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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봉 의거지(옛 밀양경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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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생활은 밝음과 어둠이 기묘하게 혼합된 것이다. 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므로 살아 있는 동안이라도 마음껏 즐기려했던 것이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멋진 친구들이었다. 사진 찍기를 아주 좋아했으며, 언제나 이번이 마지막으로 찍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 글은 항상 삶과 죽음 사이에서 살아가던 의열단원을 묘사한 글이다. 밀양경찰서 투탄의거는 의열단에 의한 최초의 투탄의거로 의열단원 최수봉이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의거이다. 1920년 12월 27일 오전 9시 30분 밀양경찰서장 와타나베가 경찰서원 19명을 모아놓고 훈시를 하고 있을때 최수봉은 폭탄 2개를 투탄하였다. 첫 번째 폭탄은 불발이었고, 두 번째 폭탄은 폭발했으나 성능이 좋지 못해 큰 피해는 주지 못했다. 그는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일제 경찰의 추격을 받다가 스스로 자결하고자 하였으나 상처만 입고 체포되었다. 최수봉은 1921년 2월 1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 받았으나 담당검사의 공소로 4월 1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이에 상고하였지만 1921년 5월 23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대구 감옥에 수감된 최수봉은 1921년 7월 8일 오후 3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현재 상태

1894년 경남 밀양군 상남면에서 태어난 최수봉은 사립 동화학교를 다니면서 교장 전홍표의 강렬한 조국애와 항일의식에 영향을 받았고 동화학교 강제 폐교 후에는 동래 범어사의 명정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이후 1913년 평양의 숭실학교에 입학하여 다시 3년간 수학한 후,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서간도로 가서 안둥〔安東〕과 펑텐〔奉天〕 사이를 오가며 활동하다 귀국하여, 광산노동·우편집배 등에 종사하며 기회를 기다렸다. 
1920년 11월 최수봉은 밀양에서 옛 친우 김상윤과 동행인 이종암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고, 독립운동의 방법을 논하다 폭탄 투척으로 밀양경찰서를 파괴하기로 합의하였다.
한편 조선의열단은 1919년 11월에 만주 지린성〔吉林省〕 파로문에서 김원봉, 윤세주 등 13인이 조직하였다. 의열단이라는 명칭은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 의미를을 담고 있다. 이들은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단 한명도 배신하지 않았다. 
의열단은 일제의 요인 암살과 식민 통치 기관 파괴를 목적으로 소수 정예의 대원으로 구성되었다. 조직 형태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으며 매우 엄격한 행동 지침을 가진 단체였다. 조직된 지 얼마 후 의열단은 베이징으로 근거지를 옮기고 각지에서 단원을 포섭하여 1925년경에는 70명의 결사 대원을 확보한 단체로 성장하였다. 
의열단은 일제에게 위협과 공포의 대상이 될 정도로 많은 의거를 일으켰다. 1920년에는 박재혁이 부산 경찰서 투탄 의거를 일으켰고, 이듬해에는 김익상의 총독부 투탄 의거가 있었다. 1923년에는 김상옥의 종로 경찰서, 김지섭의 일본 황궁 투탄 의거가가 있었다. 1926년에는 나석주가 한국 경제 침탈의 본거인 동양 척식 주식 회사와 식산 은행에 투탄하고 총격전을 벌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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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1910년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제국주의는 한국인의 저항을 무조건적 폭력수단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헌병경찰제를 실시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1919년, 민족독립의 열망과 에너지가 분출하여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은 그 열기가 고조되면서 일부 지역에서 대중적 폭력항쟁의 면모도 내보였지만, 기본적으로는 비폭력·평화적 만세시위운동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성격이 한계가 되어 3·1운동은 일제의 잔혹한 탄압을 뚫고나가지 못하였고, 결국 많은 희생을 낸 채 끝나고 말았다. 이에 망명 독립지사들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조직적인 무장투쟁과 폭력적 수단의 동원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1919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노선은 외교론 일변도에서 민족독립 성취가 결국은 전쟁을 통해서만 가능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장기 전략을 수립하였다. 
무력투쟁은 비교적 큰 규모의 병력과 장비, 일정한 숙영지 겸 근거지, 조직편제와 지휘체계 등 이 세 가지가 필수요건이었다. 
이에 비해 의열투쟁은 순전히 개인적인 결의와 준비로만 이루어지거나 소집단 규모의 비밀결사나 큰 조직체에 속한 하위 별동조직의 독자적 판단과 선택에 의해 목표물과 행동방식이 결정되었다. 노출 가능성이 큰 근거지의 상비나 조직체계의 완비도 필요하지 않았다. 바로 이런 측면들 때문에 의열투쟁은 독립군의 편성과 군사작전의 전개가 매우 어렵거나 아예 불가능한 시·공간에서 우선적으로 채택되는 대체투쟁 방책이 되었다. 소수 인원과 적은 비용으로 기동성과 집중성을 최대한 발휘하여 수행되는 암살파괴활동은 군사행동 못지않게 위력적인 성과를 낳는 경제적인 투쟁방법이었다.
1920년대의 의열투쟁의 주된 현장은 국내였다. 그러나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일본 총영사관이 들어서 있고 밀정들이 득시글거린 상하이, 베이징 등 중국의 대도시와 만주지역 일원도 의열투쟁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

  • 질문1 1920년대 의열투쟁이 독립운동의 중요한 전략으로 선택된 이유를 써봅시다.

읽기자료 2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 생존의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중략) 강도 일본이 헌병정치·경찰정치를 힘써 행하여 우리 민족이 한발자국의 행동도 임의로 못하고,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일체의 자유가 없어 고통의 울분과 원한이 있어도 벙어리의 가슴이나 만질 뿐이오, 행복과 자유의 세계에는 눈뜬 소경이 되고, 자녀가 나면, “일어를 국어라 일문을 국문이라”하는 노예양성소 학교로 보내고, (중략) 우리 민족은 아주 인류의 자각을 잃을 뿐 아니라, 곧 자동적 본능까지 잃어 노예로부터 기계가 되어 강도 수중의 사용품이 되고 말 뿐이며, (중략) 참혹한 수단을 써서 공포와 전율로 우리 민족을 압박하여 인간의 <산송장>을 만들려 하는 도다. 이상의 사실에 의거하여 우리는 일본 강도정치 곧 이족통치가 우리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함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내정독립이나 참정권이나 자치를 운동하는 자가 누구이냐. (중략) 3.1운동 이후에 강도 일본이 또 우리의 독립운동을 완화시키려고 송병준·민원식 등 한 두 매국노를 시키어 이따위 광론을 외침이니, 이에 부하뇌동하는 자가 맹인이 아니면 어찌 간사한 무리가 아니냐? (중략) 일본을 종주국으로 봉대한다 함이 치욕이란 명사를 아는 인류로는 못할지니라.
일본 강도 정치하에서 문화운동을 부르는 자가 누구이냐? 문화는 산업과 문물의 발달한 총적(總積)을 가리키는 명사니, 경제약탈의 제도 하에서 생존권이 박탈된 민족은 그 종종의 보존도 의문이거든, 하물며 문화발전의 가능이 있으랴? (중략) 
이상의 이유에 의거하여 우리는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과 타협하려는 자나 강도 정치하에서 기생하려는 주의를 가진 자나 다 우리의 적임을 선언하노라.

강도 일본의 구축(驅逐)을 주장하는 가운데 또 다음과 같은 논자들이 있으니, 제1은 외교론 이니, (중략) 그러고도 국망 이후 해외로 나가는 모모 지사들의 사상이, 무엇보다도 먼저 외교가 그 제1장 제1조가 되며, 국내 인민의 독립운동을 선동하는 방법도 “미래의 일미전쟁(日美戰爭)·일로전쟁 등 기회”가 거의 천편일률의 문장이었고, 최근 3·1운동의 일반 인사의 평화회의, 국제연맹에 대한 과신의 선전이 도리어 2천만 민중의 용기 있게 힘써 앞으로 나아가는 의기를 없애는 매개가 될 뿐이었도다.
제2는 준비론이니, (중략) 강도 일본이 정치·경제 양 방면으로 구박을 주어 경제가 날로 곤란하고 생산기관이 전부 박탈되어 입고 먹을 방책도 단절되는 때에, 무엇으로 어떻게 실업을 발전하며, 교육을 확장하며, 더구나 어디서 얼마나 군인을 양성하며, 양성한들 일본전투력의 백분의 일의 비교라도 되게 할 수 있느냐? 실로 한바탕의 잠꼬대가 될 뿐이로다.
이상의 이유에 의하여 우리는 외교, 준비 등의 미몽을 버리고 민중 직접혁명의 수단을 취함을 선언하노라.

조선민족의 생존을 유지하자면, 강도 일본을 쫓아내어야 할 것이며, 강도 일본을 쫓아내려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 뿐이니,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쫓아낼 방법이 없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가 혁명에 종사하려면 어느 방면부터 착수하겠는가?  (중략) 그러므로 우리 혁명의 제일보는 민중각오의 요구니라.
민중이 어떻게 각오하는가? 민중은 신인이나 성인이나 어떤 영웅호걸이 있어 <민중을 각오>하도록 지도하는 데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요, “민중아, 각오하자” “민중이여, 각오하여라.” 그런 열렬한 부르짖음의 소리에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민중이 민중을 위하여 일체 불평·부자연· 불합리한 민중향상의 장애부터 먼저 타파함이 곧 <민중을 각오케>하는 유일한 방법이니, 다시 말하자면 곧 먼저 깨달은 민중이 민중의 전체를 위하여 혁명적 선구가 됨이 민중 각오의 첫째 길이다.
 (중략) 
이제 폭력 - 암살· 파괴 ·폭동 - 의 목적물을 열거하건대,
㉠ 조선총독 및 각 관공리
㉡ 일본천황 및 각 관공리
㉢ 정탐꾼·매국적
㉣ 적의 일체 시설물
이외에 각 지방의 신사나 부호가 비록 현저히 혁명운동을 방해한 죄가 없을지라도 만일 언어 혹 행동으로 우리의 운동을 지연시키고 중상하는 자는 우리의 폭력으로써 마주 할 지니라. 일본인 이주민은 일본 강도정치의 기계가 되어 조선민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선봉이 되어 있은즉 또한 우리의 폭력으로 쫓아낼지니라.

혁명의 길은 파괴부터 개척할지니라. (중략) 제1은, 이족통치를 파괴하자 함이다. (중략) 제2는 특권계급을 파괴하자 함이다. (중략) 제3은 경제약탈제도를 파괴하자 함이다. (중략) 제4는 사회적 불평균을 파괴하자 함이다. (중략) 제5는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하자 함이다. (중략) 이제 파괴와 건설이 하나요, 둘이 아닌 줄 알진대, 민중적 파괴 앞에는 반드시 민중적 건설이 있는 줄 알진대, 현재 조선민중은 오직 민중적 폭력으로 신조선(新朝鮮) 건설의 장애인 강도 일본 세력을 파괴할 것뿐인 줄을 알진대, 조선민중이 한 편이 되고 일본강도가 한 편이 되어, 네가 망하지 아니하면 내가 망하게 된 <외나무다리 위>에 선줄을 알진대, 우리 2천만 민중은 일치로 폭력 파괴의 길로 나아갈지니라.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 암살· 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 질문1 의열단이「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한 목적을 써 봅시다.
  • 질문2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기존의 독립운동의 방법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어떠한 독립운동의 방법에 대해 비판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 써 봅시다.
  • 질문3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독립운동의 진정한 방략이 무엇이라고 보고 있으며 열거한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지 써봅시다.

읽기자료 3

1894년 경남 밀양군 상남면에서 태어난 최수봉은 사립 동화학교를 다니면서 교장 전홍표로부터 강렬한 조국애와 항일의식을 고취받았고, 동화학교 강제 폐교 후 동래 범어사의 명정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이후 1913년 평양의 숭실학교에 입학하여 다시 3년간 수학한 후,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서간도로 가서 안둥〔安東〕과 펑텐〔奉天〕 사이를 오가며 활동하다 귀국하여, 광산노동·우편집배 등에 종사하며 기회를 기다렸다. 1920년 11월 최수봉은 상남면 기산리 묘지에서 옛 친우 김상윤과 동행인 이종암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고, 독립운동의 방법을 논하다 폭탄 투척으로 밀양경찰서를 파괴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종암과 김상윤은 국외 망명 시절 폭탄제조법을 배웠는데 제조기를 반입해 두었던 고인덕을 안학수의 소개로 만나서, 대·소 폭탄 1개씩을 밀양 외곽 산속의 암굴에서 제작토록 하고 송혜덕에게 보관시켰다. 거사 일자는 밀양경찰서장 와타나베 경부가 매주 월요일 아침에 관내 순사들을 소집하여 훈시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월요일인 12월 27일로 하였다. 그리고 거사 실행은 최수봉과 이원경 2인이 같이 하기로 정하였는데 이원경에게 사정이 생겨서 최수봉 혼자 결행하게 되었다. 
하루 전날 밀양의 한 농막에서 폭탄 2개를 건네받은 최수봉은 27일 아침 9시 30분경 경찰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창문을 통해 사무실 안으로 힘껏 폭탄을 투척하였다. 먼저 던진 대탄은 유리창을 깨고 날아가, 순사부장 남경오의 팔에 맞아 사무실 바닥에 떨어지면서 충격이 약해져서 터지지 않았다. 제2탄은 달려나오는 경찰들을 향해 현관 입구에서 안쪽으로 투척하니 마루바닥에 떨어지면서 큰 폭음과 함께 터졌는데, 폭발력이 그다지 크지를 못하였다. 투탄행동을 끝낸 최수봉은 밀양성 서문 쪽의 민가로 피신했는데, 사태를 수습한 경찰이 급거 추적하자, 체포되느니 차라리 자결하기로 마음먹고 칼로 목을 찔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일경에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법정에서 그는 “나의 목적을 달성하면 내 손으로 자결하려 했는데, 이제 너희들에게 잡혀서 이런 욕을 당하니 통분할 뿐이다”라고 재판장에게 일갈하며 열사적 기개를 꺾지 않았다. 1921년 2월 1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이, 검사 공소에 의한 2심인 대구복심법원에서 4월 16일 사형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1921년 5월 23일 경성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으로 사형이 확정된 그는 동년 7월 8일, 대구감옥에서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밀양 청년들이 시신을 인계받아 운구하려 하자, 경찰당국은 이를 불허하고 청년들을 치안방해라 하여 구속·송치하였다. 박재혁 장례 때와 마찬가지로 경찰서를 공격한 데 대한 앙갚음이었다. 그래서 최수봉의 유해는 안장되지 못하고, 자결 기도 때 흘린 피가 배어든 혈의만 거두어 보존되었다. 

  • 질문1 최수봉이 의열단에 가입하기 전에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 말해봅시다.
  • 질문2 최수봉이 밀양경찰서에 투탄을 하고 체포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하여 말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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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 질문1 사진은 최수봉 의사가 폭탄을 던졌던 밀양경찰서 모습이다. 최수봉 의사가 경찰서를 폭파하려고 한 이유를 써봅시다.

시각자료 2

  • 질문1 사진은 최수봉 의사의 판결문이다. 사형선고를 받는 최수봉 의사의 입장에서 “최후 변론”을 글로 써 봅시다.

시각자료 3

  • 질문1 순국 후 최수봉 의사 집안은 어떠한 어려움에 상황에 처했을지 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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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의열활동에 찬성하는 입장과 반대하는 모둠으로 나누어 토론해 봅시다.
모둠활동 2
의열 투쟁의 결과, 조선인과 일본인, 그리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조선의 독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였을지 토론해 봅시다.

모둠활동 3
의열단의 활동이 주로 일제의 식민 지배에 관련된 인물에 대한 암살이나 주요 건물에 대한 파괴 활동으로 나타났다. 두 모둠으로 나누어 당시 의열투쟁을 테러리즘의 범주로 볼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토론해 봅시다. 

* 테러리즘 : 어떤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직접적인 공포 수단을 이용하는 주의나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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