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의 만세 시위에 참여하고 돌아온 주민들은 비밀리에 만세 시위 준비를 하였다. 천도교 남양교구 순회전교사 백낙열은 관내 각 전교실(傳敎室)에, 김흥렬은 천도교 전교사 안종환과 안정옥·안종후, 팔탄면 가재리의 한학자 이정근과 연락하였다. 만세 시위 계획이 구체화됨에 따라 장안·우정면 지역에서는 산상횃불시위를 준비해나갔다. 4월 1일 밤 7시 수촌리 개죽산의 봉화를 신호로 조암리 쌍봉산, 팔탄면 천덕산, 향남면 가재리 당재봉, 장안면 석포리 무봉산, 어은리 남산, 우정면 이화리 보금산, 장자터 봉화산, 운평리 성신재, 매향리 망원대 등 각 산봉우리에서 일제히 봉화가 치솟았다.
만세 시위는 4월 3일 전개되었다. 이날 아침 일찍부터 장안면 사무소를 향하여 시간 차이를 두고 동리별로 집결이 이루어졌다. 우정면 주곡리 주민은 장안면 석포리로 와서 이곳 주민과 합류하여 장안면사무소로 향했다. 수촌리 주민의 집결지는 수촌리의 밀양산이었다. 처음에 한 50명쯤 모였다가 점점 인원이 불어서 100여 명이 되자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장안면사무소로 갔다. 면사무소가 위치한 장안리에서도 모든 주민이 참여하였다. 오전 10시 반경 장안면사무소에 모인 시위 군중은 면사무소 안으로 들어가 장안면장 김현묵에게 시위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였다. 면장이 만세를 외치자 시위는 크게 활기를 띠었다. 한편, 시위대는 면사무소의 서류와 집기를 부수고 불태워버렸다.
이어 시위 군중은 쌍봉산으로 이동하여 만세를 부른 후 우정면으로 향하였다. 시위 군중은 1,500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가 우정면사무소에 도착했을 즈음 이곳 면장과 서기들은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이에 군중이 면사무소를 돌과 몽둥이로 부수고 들어가 안에 있는 책상과 의자, 서류상자는 물론 그곳에 있는 서류 전부를 태웠다. 이어 시위 군중은 화수주재소로 이동하였다. 시위 군중은 태극기와 머리띠를 두른 20~30명의 ‘결사대’를 앞세우고 그 뒤를 따랐다. 주재소에 이르자 시위 군중은 일제히 돌을 던지며 공격했다. 주재소 헌병들은 총을 쏘며 대응함으로써 사상자가 계속 발생하였다. 이에 흥분한 시위 군중은 화수주재소를 불태우고 카와바타[川端] 순사를 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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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주민들이 만세 시위를 하면서 공격한 기관은 어느 기관들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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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2
장안·우정면 주민들은 왜 이들 기관을 공격했을까요?
만세 시위에서 일본인 순사가 살해되자 일제는 보복을 시작하였다. 4월 4일 새벽 일본군 제20사단 39여단 78연대 소속 아리타 중위가 이끄는 1개 소대 병력이 발안에서 이동하여, 화수리를 완전히 포위하였다. 화수리·굴원리 주민은 일본 경찰의 보복을 예상하고 노인들만 남기고 원안리와 호곡리 바다 쪽으로 가족들을 이끌고 피신했다. 일본군은 동네에 사람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집집마다 불을 놓았으며, 남아 있던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다가 몽둥이질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화수리 구장이었던 송찬호는 72군데나 난도질을 당했다. 체포와 고문이 동리마다 이어졌다. 한각리·마산동 주민은 초주검이 되도록 매질을 당하였고 조암리에서는 주민들이 보이지 않자 마을에 불을 질렀다.
4월 5일 새벽 아리타 중위가 이끄는 30명의 일본군은 수촌리를 포위하고 집집마다 불을 놓고 불길을 피해 집을 뛰쳐나오는 주민들에게 총을 쏘았다. 이날 방화로 민가 24채가 불탔다. 또한, 일본군은 이날 저녁 70여 명의 주민을 밧줄로 묶어 발안주재소로 끌고 가서 악랄한 고문을 하였다. 이어서 발안주재소장 사사카[佐板]는 아리타 부대의 모든 병력을 동원, 수촌리 주변 마을 주민 130여 명을 발안주재소로 끌고 가 갖은 고문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4월 8일 수촌리에 불타지 않고 남아 있던 집들을 다시 불태웠다. 그리하여 마을 가옥(집) 총 42채 가운데 38채가 잿더미가 되었다. 이와 같은 탄압은 이웃 마을로 이어졌다.
4월 9일에는 쓰무라[津村] 헌병특무조장을 책임자로 3개 반을 편성, 오산과 장안 우정면이 있는 화수반도 일대에서 조금이라도 의심 간다고 생각되는 주민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특히 4월 10일과 11일 이틀간 화수리를 중심으로 부근 장안·우정면의 25개 마을에서 200명을 잡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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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아리타 중위가 이끄는 일본 헌병들이 장안·우정면 주민들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보복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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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2
아리타 중위가 이끄는 일본 헌병들이 수촌리 주민들에게 어떻게 보복하였나요?
아리타 중위는 화성지역 3·1운동의 근원이 제암리의 천도교도와 기독교도라는 말을 들었다. 아리타 중위는 제암리 주민을 잡아들이고 겁을 줄 목적으로 헌병 11명을 이끌고 4월 15일 제암리를 포위하였다. 아리타 부대는 제암리 주민들 가운데 성인 남자(15세 이상)들을 이 마을 감리교 교회 건물로 모이게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모이지 않자 미리 명단을 파악한 듯 오지 않은 사람은 찾아가 불러왔다.
주민들이 예배당에 모두 모이자 일본 헌병대는 교회를 완전히 포위하고 출입구와 창문을 모두 큰 못으로 박아 도망가지 못하게 막은 다음 교회에 불을 지르고 일제히 집중 사격을 하였다. 교회 예배당 안에 갇힌 사람들은 대부분 불에 타 숨졌으며, 교회에서 필사적으로 탈출하려던 사람들도 수비대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천도교 전교사 안종환은 어린 아들을 안고 예배당으로 들어갔다가 죽게 되자 어린 아들을 창밖으로 내보내며 “나는 죽어도 좋으니 이 어린 것만은 제발 살려 달라.”고 애원하였으나 수비대들은 어린아이를 칼로 내리쳐서 죽였다.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가운데 오직 노경태만이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 뿐 모두 23명의 주민이 예배당 안에 있다가 희생당하였다.
이어서 일본군은 교회뿐만 아니라 온 마을을 다 불 질렀다. 제암리 33채의 가옥 가운데 외딴 집 2채만 남고 31채가 모두 불탔다. 마을 전체를 태운 연기와 재는 시체를 태우는 악취와 함께 30여 리 밖 오산까지 퍼져갔다. 또한, 아리타 부대는 창자가 나오도록 시체를 총검으로 일일이 찌르며 다녔다.
제암리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은, 일제에 의해 불타버린 수촌교회의 사정을 살피기 위해 이 지역을 찾아온 언더우드(H.H. Underwood) 선교사 일행에 의해 외부로 알려졌다. 이들 선교사들은 현장증언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하여 미국 교회에 사실을 알렸다. 또한, 외교적인 노력을 통해 제암리에서 벌어진 야만스런 행동에 대해 조선총독부에 항의하고, 대책 마련을 요구하였다. 이 사건으로 한국 내 선교사뿐 아니라 외국에서까지 일본에 대한 여론이 나쁘게 돌아가자 조선군사령부에서는 사건의 주범인 아리타 중위를 군법회의에 넘겼다. 그리고 학살사건의 원인이 된 수촌리와 화수리 토벌작전을 지휘한 장교들에게도 책임을 묻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나쁘게 돌아가는 여론을 돌리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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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아리타 중위가 화성지역 3·1운동의 중심 세력으로 지목한 이들의 종교는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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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2
1919년 4월 15일 제암리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학살사건은 어떤 사람들에 의해 어떻게 국제사회에 알려졌나요?