유성재래시장은 1910년대부터 내려오는 5일장으로 해방이후 1970년대 초까지 포목·청과·기물·잡화 등이 복합된 인근 최대의 종합 정기시장으로서 유성의 경제적 부(富)를 대표해 왔다. 유성장날은 현재 4일, 9일이지만 장이 처음 열리던 시기에는 5일과 10일에 장이 열렸다. 그러다가 인근의 정기시장과의 관계 등으로 상인들의 불편함을 덜기위해 4일, 9일로 바뀌었다고 한다. 2일이 금산장, 3일이 신탄진장, 4일이 유성장이고 5일이 옥천장, 그리고 1일이 공주장이었다.
1895년 8월 명성황후 시해소식을 들은 문석봉은 국모의 복수를 위하여 유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국모를 시해한 흉적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조정의 대신을 역임했던 회덕의 송근수와 진잠의 신응조 등이 문석봉의 의병 봉기를 후원하였다. 문석봉은 지휘부를 조직한 후에 각지에 통문을 발송하여 을미사변을 천고에 없는 대변으로 규정하고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여 사직을 건져야 할 것을 호소하였다. 유성 장터에서 부대를 편성한 후 회덕현을 급습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300여 명의 의병을 무장하여 10월 28일, 공암을 거쳐 공주를 향해 진격하였으나 공주 와야동에서 관군에게 패하여 흩어졌다.
문석봉은 중군 오형덕 등과 함께 경상도 고령 초계 등지에서 재봉기를 준비하였으나 고령 현감의 고변으로 체포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문석봉은 이듬해 봄 영장 최은동 등과 함께 탈출하였으나 이미 문석봉의 집은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져 있었다.
문석봉은 옥고를 치르면서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1896년 4월 서울에 들어와 정계의 요로들과 접촉을 시도하고, 이어 원주로 내려가 ‘도지휘’가 되어 각도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돌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문석봉은 병에 걸려 결국 큰 뜻을 이루지 목하고 11월 19일 밤 46세의 나이에 병사하였다.
읽기
읽기자료 1
문석봉은 1851년 경북 현풍군(현 경북 달성군 현풍면)의 한미한 선비가문에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그의 신분은 거의 평민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상들의 관계 진출은 미미하였는데 다만 문석봉의 9대조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친 공으로 선략장군훈련봉사의 직을 받았고, 6대조가 대구감영에서 성 쌓는 일로 공을 세워 성축감이 되었을 뿐이다.
문석봉은 어려서부터 무인으로서의 자질을 보여 주었다. 12세 때인 1861년 죽궁을 쏘아 소뿔을 맞히기로 했는데 백발백중이었다고 한다. 이 소문을 들은 어사 김화영이 술사 이성구를 통해 『육도삼략』을 비롯한 병서를 보내 주어 공부하였다. 1870년에는 이성구와 함께 ‘고견암’이라는 암자에 기거하면서 3년간 무술을 익히고 『주역』을 탐독하였으며, 25세 때인 1875년에는 중국의 금릉으로 건너가 침술을 비롯한 한의학을 3년간 수학하였다.
- 질문1 문석봉이 의병을 일으키게 된 배경을 그의 가문의 내력과 관련지어 적어 봅시다.
- 질문2 문석봉이 어려서부터 무술을 익히고 중국에 건너가 한의학을 공부한 이유를 조선 시대의 사회 구조와 관련지어 추론하여 적어 봅시다.
읽기자료 2
문석봉은 32세 때인 1882년에 전라도 지역의 세곡을 조운선으로 서울에까지 운반하는 조운리(漕運吏)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첫 관리생활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그가 세곡을 싣고 목포 인근을 지날 때 전라도 지역의 기근 상태를 보고 정부의 허가 없이 곡식을 풀어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정부에서는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는 “나라를 속인 것은 죄이나 이 백성들은 어찌 나라 사람이 아니겠는가. 쌀을 중히 여겨 백성을 버리는 일은 차마 못하겠다!”라 하고 전라도의 방장산으로 들어갔다.
문석봉은 41세 때인 1891년 고향의 수문동에서 친척인 문용현과 함께 영파재를 짓고 빈민자제에게 한학을 교육하였다. 이 때 현풍군수 윤병이 그의 소질과 능력을 듣고 군내를 순찰하여 비적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를 인연으로 윤병이 과천군수로 옮겨갈 때 책실로 수행하여 포군장이 되었다.
문석봉은 1893년 5월에 비로소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경복궁오위장이 되었으며 그해 12월에 진잠 현감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다음해 3월 모친상을 당하여 과천의 본가로 돌아갔다.
문석봉은 1894년 11월 양호소모사의 직에 임명되어 공주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이때는 동학 농민군이 득세하던 시기였으며 충청지역에서는 그가 현감으로 재직하였던 공주부지역이 특히 심하였다. 문석봉은 진잠을 비롯하여 연산, 은진, 진산, 여산은 물론 청산, 보은 등지에까지 수차례 출정하여 동학 농민군 진압에 출중한 공을 세웠다. 이와 같이 문석봉의 동학 농민군 진압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연산을 비롯한 인근 6읍의 주민들이 진잠 지역에 선정비를 세워 그의 공을 기리기까지 하였다.
소모사로써 동학 농민군 진압에 공을 세운 문석봉은 동학 농민군을 ‘동적(東賊)’이라 표현 하는 등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학에 대한 지나친 탄압에는 반대하였다. 그가 체포한 동학접주 박만종이 공주부에서 처형당하자 이를 애석히 여기며 충청도 관찰사와 의견 대립을 하였고, 동학 농민군의 주력 부대가 패하여 흩어진 이후에도 각 지역의 유생들이 향민들을 모아 ‘의병’이라 칭하고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여 죽이는 일이 계속되자, 이는 ‘의병’이 아니라 ‘분병(忿兵, 성을 내고 원망하는 군대)’이라 비판하며 애석해 하였다.
- 질문1 문석봉이 조운리가 되었을 때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세곡을 나누어 주고 관직을 포기한 이유를 적어 봅시다.
- 질문2 문석봉이 각 지역의 유생들이 향민들을 모아 동학농민군을 공격한 부대를 ‘의병’이 아니라 ‘분병’이라 비판한 이유를 적어봅시다.
읽기자료 3
문석봉은 1895년 2월초에 신영 영장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석봉이 공주부에 구금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문석봉이 일본군을 토벌하기 위해 공주의 관병에게 신식훈련을 시켰다는 고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문석봉은 체포되어 서울 경무청에 구금되어 실형을 선고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문석봉의 의병활동이 을미사변 직후에 구체화되기는 하였지만, 이미 1895년 2월에 계획, 준비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의 위압적이고 무자비한 탄압, 거기에 비해 조선 정부의 나약함을 보고 그의 척왜론은 강화되었으며, 의병을 조직하여 외세를 물리쳐야 한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달았던 것이다.
1895년 6월 석방된 문석봉은 8월에 명성황후의 시해 소식을 듣고 “천고에 없는 강상의 대변”이라고 통분하였으며, 국모의 복수를 위하여 의병을 일으켜 흉적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그는 의병을 일으키기 전인 9월초 서울에 올라가 을미사변 직후의 분위기를 파악하였으며, 여러 인사들을 만나 봉기의 뜻을 밝히고 동조세력을 확보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민영환이 문석봉의 뜻을 듣고 환도 한 자루를 풀어 주며 격려 했다.
문석봉이 영남 출신으로 유성에서 기병한 것은 의병을 모으기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한 때문일 것이다. 문석봉은 유성과 인접한 진잠현의 현감을 역임하였으며, 이 일대는 양호소모사로서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며 인근의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받아 선정비까지 세워진 곳이었다. 또 서울에서 동조 세력을 확보하고자 할 때 거의에 찬동한 송근수, 신응조가 바로 회덕과 진잠의 사족이었던 것처럼 이 지역이 의병을 일으킬 수 있는 이념적 바탕이 강하였던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문석봉은 공주 출신의 김문주, 옥천 출신 오형덕, 회덕의 사족 송도순 등과 함께 회덕, 대전, 진잠, 유성 일대에서 의병을 모아 유성에서 기병하였다. 문석봉은 부대를 편성한 후 회덕현을 급습하여 무기고에 있는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한 다음 공격의 목표를 공주부 관아로 잡았다. 300여 명의 의병은 유성을 거점으로 진잠을 점령한 뒤 공암을 거쳐 공주를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의병 부대는 공주 와야동(현재, 공주시 소학동)에서 매복해 있던 관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문석봉은 패하여 흩어진 이후 오형덕 등과 함께 경상도 고령 초계 등지에서 다시 봉기를 준비하였다. 문석봉은 우선 고령 현감에게 원조를 요청하고, 이어 감역 김희순으로부터 군자금 지원을 약속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령현감의 고변으로 체포되어 대구부에 구금되고 말았다.
- 질문1 영남 출신인 문석봉이 유성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일까?
- 질문2 문석봉이 의병을 모았을 때 의병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은 주로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읽기자료 4
문석봉은 옥고를 치르면서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1896년 봄 최은동, 오형덕 등과 함께 감옥을 부수고 탈옥하여 재봉기를 시도할 정도로 의병 투쟁에 대한 의지가 열렬하였다. 탈옥한 이후 과천에 올라왔으나 문석봉의 집은 이미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져 있었다. 이후 서울에 들어와 정계의 요로들과 접촉을 시도하여 재기를 준비하였고, 이어 원주로 내려가 ‘도지휘’가 되어 각도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돌리며 제천의 유인석 의병 등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문석봉은 그해 11월 19일 쇠약해진 몸으로 병사하고 말아 의병을 일으킨 큰 뜻을 끝내 이르지 못하고 말았다.
- 질문1 문석봉이 주도한 유성 의병의 역사적 의의를 정리하여 봅시다.
- 질문2 을미의병은 문석봉 사망 이후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정리하여 봅시다.
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은 유성의병을 일으킨 문석봉의 영정이다. 문석봉은 1895년 9월 의병을 조직하고 “우리는 감히 욕되게 사는 것보다 영광되게 죽고자 하는 마음으로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고자 합니다.”라는 내용의 통문을 각지에 보내 을미의병의 효시가 되었다.
- 질문1 문석봉이 1895년 9월에 유성에서 의병을 일으키게 된 역사적 배경을 간단히 정리해 봅시다.
시각자료 2
다음은 문석봉이 의병을 일으킨 후 체포되기까지, 그리고 탈출 후 재기까지의 이동경로를 지도에 표시 한 것이다.
- 질문1 문석봉의 기병 후 체포되기까지의 행적을 간단히 정리해 봅시다.
시각자료 3
다음은 1896년 1월 3일 일본에서 간행된 『동경조일신문』에 실린 유성의병 봉기 관련 소식이다. 이 기사에는 충청도의 적도(賊徒)들은 통상의 화적들과 그 종류를 달리하며, 적도의 우두머리에 문석봉이란 자가 있어 격문을 전함에 10월 8일의 사변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나라를 위하여 그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 질문1 신문 기사에 문석봉이 일으킨 의병을 통상의 화적들과 그 종류를 달리한다고 적은 이유는 무엇일까 적어봅시다.
모둠활동
문석봉이 체포되어 관찰사로부터 공초(심문)를 받았다. 이 때 관찰사의 질문에 대한 문석봉의 답변을 모둠별로 추론하여 정리해 봅시다.
"문: 네 나이는 몇이고, 무슨 관직을 받았으며 어느 직에 있었으며 어느 곳에 사느냐?"
답:_______________
"문: 국모가 해를 입으신 일이 8월 19일인데 왜 9월 18일에 의병을 일으켰는가?"
답:_______________
"문: 너와 함께 모의한 자는 몇 사람이냐?"
답:_______________
"문: 네가 의병을 일으킨 것이 의로운 일이라 하나 불법한 일이다. 왕명 없이 군사를 일으킨 것은 무슨 법이냐?"
답:______________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